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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278

제목

가촌본리마을
嘉村本里

지역

경상남도 > 양산시 > 물금읍 > 가촌리
Gyeongsangnam-do > Yangsan-si > Mulgeum-eup > Gachon-ri
慶尙南道 > 梁山市 > 勿禁邑 > 佳村里

올린이
등록일

최**
201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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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내용

키워드,백과사전 항목보기
사진 설명

가촌본리마을

1. 위치와 환경

가촌리 본리(本里)마을은 양산에서 서쪽으로 약 5Km, 물금읍에서는 북동쪽으로 약 2km에 자리잡고 있으며, 양산과 삼랑진을 연결하는 지방도(1022)가 마을을 동서로 통과하고 있다. 마을 북쪽은 오봉산(五峰山:일명 취서산) 정상을 경계로 원동면 화제리와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양산메기들을 가로지르는 양산천(梁山川)을 사이에 두고 동면 금산리와 마주보고 있다.

동쪽은 청룡등 옆 개울을 경계로 범어리 서남마을과 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백호등을 넘어 어봉골 개울을 경계로 가촌 새터(신기)마을과 접하고 있다.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 안은 오봉산에서는 좌(동쪽)는 청룡등, (서쪽)는 백호등(白虎嶝)이 뻗어 내렸다. 마을앞(남쪽(으로 펼쳐진 메기들 가운데로 양산-구포간의 고속도로가 동서로 관통하고 있다.

옛부터 마을 주민들은 풍수설을 따라 좌청룡 우백호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고 보아 청룡등과 백호등을 가꾸는데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곧 백호등이 좀 낮다 하여 청용등의 나무는 낮게 키우고 백호등의 나무는 높게 키워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기에 현 1022번 지방도(일제시대에는 국도였음)가 부설되자 청룡등의 중허리(중곡고개)와 마을 중심부가 잘려 나가 산의 혈()이 끊기게 되었다고 안타가와 하고 있다.

지금의 본리마을과 신기마을 사이의 밭(5만평)은 개인주택 및 연립주낵용 주택지로 개발되어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으며, 마을 뒷산아래 밭들도 택지로 개발될 예정이다. 또 마을의 일부(30)와 들판도 물금신도시의 일부로 들어가게 되어 급속히 옛모습을 잃어 갈 것이다.

 

2. 마을의 내력

이 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가를 밝혀 주는 문헌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사기곡, 오동곡(옷나무골), 샛갓등에서 나오는 기와장, 토기편 등으로 미루어 삼국시대 초기 곧 신라초부터 사람들이 주거하였음을 알수 있다.

이외에 문헌상으로는 분성배씨(盆城裵氏) 족보를 살펴 보면 고려말 (1,400년경)에 분성배씨가 이 지역에 입촌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형태의 마을은 조선중기(1,700년경) 이후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대에 양산천개수공사로 메기들이 조성되면서 특히 외지인들이 많이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한 것으로 보인다. 구전에 의하면 입촌성씨의 순서는 분성배씨, 다음은 문화류씨(文化柳氏), 부여백씨(扶餘白氏), 밀양박씨(密陽朴氏), 동래정씨(東萊鄭氏), 파평윤시(坡平尹氏) 순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 무렵의 인구는 본리마을에는 약 60여호, 야리마을에는 약 15호가 거주하였다. 그러나 1934년 갑술대홍수로 야리(野里) 일대가 완전히 침수되는 바람에 약 10여호 정도만이 남아 1960년대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전기, 전화, 교육, 식수 등 생활의 불편이 계속되었고 또 마을의 이주를 권하는 정부시책에

따라 일부는 증산마을로, 일부는 가촌리 신기마을 '장성베기'에 집단이주 하였다. 또 신기(새터)마을은 가촌리에 속해 있다가 1941년에 행정마을로 분리되었다.

보통 마을이름은 대부분 산천의 이름이나 지형, 저설 등에 의하여 작명되나, 가촌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곧 가촌의 옛미을은 가자방(加資坊, 佳資坊) 가촌(嘉村, 佳村)등이었다.

