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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의 첫문시모다항(下田港)
일본시즈오카(靜岡)현이즈(伊豆)반도 남단에 위치한 시모다(下田)항은 일본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곳이다. 태평양 바다에 접해 있는 시모다는 5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그리 크지 않은 어항이다. 지금도 크고 작은 어선과 유람선들이 항구 앞 바다를 쉴새 없이 들락거린다. 호리병 모양을 한시 모다 앞바다는 태평양에 큰 파도가 일어도내해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형적 이점 때문에 예로부터 선박의 피난항으로 알려져 어선을 비롯한 많은 배들이 붐빈 어촌이었다. 1년에 항구를 드나드는 배가 3천척을 넘는다 해서 “출선입선3천척(出船入船3千隻)”이란 말이 전해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전도 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가에도(江戶)(지금의도쿄)에 막부를 열면서에도가정치중심지가되자막부허가없이에도로들어오는지방영주들의가족이나범죄자, 또는총포와기타위험한무기의반입을막기위해막부는전국주요길목마다오늘날의검문소에해당하는세키쇼(關所)라는감시소를설치했다. 그중에서도오늘날도쿄에서남쪽오사카로이어지는도카이도(東海道)의하코네(箱根)세키쇼와북쪽으로나카센도(中仙道)의후쿠시마세키쇼그리고시모다세키쇼등이가장중요한곳이었다.
시대가 바뀌어 에도 막부가 점차 힘이 빠지면서 18세기 중반부터 구미 열강의 일본 진출의욕이 높아졌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나라마다 서로가 먼저 일본과국교를 맺기에 혈안이 되었다. 1792년 러시아 선박이 처음으로 북해도 시레도코(知床)반도 동쪽의 구나시리(國後)섬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청한 것을 시작으로 1808년엔 영국 선박이나 가사키에 입항, 개국을 촉구했다. 이어 1837년 미국 선박 모리슨호가 지금의 도쿄 남쪽가나가와현미우라반도의 우라가(浦賀)항에, 1844년 네덜란드 군함이 나가사키에, 그리고 1846년에는 미국이 빅터를 단장으로 하는 정식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개항을 요청하는 등구미열강의일본 진출시도가 봇물을 이루었다. 이때까지만해도 에도 막부는 각국의 개항 요구에 응하지 않고 버텼다.
미국의 동인도함대사령관이던페리제독이 당시로서는 최신 예인 4척의 증기군함을 이끌고 우라가항에 상륙한 것이 1853년 7월 3일. 이른바 ‘구로후네’로 알려진 흑선(黑船)함대였다. 페리 제독이 일본의 개방을 요구하는 필모아 대통령의 친서를 막부에 전달했지만 당시 막부의 최고 행정책임자인 아베마사히로(阿部正弘)는 1년 뒤 답을 줄 것을 약속하고 페리를 일단 돌려 보냈다. 약속한 1년이 지나도 반응이 없자 1차 때보다 증강된 7척의 군함을 이끌고 1854년 2월 13일 두 번째 일본을 찾은 페리는 시모다를 거쳐에도 앞까지 깊숙이 들어가 막부를 압박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아베마사히로는 당시의 세계 정세로 보아 더 이상의 쇄국정책이 일본에 이롭지 않다고 판단하고 일단 미국 선박에 대해 일본 항기항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은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이것이 일본이 구미제국과 맺은 최초의 국가간 조약이며 조약을 맺은 장소 이름을 따 “가나가와조약” 이라고도 부른다. 이 조약으로 1차로 시모다와 북해도의 하코다데가 개항됐으며 이어 같은해에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와도 동일한 차원의 조약을 맺었다. 일본이 첫 개항 대상지로시모다를 택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하코다데는 위치가 북해도인데 다주로포경선의기항지로제한했기때문에개항에별신경을쓸필요가없었다. 페리는개항대상지로우라가, 가고시마그리고북해도의마쓰마에등 5-6개소를요구했다. 이에대해막부는우라가는정치심장부인에도와너무가까워외세의간섭을받을위험성이높고가고시마와마쓰마에는에도에서너무멀어관리에문제가있을것으로보고에도로부터거리가멀지도가깝지도않은곳으로대형선박의정박이가능한항구가시모다라고판단, 페리에게추천하였고페리가이를수락함으로써시모다가첫개항지로선정된것이다.
아베마사히로에이어 1858년막구최꼬직인다이로(大老)에오른이이나오스케(井伊直弼)는한발더나아가미국과의교역을주내용으로하는미일수호통상조약에서명했다. 이조약은천황의칙허를필요로하는주요외교문제였으나조정이미온적인반응을보이자이이나오스케가자신의판단으로조약을체결해버렸다. 그리고이어영국, 러시아, 프랑스, 화란과도같은내용의조약을맺었다. 특히미일수호통상조약은일본이관세자주권을포기한데다미국에치외법권을인정하는등일본측에많은문제점이있는조약이었다. 이같은불리한조건을내포하고있는조약을일본이무리하게수용한것은조약체결의거부가바로미국과의무력충돌로이어질가능성이높은당시의불가피한상황을이이나오스케가간파했기때문이라는것이후날의해석이다.
