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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재

영산재

불교의식의 하나. 1973년 11월 5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73년 11월 5일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9년 9월 30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49재 가운데 하나로 사람이 죽은 지 49일 만에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이다. 이 의식에는 상주권공재 ·시왕각배재 ·영산재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영산재는 가장 규모가 큰 의례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영산재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던 영산회상을 상징화한 의식절차이다. 영산회상을 열어 영혼을 발심시키고, 그에 귀의하게 함으로써 극락왕생하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영산재는 국가의 안녕과 군인들의 무운장구, 큰 조직체를 위해서도 행한다.  영산재가 진행되는 절차는 매우 복잡하다. 우선 의식도량을 상징화하기 위해 야외에 영산회상도를 내어 거는 괘불이운(掛佛移運)으로 시작하여 괘불 앞에서 찬불의식을 갖는다. 괘불은 정면 한가운데 걸고 그 앞에 불단을 세우는데 불보살을 모시는 상단, 신중(神衆)을 모시는 중단, 영가를 모시는 하단 등 삼단이 있다. 그 뒤 영혼을 모셔오는 시련(侍輦), 영가를 대접하는 대령, 영가가 생전에 지은 탐 ·진 ·치의 삼독의 의식을 씻어내는 의식인 관욕이 행해진다. 그리고 공양드리기 전에 의식장소를 정화하는 신중작법(神衆作法)을 한 다음 불보살에게 공양을 드리고 죽은 영혼이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찬불의례가 뒤를 잇는다. 이렇게 권공의식을 마치면

푸치페이피엔

푸치페이피엔

소의 염통 등의 잡부위를 양념과 함께 오랜 시간 익혀 매운 소스를 곁들여 차갑게 먹는 중국요리. 소의 염통, 혀, 두피 등의 잡부위를 양념과 함께 오랜 시간 삶은 후 얇게 포를 뜻이 잘라서 매운 소스를 곁들여 차갑게 먹는 냉채류의 하나로 중국 쓰촨성의 청두(成都) 지역을 대표하는 요리이다. 음식의 유래 푸치페이피엔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는데 1930년대 중국 청두에서 음식장사를 하는 부부가 있었다. 이 부부가 만드는 반찬은 당시 소의 값싼 부위만을 가지고 만들어졌는데, 맛이 좋고 가격도 저렴하여 시중에 인기가 많았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 반찬을 소의 잡부위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하여 ‘쓸모없는 부위’라는 뜻을 가진 중국어 ‘페이피엔(废片)’을 부부라는 뜻의 ‘푸치(夫妻)’뒤에 붙여 ‘푸치페이피엔(夫妻废片)’이라 하였다. 이후 ‘페이(废)’는 요리에 소희 허파도 사용이 됐다 하여 허파를 뜻하는 ‘페이(肥)’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훗날 허파의 식감이 좋지 않다고 해서 요리의 재료에서는 빠졌고, 현대에 들어서는 소고기의 잡부위 뿐만아니라 소고기도 넣어서 만들기 시작했다. 조리법 소고기와 소고기의 잡부위인 소의 혀, 두피, 염통, 천엽을 준비하고 양념에 사용될 팔각, 정향, 계피,

안티과 과테말라

안티과 과테말라

과테말라에 있는 사카테페케스주(州)의 주도(州都). 옛 안티과, 과거의 수도 과테말라의 수도 과테말라 시에서 북서쪽으로 25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작은 도시로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인근에 아구아, 아카테난고, 푸에고 등 세 개의 화산이 있어 지진과 홍수 피해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안티과 과테말라는 16세기 중반 에스파냐에 의해 건설되어 200여 년간 과테말라 왕국의 수도로 번영했다. 전성기는 17세기로 인구 7만에 중앙아메리카 예술 학문 중심지였다. 하지만 1773년 두 차례의 대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자 25km 떨어진 곳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과테말라 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수도를 ‘옛 과테말라’라는 뜻의 안티과 과테말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간단히 줄여서 안티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300년 전 식민지 개척시대의 향기 인구 3만 명의 안티과는 쉬엄쉬엄 걸어도 하루가 안 되어 다 볼 수 있는 작은 규모지만 옛 왕국의 수도답게 곳곳에 유적이 있어 볼거리가 많다. 지진으로 무너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과거의 건축물 사이를 걷노라면 300년 전 식민지 개척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도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중앙 공원 근처에는 시청사로 쓰이는 과거 총독부 건물, 아직도 복원공사 중인 대성당, 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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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

표트르 1세

러시아 로마노프왕조 제4대의 황제(재위 1682∼1725). 튀르키예의 요새 아조프를 공격, 차지하였고 총병대(銃兵隊)의 반란 진압을 계기로 러시아의 모든 관습 ·풍속에 일대개혁을 단행하였다. 스웨덴과 북방전쟁을 벌여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을 손에 넣었다. 1721년 원로원이 그에게 ‘임페라톨’(황제)이라는 칭호를 보내면서 러시아 절대주의왕정이 확립되었다. 알렉세이의 14째 아들이다. 알렉세이 황제의 후처(後妻) 나타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10세 때에 궁중혁명(宮中革命)으로 크렘린에서 쫓겨나 모스크바 근교 프레오브라젠스코에 마을로 이사하였다. 정규 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으나,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건강하여, 초인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정력적인 방법으로, 러시아에 주류하던 외국인들로부터 포술(砲術) ·조선술(造船術) 등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 익혔다. 1682년 이복형(異腹兄) 이반 5세, 이어서 이복 누나 소피아와 병립(竝立)하여 정무(政務)를 보다가, 소피아가 그에 대한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하자, 1689년 정치의 실권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1695년 돈강(江)의 하구(河口)에 있는 튀르키예의 요새 아조프를 공격하다가 실패하자, 많은 외국인 기사(技師)들을 초빙하는 한편 전국의 장인(匠人)들을 소집하여 함대(艦隊)를 편성하고, 이듬해 다시 튀르키예를 공격하여 아조프를 차지하였다. 1697년에는 튀르키예에 대한 서유럽 기독교국들의 동맹 체결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워 서유럽에 사절단(使節團)을 파견하면서, 자기 자신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변장하여 러시아의 군주로서는 최초로 서유럽 각국을 여행하여 견문을 넓히고, 스스로 직공(職工)이 되어 포술 ·조선술 등을 익혔다. 그의 서유럽 여행은 본국의 총병대(銃兵隊)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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