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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독일랜드마크
역사의 증인 브란덴부르크 문
1791년~1788년에 건설된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윌리엄 2세가
건축가 칼 타드 한스(Carl Gotthard Langhans)에게 명령하여 건설한 것으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정문인
프로 필라(propylaea)를 모텔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웅장하게 설계한 개선문이다.
문 위에는 1793년 독일 조각가 요한 고트프리트 샤도우(Johann Gottfried Schadow)가 조각한
승리의 청동 사두 전차 상이 있다. 19세기 이후 전쟁에 승리한 프로이센군과
독일군이 개선할 때는 반듯이 통과하는 장소가 되였다.
분단의 상징이자 되찾은 자유의 상징!
1791년 18개 도시 성문 중 하나로 건설된 브란덴부르크 문은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후
분단의 상징이 되였다. 이곳은 미국 대통령이 단골로 연설하는 곳으로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이 문을 지났으며, 1987년 레이건 대통령이 이곳에서 고르바초프 씨 장벽을 부스시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89년 장벽이 무너졌고, 1994년 클린턴 대통령이 베를린은 자유라고 했다
신성로마제국내 각 나라들.
1789년 시대, 신성로마제국 영토. 갈색 합스부르크 왕가, 회색 프로이센 왕국 그 외 작은 나라는 너무 작아서 표시되지 않음
1871년 이전에 독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 지형은 항상 요동쳤다 국경은 유동적이고.
과거는 항상 변했다 수백 년간 독일 땅이었던 곳이 지금은 확고한 다른 나라 땅이 되였다 (슈트라스부르크)
간단하게 나마, 독일 사를 알아야 독일을 이해할 수 있다.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느슨한 울타리 아래 자율적인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나라로 나눗워져 천년을 이어왔다
종교개혁과 30년 전쟁 이후에는 2천 개의 나라로 분열되었다 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독일 내 국가들은 이해타산에 따라 연합하고 갈등하며 지역 역사를 써왔다
프로이센이 알자스, 로렌 지역을 포함해 39개 국이 독일 연방을 세웠, 1871년 이후 빌헬름 1세와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을 주도했다 .
베를린에 머물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을 2번 찾았는데, 아침 일찍 호텔을 나와 브란덴부르크 광장에 도착하니
이른 시간임에도 관광객이 광장과 문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 .
떠오르는 태양을 등진 브란덴 부르크 문을 올려다보는 사람들로 떠들썩하다.
역사적 중요한 사건 현장이며 ,자유의 상징인 , 브란덴부르크 문은 독일의 정치사에 중심에 있는
건물이다 또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 마크로 손꼽히는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자유를 의미하는 위대한 상징!
26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세계가 브란덴부르크 문에 부여한 의미는 자유와 통일을 기리는 기념비다
분열되고 갈등하는 세계를 화합의 광장으로 이끈 의미를 생각하면서. 2번씩이나 이곳을 찾았다
물론 호텔에서 나와 국회의사당과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보기 위하여 지나가야 하는 길목이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이곳은 독일 역사의 심장부다
베를린의 수많은 관문 중 하나였던 브란덴 베르크 문은 베를린으로 들어오는 화물 마차는 관세를 내고
이문을 통과했다, 당시 베를린에는 거대한 도서관과 오페라하우스 같은 공공건물이 많았다
베를린이 문화적, 학문적으로 인류 문명의 기원인 아테네 전통을 따르는 위대한 도시를 표방하며
건축한 최초의 건물 중 하나였다
1791년 완성되고 얼마 후에 평화를 상징하는 그리스 여신 에이레네와 그녀를 끄는
4두 마차 조각상을 문 위에 올렸다 평화의 문(Fridenstor)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신고전주의 대표적인 걸작인 브란덴부르크 문은 12개의 도리스 식 기둥이 받치고 있는데
베를린을 향하는 5개의 도로는 건립 당시부터 뻗어있었다. 평민들에게는 5개의 도로 중 양쪽 맨 끝 2개의 도로만
이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가운데 도로는 왕족과 외국 고위사절만 사용할 수 있었는데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유지되였다
2009년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마라톤과 경보 경기의 출발점과 결승점이기도 하다.