에도막부창설이전부터도쿠가와가(家)를섬겨온후다이다이묘(譜代大名)인히코네(彦根)번의이이나오나카(井伊直中)영주의 14남으로태어나가문의후계자가될가능성이거의없었던나오스케는후계후보자들이사망하거나다른가문에양자로간바람에뜻하지않게다이로의자리를이어받는행운을얻게된인물이다. 과감한정책결정과신속한집행으로일본현대화에결정적초석을놓았으나조정과끊임없는마찰을빚은이이나오스케는 1860년 3월 3일눈오는날아침출근하다에도성사쿠라다문밖에서조정측인존왕양이(尊王攘夷)파가보낸자객들에의해저격살해되고말았다. 암살계획을미리알고있었던그는공격을받았을때도막부의최고책임자로서의위엄을지키기위해아무런저항을하지않았던것으로전해지고있다.
1854년의 미일화친조약으로 일본은 200년 이상 계속 돼온 쇄국정책의 막을 거두고 구미 여러나라에 문을 열었다. 2년 뒤인 1856년 미국은 시모다에 최초의영사관을 열고 타운젠트해리스를 초대 주일영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4년 뒤 다시 미일수호통상조약체결을 계기로 일본은 미국과의 본격적인 교역에 들어갔다. 일본의 대서방 접촉은 이보다 300여 년 앞선 16세기 후반부터 반세기 남짓 짧은 기간동안 이어진 때가 있었다. 규슈의 나가사키와히라토(平戶) 를중심으로화란및포르투갈상인들과규슈의일부영주사이에행해졌던이시기의교역은국가외교차원이아닌국지적인범위의단순한상거래에지나지않았지만일본은이때부터서양의선진국과의문물교류를통해서양문화에익숙해있었다.
페리가 이끌고 간 선단은 대포가 장착된 당시로서는 최신 예의 거대군함으로 일본으로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두 번째 방문 때는 2,450톤급의 군함이포함된 7척의 대형함대에 승선병력도 1200명을 넘어섰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페리의 군함을 ‘구로후네(黑船)’라고 부르는것은 당시의선박은 상선이나 군함할 것 없이 모두 목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바닷물에 나무가 썩거나 해조가 달라 붙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콜타르로 만든 도료로 칠했는데 이 도료가 검은색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미일화친조약체결에 이어 1858년에 맺어진 미일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일본의 대표하는 항구인 요코하마(橫浜)와고베(神戶)가개방되면서시모다는얼마안가외국선박의출입이끊어졌다. 시모다의개항기간은 1854년 3월부터 1859년 12월까지 불과 5년9개월에지나지않은짧은기간이었지만그동안일본의대외창구가되었고 일본이 쇄국시대로부터 세계 열강의 일원으로 진입하는데 중요한역할을담당했다. 시모다항의개방기간이짧았던것은항구에대형선박의접안시설건설이점차 어려워진데다 내륙지역과 거리가 멀어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서 외국선박의 출입은 요코하마, 고베, 그리고 나고야뿐이며 다른항구는 특별허가를 받을 경우에만 가능하게 돼있다.
전 날 밤 묵었던 아타미에서 아침 9시 6분에 출발한 완행열차는 한 시간 40분 걸려 시모다역에 닿았다. 아타미에서 출발하는 이즈급행 열차는 이름만 급행일뿐 사실은 역마다 정차하는 완행이다. 좀 빠른 급행도 있지만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 완상을 위해서는 완행열차가 여유를 느낄 수 있어 더좋 다. 남쪽으로내려가면서거의반도끝까지 오른쪽은 가파른 산이고 왼쪽은 태평양의 파란바다가 저만치아래로넓게펼쳐진다. 시모다는 지금은 관광지로 더 이름이 나 있다. 도쿄에서는 급행열차를 타면 3시간 남짓 걸린다. 이즈반도전체가 온천지로 유명할 뿐 아니라 연중날씨가온화하기때문에연중많은관광객이즐겨찾는곳이다.
이즈반도로들어서는길목에서첫번째로만나게되는아타미(熱海)온천은그역사가약 1,500년전인멀리나라시대이전까지거슬러올라간다. 먼옛날아타미앞바다의 ‘아타미7탕’이라고불린곳에서온천수가분출된것을시작으로이일대에온천이개발되기시작했다. 이곳지명인 ‘熱海’인것도 ‘뜨거운바닷물’이란데서비롯됐다. 아타미에는 ‘아타미7탕’ 으로불리는원천이있다. 그런데아타미온천을개발한사람이고구려도래인인만간쇼닌으로알려져있다. 757년아타미앞바다의물이뜨거워져물고기가죽어가자만간쇼닌이어민들을돕기위해바다에있는원천을육지로이동시켰다는전설이전해오고있다. 만간쇼닌은아타미뒷산에있는이즈산신사와후지산아래아시노코호수에세워진하코네신사의제신으로돼있다. 아타미온천은에도막부시대에특히인기가있어온천수를에도성에헌상했다는기록도있다.