가자(加資)는 조선시대 국왕이 품계(品階)를 올려 주는 것이며, 가촌(嘉村, 佳村)은 아름다운 마을, 착한 마을을 뜻하니, 벼슬에 오른 사람이 많이 나온 문지(文地)로서 더욱 아름답고 착한 마을을 만들어야하겠다는 염원을 담고 있는 말로 여겨진다. (연대별 마을이름의 변천은 상기한 [가촌리의 환경과 내력]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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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촌리, 가촌본리, 가촌마을, 송담사, 자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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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리마을 가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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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촌본리마을

嘉村本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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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가촌리
Gyeongsangnam-do Yangsan-si Mulgeum-eup Gachon-ri
慶尙南道 梁山市 勿禁邑 佳村里
올린이
등록일
최강호
2014.04.24
내용

가촌본리마을

1. 위치와 환경

가촌리 본리(本里)마을은 양산에서 서쪽으로 약 5Km, 물금읍에서는 북동쪽으로 약 2km에 자리잡고 있으며, 양산과 삼랑진을 연결하는 지방도(1022)가 마을을 동서로 통과하고 있다. 마을 북쪽은 오봉산(五峰山:일명 취서산) 정상을 경계로 원동면 화제리와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양산메기들을 가로지르는 양산천(梁山川)을 사이에 두고 동면 금산리와 마주보고 있다.

동쪽은 청룡등 옆 개울을 경계로 범어리 서남마을과 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백호등을 넘어 어봉골 개울을 경계로 가촌 새터(신기)마을과 접하고 있다.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 안은 오봉산에서는 좌(동쪽)는 청룡등, (서쪽)는 백호등(白虎嶝)이 뻗어 내렸다. 마을앞(남쪽(으로 펼쳐진 메기들 가운데로 양산-구포간의 고속도로가 동서로 관통하고 있다.

옛부터 마을 주민들은 풍수설을 따라 좌청룡 우백호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고 보아 청룡등과 백호등을 가꾸는데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곧 백호등이 좀 낮다 하여 청용등의 나무는 낮게 키우고 백호등의 나무는 높게 키워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기에 현 1022번 지방도(일제시대에는 국도였음)가 부설되자 청룡등의 중허리(중곡고개)와 마을 중심부가 잘려 나가 산의 혈()이 끊기게 되었다고 안타가와 하고 있다.

지금의 본리마을과 신기마을 사이의 밭(5만평)은 개인주택 및 연립주낵용 주택지로 개발되어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으며, 마을 뒷산아래 밭들도 택지로 개발될 예정이다. 또 마을의 일부(30)와 들판도 물금신도시의 일부로 들어가게 되어 급속히 옛모습을 잃어 갈 것이다.

 

2. 마을의 내력

이 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가를 밝혀 주는 문헌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사기곡, 오동곡(옷나무골), 샛갓등에서 나오는 기와장, 토기편 등으로 미루어 삼국시대 초기 곧 신라초부터 사람들이 주거하였음을 알수 있다.

이외에 문헌상으로는 분성배씨(盆城裵氏) 족보를 살펴 보면 고려말 (1,400년경)에 분성배씨가 이 지역에 입촌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형태의 마을은 조선중기(1,700년경) 이후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대에 양산천개수공사로 메기들이 조성되면서 특히 외지인들이 많이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한 것으로 보인다. 구전에 의하면 입촌성씨의 순서는 분성배씨, 다음은 문화류씨(文化柳氏), 부여백씨(扶餘白氏), 밀양박씨(密陽朴氏), 동래정씨(東萊鄭氏), 파평윤시(坡平尹氏) 순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 무렵의 인구는 본리마을에는 약 60여호, 야리마을에는 약 15호가 거주하였다. 그러나 1934년 갑술대홍수로 야리(野里) 일대가 완전히 침수되는 바람에 약 10여호 정도만이 남아 1960년대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전기, 전화, 교육, 식수 등 생활의 불편이 계속되었고 또 마을의 이주를 권하는 정부시책에

따라 일부는 증산마을로, 일부는 가촌리 신기마을 '장성베기'에 집단이주 하였다. 또 신기(새터)마을은 가촌리에 속해 있다가 1941년에 행정마을로 분리되었다.

보통 마을이름은 대부분 산천의 이름이나 지형, 저설 등에 의하여 작명되나, 가촌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곧 가촌의 옛미을은 가자방(加資坊, 佳資坊) 가촌(嘉村, 佳村)등이었다.

가자(加資)는 조선시대 국왕이 품계(品階)를 올려 주는 것이며, 가촌(嘉村, 佳村)은 아름다운 마을, 착한 마을을 뜻하니, 벼슬에 오른 사람이 많이 나온 문지(文地)로서 더욱 아름답고 착한 마을을 만들어야하겠다는 염원을 담고 있는 말로 여겨진다. (연대별 마을이름의 변천은 상기한 [가촌리의 환경과 내력]을 참조)

맨 마지막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