2014년 독일 축구 국가 대표 팀이 브라질 월드컵 우승 기념식을 이곳에서 열었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처럼 시 외곽에서 시내 중심부로 길게 이어지는 운터 텐 린덴(Unter den linden[보리수 아래라는 의미]
서쪽 끝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 문은 시간이 흐르면서 평화의 문보다는 개선문이라는 의미가 더 강해졌다
처음 개선문을 통과해 개선 행진한 인물은 프로이센 왕이 아니었다
1805년 오스트리아가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후 10월 14일 독일 프로이센 군대는
예나와 아이우에 르 슈테트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참담하게 패배를 당했고 1806년 10월 27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베를린으로 개선 행진했다
군대를 이끌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해 운터 덴 린덴 거리를 따라 베를린 궁전까지 행군했다
나폴레옹은 브란덴부르크 문 꼭대기의 청동 사두 전차상을 파리로 가져가 전리품으로 전시했다
그 후 8년간 브란덴부르크 문 청동 사두 전차상은 볼 수 없었다
쾨니히스베르크 (지금의 에스토니아 탈린 인근 러시아 국경 부근 )로 피신한 프로이센의 왕은 상황을
재정비하고 마침내 1813년 러시아군과 함계 베를린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파리까지 진격했다
1814년 군중의 환호 속에 돌아온 사두 전차상은 브란덴부르크 문 꼭대기에 세워졌다
브란덴부르크 문과 조각상은 이제 평화가 아니라 프리 에센의 승리를 상징하게 되였고
여신상 역시 평화의 여신이 아니라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로 바뀌었다
오늘날 청동 사두 전차상에는 승리의 여신과 프로이센의 상징인 독수리가 함계 있고 여신이 들고 있는
긴창에는 자랑스러운 참나무 잎으로 둘러싸인 철십자 깃발과 훈장이 달려있다
전차상에는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m Ⅲ, 1770~1840)가 나폴레옹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진정으로 브란덴 베르크 문은 프로이센의 개선문이 되였다
그 후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군과 또는 독일군은 반듯이 지나는 장소가 되였다
전차상은 도시 중심부 동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1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군도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개선식을 열었다 (독일이 한치의 자국 영토를 잃지 않았다는 정신적 승리)
1933년 집권한 나치는 하켄크로이츠(나치 문장)을 문에 덕지 덕치 붙여놓았다
2차 대전 베를린 공방 중에 가장 중요한 사두마차중 1마리를 제외한 3마리 말의 머리가 날아가고
동베를린이 세운 8개의 검문소 중 하나가 이 브란덴부르크 문이다 냉전과 분단의 상징에서
통일의 상징으로 바뀌면서 통일 후 2000년 12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5백만 유로를 들여서 완전히 복원했다
팻타이어 바이크 투어
베를린에는 가이드 투어가 큰 인기를 얻고 있는데 도보, 자전거, 자동차, 보트 투어 등 다양한 투어가 있다
3시간 30분 동안 영어로 진행하는 도보 무료 가이드 투어는 내용도 훌륭하고 가이드가 열정적이고 ,
아는 것도 많다 팁도 받는다 나도 일부 구간에 참가해서 유익한 투어를 했다
브란덴부르크 문 인도를 건너오는 관광객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도로를 이용해야 하는 규정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지되였다
1961년 8월 12일 동독이 쌓기 시작한 장벽은 45.0km 의 장벽을 넘기 위해 136~290명 사이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30년이 지난 1989년 11월 9일에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이 이뤄졌지만 장벽이
있던 자리에는 분단의 아픔과 희생자들의 넔이 배여있다 ...
파리 저 광장 의 관광객.