전날 살짝 스친가랑비 때문일까 가던날은 일본에선 만나기 쉽잖은 화창한날씨에시야사방이투명하고맑고깨끗했다. 어느지점에선가는정상에흰눈을이고있는후지산봉우리가거울에비치듯깨끗한모습으로스치기도하고. 이른봄의 양광(陽光)이유리조각을뿌린듯바다위로쏟아지면서맑은수면이영롱하게반짝였다. 오른쪽산비탈감귤밭엔수확을기다리는귤이노랗게물들고매화꽃과벗꽃이화사한자태를뽐내는상쾌한날이었다. 무릎이성치않아나서기를꺼려하는아내를결혼기념일을핑계로설득, 어렵사리나선 2박3일의짧은여정. 이전에도여러번들렀지만그곳완행열차는언제가도풋풋한시골땀냄새를느낄수있어마음을편하게해준다. 겨울에도낮기온이대체로 10도를웃도는따스함이좋고철길따라내려가면서차창옆으로이어지는대나무밭과태평양에잇대어납작히엎드린어촌의고즈넉한모습이마음을한가롭게했다. 주위에서들려오는언어만아니면강원도동해안의바닷가어느마을이었다.
나이가지긋한택시기사는시모다는 500여년전옛모습그대로라고했다. 페리가우람한군함을몰고와으름장을놓았을항구앞바다에는유람선과어선과놀이배들이한가롭게물살을가르고있고페리가끌고왔던흑선을본따만든검은색유람선이관광객을가득싣고항구앞바다작은섬을부지런히오갔다. 옛날길그대로라시내에곧게뻗은도로가거의없고자동차두대가겨우지날정도로비좁고길모퉁이마다거리이름을새겨넣은돌기둥을세워놓았다. 지금은살림집이된빛바랜옛유곽이실개천양옆으로잇대어줄지어있고능수버들실가지가땅바닥에닿았다. 위협의대상이었을페리제독동상이군함닻과함께시가지가넓게보이는전망좋은곳에자리를잡았고그에관한기록과사진, 그리고유품들이개국박물관에소중하게보존되어있다. 첫미국영사관이었던아담한건물교쿠센지(玉泉寺)에는초대영사해리스의기념관을비롯하여다섯개의미국인무덤과세개의러시아인무덤, 그리고한개의위령비가서있다고미국의지미카터대통령이다녀간것을기념해아담한대리석비를세워놓았다.
해리스영사를가까이서시중들었던한일본여인이뒤날음식점을하면서살았다는자그마한기와집이마을번화가좁은길옆에역사의유적으로단장돼있었다. ‘도진오기치’라는영화로유명해진이여인은본래목조선건조공의딸로태어나게이샤가됐다가일본에부임해과로로건강이나빠진해리스영사의병간호를위해선발됐다. 해리스영사의건강이회복된후다시게이샤로돌아갔으나외국인과동거했다는이유로결혼을약속한남자로부터버림받게돼게이샤를그만두고짧은기간미장원을하다가문을닫고다시음식점을열었으나알코올중독으로처지를비관한나머지자살한것으로전해지고있다. ‘안직루’ 라는옥호를내걸고그녀가경영했던자그마한 2층짜리음식점기와집이가게건물들사이에끼어있었다.
일본의개국이일본스스로의선택은아니었지만당시의시대흐름을정확하게판단한기회포착이었고이어서맺은일본측에불리한불평등조약인미일수호통상조약의체결을강행한다이로이이나오스케의정치적결단이일본의현대화과정을크게단축시키는계기가되었다는것이역사의평가이다. 이두조약은훗날세계속에서일본의위상을자리매김하는데중요한계기를제공했다. 조약체결이당시상황에서구미열강의무력침공을피할수있는유일한선택이라는판단과선진문물의유입을촉진시키는발판이될것이라는미래지향적기회를함께잡은역사적사건이되었기때문이다.
시모다항개항과미일수호통상조약의체결이일본의요청으로이루어진것은아니지만결과적으로일본의현대화를크게촉진시켰다. 또한매국노로비난받으면서까지앞을내다보고불평등조약에서명했던당시의국정책임자들은후에혜안을가진정치가로재평가를받고있다. 이두조약은훗날세계속에서일본의위상을자리매김하는데중요한계기를제공했다. 국익보다실익없는명분에지나치게집착하는성향이강하다는말을듣는우리에게일본의개국역사는타산지석이되기에충분하다. 한걸음빨랐던개방으로구미열강의무력침공을차단하였고쏟아져들어온여러분야의유럽선진문물이일본근대화에촉매가됐다. 일본이이같이밖으로힘차게뻗어나갈때가우리나라는외부세계와완전히단절된채정쟁으로날밤을새며부패세도정치에기를쓰던철종왕시대에해당한다.
이곡권태명
시모다 항
미국의 최초 주일본영사관
초대 미국영사 타운샌드 해리스 기념비
미국 페리제독 동상
흑선 모양으로 만든 유람선
페리제독 시모다 상륙기념비
해리스 초대미국영사기념관
개국박물관
시모다역
온천휴양지 아타미 시
아타미의 이즈산신사(고구려 계 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