본문바로가기
통합검색

메인 주요 글

주요 아티클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1971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에서 구재천(具在天)이 발견한 청동기시대의 일괄유물. 1972년 3월 2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1972년 3월 2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도합 6종 11점으로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1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에서 구재천(具在天)이 집 바깥에 배수로를 설치하다가 토광묘에서 발견하였다. 유물은 다음과 같다. ① 청동검(靑銅劍) 3점:길이 32.8cm, 최대너비 3.8cm 1점, 길이 29.5cm, 최대너비 3.2cm 1점, 길이 24.7cm, 최대너비 3.5cm 1점. ② 청동팔령구(靑銅八鈴具) 2점:2점 모두 지름 12.3cm, 방울지름 2.6cm. ③ 청동쌍령구(靑銅雙鈴具) 2점:2점 모두 길이 17.8cm, 요령너비 2.7cm. ④ 청동삭구(靑銅削具) 1점:길이 11.4cm, 최대너비 1.7cm. ⑤ 청동투겁도끼[靑銅銎  斧] 1점:길이 7.7cm, 폭 4.4cm. ⑥ 청동잔무늬거울[靑銅細文鏡] 2점:지름 18cm, 두께 0.2cm인 것 1점, 지름 14.6cm, 두께 1.8cm인 것 1점. 청동검은 날이 좁고 양 끝에 날이 서 있으며, 그 중 1점은 칼날 부분이 손상되어 있다. 동검 중앙에 굵게 나온 등줄의 모습이 각기 다른 것이 특징이며, 한국에서 출토되는 동검으로는 시대가 늦은 편이나 우리나라 동검의 전형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청동팔령구는 8각형의 별모양으로 생겼으며, 각 모서리에 둥근 방울이 하나씩 달려 있으며, 뒤판의 가운데에는

포블레트 수도원

포블레트 수도원

스페인 타라고나주의 포블레트에 있는 수도원.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카탈루냐 지방의 한적한 골짜기에 있는 수도원과 성채가 결합된 유일한 건축물이다. 시토회의 전형적인 수도원 건축 가운데 하나로서, 1149년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렌게르 4세가 건설하였다. 중세에는 군주들의 보호를 받았고 전성기를 누린 14세기에는 근처에 있는 산테클뤼우수도원·발보나수도원과 함께 '시토회의 3각형'이라고 일컬어졌다. 수도원 앞에는 커다란 앞뜰이 펼쳐져 있다. 12세기에 처음 세운 회랑은 15세기에 개축하였는데, 로마네스크양식의 기둥머리와 고딕양식의 아치가 결합한 형태로 되어 있다. 회랑 가운데에는 분수가 있고 그 주변에 집회실·접견실·식당·부엌·도서실 등이 자리잡고 있다. 회랑 남쪽에는 성당이 있고 북쪽에는 1185년에 지은 병원이 있다. 성당은 로마네스크양식으로 건설하였는데, 내부에는 1529년 다미안 포르멘이 제작한 제단 장식벽으로 꾸민 주제단이 있다. 성당 교차부에는 카탈루냐 아라곤 왕실의 역대 왕들과 귀족들의 무덤이 있다. 수도원 주위에는 14세기에 만든 3중 성벽을 둘렀으며 방어용 탑과 '왕궁의 문' 등이 세워져 있다. 1991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슬라이드 바로가기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의 무장 ·정치가.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던 중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일본통일을 이룩했다.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에서 태어났다.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29세 이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하였다가,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 간파쿠[關白]가 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혼노지[本能寺]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다이라[平]씨를 성씨로 사용하였으며 1585년 관백(關白)이 되자 후지와라[藤原]씨로 성을 다시 바꾸었다.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씨는 1586년부터 사용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한 그는 1590년 반대세력을 모두 굴복시키고 일본을 통일함으로써 모모야마[桃山]시대를 열었다. 1593년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몰 수 하였고 관리를 파견하여 모든 토지를 조사하였다. 농민들은 이제 농사를 짓는 일에만 집중하고 무사가 되거나 다이묘가 되겠다는 의도를 가질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무사와 농민의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하였다. 이로 인하여 농업기술의 발전과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당시 세금은 쌀로 징수 되었기 때문에 많은 물자가 이동하였고 이를 담당하는 상인들은 많은 재산을 모을 수

포토커뮤니티

지구촌 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