높이 26m 가로길이 65.5m 자재는 전체가 사암으로 이뤄졌다
1989년 11월 9일 약 10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브란덴 베르크 문,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졌다
오늘날 독일에서 주조하는 50센트 유로화에 브란덴 베르크 문 이 새겨져있다
오늘날 브란덴부르크 문은 인도와 자전거 통행만 허용하고 있다
2002년부터 독일 상원의 결정으로 버스와 택시를 포함한 모든 교통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파리 저 광장( Pariser Platz)
파리 저 광장은 베를린 응접실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브란덴부르크 문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반듯이 거쳐가는 곳이다
이곳 광장에서 브란덴부르크 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사람들을 만나고 가이드 미팅을 하는 만남의 장소다
광장을 따라 죽 내려가면 슈프레강 위 박물관 섬과 알렉산더 광장, TV 타워가 나온다
도로변 상가에는 독일 유명 메이커의 전시관과 카페가 줄지여 있다
광장 주변에는 우아한 중세풍의 저택과 대사관, 고급스러운 부티크 호텔들이 들어서 있다
광장 이름 파리 저는 1814년 프로이센 군대가 파리를 함락하고 나폴레옹을 퇴위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붙였다
1814년 전에는 피어 에크(Viereck)라고 했다
훔 볼트 대학교 (Humboldt University)
독일 베를린에서 가장 오랜역사와 두번째로 많은 학생수를 갖인 대학이다 프로이센왕국의 자유주의적
교육개혁가이자 언어학자였던 빌헬름 폰 훔볼트에 의해 1810년 베를린대학교로 설립되였다
그가 구상한 대학의 모습은 다른 유럽여러 대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26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햇다
브란덴부르크 문 좌우에 위치하는 리버만 하우스(Liebermann-Villa)와 서머 하우스(Sommerhaus)는
대칭적인 쌍둥이 건물로 프로이센의 건축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스튈러의 역사적인 건물을 모델로 지어졌다
문화도시를 지향하는 베를린 건축은 다양한 양식건물들이 존재한다
단체관광객과 개별여행자들도 거의 파리 저 광장과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베를린 관광을 시작한다
유럽 단체관광객이 가이드의 설명에 집중하는 모습. 베를린 관광은 가이드가 꼭 필요하다
파리 저 광장에서 유명인의 추모행사가 열리는지 방송 카메라 리포터가 방송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날 독일에서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는 광장이 있다면 브란텐브르크 문, 파리 저 광장이다
엄격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세워진 브란덴부르크 문은 오래전부터 국가 주요 행사가 열리는 무대가 되였다
브란덴부르크 문 파리 저 광장은 국가 기념비다
베를린 장벽의 상징이며 자유의 상징이기도 한 이곳은 독일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자유와 통일을 기리는 장소다
두 가지 사회 이념이 합쳐지는 화합의 장소로 이곳 만한 곳이 없다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운터 덴 린덴 거리는 (옛 동독 지역) 실로 다양한 볼거리와 역사유적이
가득한 곳으로 박물관 섬, 베를린 대성당, 베를린 대영 박물 괸이라는 페르가몬 박물관, 대사관, 오페라하우스,
유명한 베를린 훔볼트대학교 ,페른제 투름(TV타워)등으로 연결된다. 베를린의 도심과 미테지구도 이곳에 잇다
브란덴 부르크 문 서쪽 광장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국회의사당(Reichstag)
측면 모습 걸어서 2~3분 거리.
전승 기념탑, 승리의 여신상
황금색 60m높이, 전승기념탑은 1864년 프로이센이 덴마크에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프로이센과 덴마크가 슐레스비히 와 홀슈타인 지방의 패권을 놓고 벌인 전쟁에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가 새로운 독일제국 왕관을 받아 황제 빌헬름 1세가 되였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마련된 이 자리에서 프로이센의 왕으로 선언한다 한 테 뭉친 독일 제후들과 도시들의 부름에 답하고
지난 60년간 빼앗겼던 독일제국의 국호를 받아들여 우리 모두 의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할 것을 선언하노라! 취임 일성이었다
나폴레옹 3세를 물리치고 보불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베를린이 아닌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 선포식을 거행했다 200년에 걸친 프랑스 침공에 대한 응수였고 유럽의 절대권력은
프랑스가 아닌 독일이라고 선언하는 자리였다
당시 파리를 행진하는 독일 군대를 본 파리 시민들이 엄청난 트라우마를 느꼈다고 한다
이 승리를 기점으로 독일통일 과정이 시작되었다 .전승기념탑 완공 직후 1866년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하고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전승기념탑의 기단에는 이 세 차례 승리를 기념하는 부조와
조각을 설치하였다 .프로이센의 왕은 비스마르크의 안내를 받아 통일 독일 황제로 산업 군사강국 독일제국의 황제가 된 것이다
1945년 프랑스, 요구를 받아들여 기단에 프랑스의 패배를 묘사한 부조는 철거하였지만 최초 설계 그대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