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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321

제목

대변마을
大邊

지역

부산광역시 > 기장군 > 기장읍 > 대변리
Busan > Gijang-gun > Gijang-eup > Daebyeon-ri
釜山廣域市 > 機張郡 > 機張邑 > 大邊里

올린이
등록일

최**
201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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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내용

키워드,백과사전 항목보기
사진 설명

대변리

 

대변마을과 무양마을을 합쳐서 법정동리가 되었다. 옛날은 동리명은 없었고 기장현 읍내면 무지포였다가 서기 1895526일 을미개혁으로 기장군 읍내면 용암동과 무양동으로 되었고 서기 191431일 군면 정비때 처음으로 용암동과 무양동을 합쳐서 동래군 기장면 대변리라는 법정동리가 되었다 .대변마을에서 대변리의 마을이름을 풀이하였다.

 

대변마을

옛날에는 이곳에 주사(舟師)가 주둔하고 있어서 기장진이라 하였고 선두포(船頭浦)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전선창(戰船廠) 또는 주사창(舟師廠)이라 하였고 무지포(無知浦)에 속하였다. 점차 마을이 형성되면서 용암동이라 하였다가 그후에 대변리라고 하였다.

용암동은 글뜻대로 풀이하면 용암골이 되는데 용암이라는 이름을 가진 큰 바위도 없고 비슷한 바위도 없다. 떡돌바위, 뽕곳돌바위, 성기듬바위, 새앳돌바위, 수문돌바위라는 이름뿐이다. 용암동은 미리 용(), 바위 암(), 골 동()자로서 미리, 바위, 골이 된다. 옛날 이곳은 수군들의 무영이 있던 곳이다. 그래서 미리, 바위, 골의 미리는 머리()이고, 바위는 바오(武營)이고 골은 그대로 골()이 되어 미리 바위 골은 머리바오골의 와음(訛音)이다. 머리바오골은 두무영(頭武營)의 뜻을 가진 옛말이다.

무양마을은 남바오라고 부르고 있는데 남바오는 말 그대로 남() 바오(武營)로서 남무영(南武營)이다. 남무영을 그냥 무영(武營)이라 불러야 될 것을 무양(武陽)이라 와음된 것이다. 그러니까 용암동은 두무영(頭武營)이니 수무영(首武營) 또는 본무영(本武營)이다.

용암동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 별호로서 대변이라는 이름도 있었던 것 같다. 대변이라는 이름은 일정때 일본인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지은 이름이라는 말이 있었으나 그것은 잘못된 말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용암동이 일정때 대변리로 개명된 것이다.

대변리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중기부터 사용되어 왔던 것 같다. 서기 1886년경 김성련이라는 가난한 선비가 적은 병술일기에 우기이대변포문생원가(又寄以大邊浦文生員家)라는 기술이 발견되었다. 대변포는 대동고변포(大同庫邊浦)라는 긴 지명을 줄여서 동고(同庫) 두자를 빼고 대변포(大邊浦)라는 3자로 작명을 한 것이다. 그것은 대변리에 대동고(大同庫)가 있었기 때문이다.(大同庫 참고) 즉 대동고라는 창고 가에 있는 갯가라는 뜻이다.

옛날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동리는 없고 기장현 읍내면 무지포였고 서기 1895526일 을미개혁으로 기장군 읍내면 용암동이 되어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동리가 되었고 서기 191431일 군면 정비때 동래군 기장면 대변리의 대변마을이 되었다. 흙구덩이(흙구덕)새마실 마을이 있다.

 

키워드

기장읍 대변리, 대변마을, 대변항, 자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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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리 대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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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마을

大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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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
Busan Gijang-gun Gijang-eup Daebyeon-ri
釜山廣域市 機張郡 機張邑 大邊里
올린이
등록일
최강호
2014.04.24
내용

대변리

 

대변마을과 무양마을을 합쳐서 법정동리가 되었다. 옛날은 동리명은 없었고 기장현 읍내면 무지포였다가 서기 1895526일 을미개혁으로 기장군 읍내면 용암동과 무양동으로 되었고 서기 191431일 군면 정비때 처음으로 용암동과 무양동을 합쳐서 동래군 기장면 대변리라는 법정동리가 되었다 .대변마을에서 대변리의 마을이름을 풀이하였다.

 

대변마을

옛날에는 이곳에 주사(舟師)가 주둔하고 있어서 기장진이라 하였고 선두포(船頭浦)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전선창(戰船廠) 또는 주사창(舟師廠)이라 하였고 무지포(無知浦)에 속하였다. 점차 마을이 형성되면서 용암동이라 하였다가 그후에 대변리라고 하였다.

용암동은 글뜻대로 풀이하면 용암골이 되는데 용암이라는 이름을 가진 큰 바위도 없고 비슷한 바위도 없다. 떡돌바위, 뽕곳돌바위, 성기듬바위, 새앳돌바위, 수문돌바위라는 이름뿐이다. 용암동은 미리 용(), 바위 암(), 골 동()자로서 미리, 바위, 골이 된다. 옛날 이곳은 수군들의 무영이 있던 곳이다. 그래서 미리, 바위, 골의 미리는 머리()이고, 바위는 바오(武營)이고 골은 그대로 골()이 되어 미리 바위 골은 머리바오골의 와음(訛音)이다. 머리바오골은 두무영(頭武營)의 뜻을 가진 옛말이다.

무양마을은 남바오라고 부르고 있는데 남바오는 말 그대로 남() 바오(武營)로서 남무영(南武營)이다. 남무영을 그냥 무영(武營)이라 불러야 될 것을 무양(武陽)이라 와음된 것이다. 그러니까 용암동은 두무영(頭武營)이니 수무영(首武營) 또는 본무영(本武營)이다.

용암동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 별호로서 대변이라는 이름도 있었던 것 같다. 대변이라는 이름은 일정때 일본인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지은 이름이라는 말이 있었으나 그것은 잘못된 말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용암동이 일정때 대변리로 개명된 것이다.

대변리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중기부터 사용되어 왔던 것 같다. 서기 1886년경 김성련이라는 가난한 선비가 적은 병술일기에 우기이대변포문생원가(又寄以大邊浦文生員家)라는 기술이 발견되었다. 대변포는 대동고변포(大同庫邊浦)라는 긴 지명을 줄여서 동고(同庫) 두자를 빼고 대변포(大邊浦)라는 3자로 작명을 한 것이다. 그것은 대변리에 대동고(大同庫)가 있었기 때문이다.(大同庫 참고) 즉 대동고라는 창고 가에 있는 갯가라는 뜻이다.

옛날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동리는 없고 기장현 읍내면 무지포였고 서기 1895526일 을미개혁으로 기장군 읍내면 용암동이 되어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동리가 되었고 서기 191431일 군면 정비때 동래군 기장면 대변리의 대변마을이 되었다. 흙구덩이(흙구덕)새마실 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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