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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서구문물 수용에 빠르고 적극적 이었다
일본이 실용적인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때는 1543년 부터다. 1543년 8월 25일(음력) 지금의 일본 가고시마현 남쪽 115킬로미터 거리에 떠있는 작은 섬 다네가시마(種子島)해변에 심하게 파손된 한 척의 대형 선박이 표착했다. 섬 남단 앞을 지나가다 태풍을 만나 모래 톱으로 밀린 상선이었다. 파선된 선박은 당시 일본으로서는 처음 보는 대형 범선이었다. 명(明)나라 선적인 이 배에는 백 수십명의 사람이 승선하고 있었다. 대부분 명나라 사람이고 일부 조선인과 류큐인, 그리고 세 명의 서양인이 섞여있었다. 포르투갈 사람으로 밝혀진 이들은 모두 80센티미터 정도 크기의 철주 같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철포 즉 소총이었다. 당시는 일본에 아직 총이 없던 시대였다.
마침 부근을 지나가던 한 어부가 이 배를 보고 즉시 관아에 알렸다. 신고를 받은 촌장이 현장으로 달려가 한 부상자로 부터 표착경위를 듣고 바로 도주(島主)인 영주에게 보고했다. 15세 소년 영주 도키다카(時堯)는 배를 수리하고 승객들에게 6개월간 치료와 숙식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3정의 철포를 넘겨 받았다. 영주는 즉시 대장장이인 야이타 곤베에 기요사다에게 철포의 복제를 명했다. 몇 차례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원본과 동일한 성능의 총을 복제하는데 성공했다. 철포생산의 성공은 당시 한 작은 영주에 불과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열도를 통일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이 철포로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사정없이 유린했다. 당시 영의정인 유성룡은 그의 징비록(懲備錄)에서 “우리나라는 허문말절(虛文末節)만 숭상하고 무비(武備)에는 무관심하다. 오늘날의 재난을 당하고도 그 피해를 입에 올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적의 장점은 화포이고 우리가 패한 것도 화포 때문이다” 라며 개탄했다.
명나라 선박 사건 다음 해인 1544년엔 무려 16척의 포르투갈상선이 담배와 약품, 장식물 등 다양한 상품을 싣고 다시 일본을 찾았고 그 뒤로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은 한 동안 활발하게 이어졌다. 이 사건 훨씬 전 일본에 황금이 많다고 소개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본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은 마카오를 통해 중국과 교역 하면서 일본에 팔 상품의 종류를 조사하고 있던 중이었다. 위의 포르투갈인 세 사람은 바로 상인이었다. 이어 1549년 7월에는 스페인 예수회의 프란시스 하비엘(Francis Xavier) 신부가 처음으로 규슈 일원에 한해 포교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로마가톨릭의 개혁을 주장하며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함께 스페인예수회를 창립한 하비엘 신부는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중 우연한 기회에 일본인 야지로를 만나 그의 권고로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일본의 본격적인 서양문물 수용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태풍에 파선된 상선 한 척이 표착한 후 불과 6년 사이에 일본과 유럽 사이에 문물의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결국 19세기 일본이 근대국가로 도약하는 시기를 앞당기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포르투갈 및 스페인과의 교역이 확대되면서 일본은 16세기에 이미 서양의 항해와 건축 및 군사학 등 학문 분야에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됐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이밖에도 일본에 일부일처제의 가족제도를 소개하고 병원과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자선사업도 활발하게 전개해 일본의 환심을 얻었다. 기독교 선교 허용과 교역을 통해 일본에 소개된 유럽문화는 아름답고 호화스런 표현을 특징으로 하는 모모야마문화(桃山文化) 창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일본역사에서 이 시대의 문화를 남만문화 또는 기독교문화라고 부른다. 일본에는 지금도 포르투갈과 스페인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생활용어가 적잖이 남아있다.
일본전역에 군웅할거로 백 개 가까운 나라로 쪼개져 전쟁이 끊지 않은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마감하고 일본열도의 지배자로 군림한 노부나가는 당시 강력한 저항 세력인 승려들을 견제하기 위해 기독교의 포교활동을 허용하고 포르투갈과의 교역 증진을 위해 이미 기독교를 수용한 규슈의 영주들과 협력하여 유럽과의 교역은 물론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데 힘을 쏟았다. 당시 9명의 규슈지방 영주 가운데 임진왜난 때 우리나라를 침공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5명의 영주는 영세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했다. 일본에 기독교가 전파된 뒤 규슈의 일부 영주들이 가족 중에서 13-14세의 어린이 4명을 선발하여 로마교황청에 사절단으로 파견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들은 8년간 로마에 체류한 뒤 귀국했다.
하비엘신부는 일본땅을 처음 밟은 가고시마(鹿兒島)에서 포교를 시작했으나 이듬해인 1550년 히젠국(肥前國, 현 가사키현) 서북 단에 위치한 히라토(平戶)섬으로 옮겨 규슈지방의 거점으로 삼았다. 하비엘 신부는 포교 외에도 일본과 포르투갈간의 무역중진을 위해서도 적잖은 힘을 쏟았다. 히젠번은 이 때부터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1587년 규슈정벌을 마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처음엔 기독교의 포교를 허용했으나 포르투갈이 선교사를 앞세워 일본에 기독교를 확산시킨 후 침략해 올 것으로 판단하고 1587년 기독교금지령을 내려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강경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유럽과의 교역은 일단 중단 됐으며 교역대상지역이 중국과 타이 그리고 베트남 등 동남아지역으로 바뀌었다. 이때 일본은 나라가 발급한 허가장을 받은 상인에 한해 무역을 허용했다. 이 선박이 주인선(朱印船)이며 이 교역은 17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이어 17세기 들어서는 일본과 네덜란드 간에도 교역이 이루어졌다. 포르투갈 과는 주로 무역위주 였으나 네덜란드와는 교역 외에 처음으로 의학 천문학 및 수학 등 서양선진학문에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이 네덜란드와 가진 최초의 접촉은 1600년 부터다. 철포가 일본에 전래 57년 뒤 이며 도쿠가와의 에도(江戶)막부 개설보다 3년 앞선 해이다. 1600년 4월 규슈 동북지방 붕고(豊後, 현 오이타현) 앞 바다에 돛대가 부러져 난파직전인 범선 한 척이 표착했다. 리프데(De Liefde) 라는 이름을 단 네덜란드국적선인 이 배는 에도막부 개설을 앞두고 오사카성에 머물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오사카 남쪽 앞 바다로 예인되었다. 이 난파선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본격적으로 서양학문을섭취하게 된다.
도쿠가와를 면담한 이 배의 선장인 영국인 윌리엄 아담스(William Adams)는 일본과의 무역을 제의했다. 이미 남만무역을 활발하게 진행하며 교역범위의 확대를 생각하고 있던 도쿠가와가 아담스의 제의를 받아드림으로써 일본과 네덜란드간의 교역이 시작됐다. 기독교가 금지돼있던 당시 아담스는 포교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역합의가 쉽게 이루어졌다. 9년 후인 1609년 에도막부는 나가사키현 북서부 히라토섬에 네덜란드의 상관을, 그리고 이어 1613에는 영국에 대해서도 상관개설을 허가해주었다. 초라한 작은 어촌 히라토에 외국선박의 입출이 잦아지자 마을에 활기가 돌았다. 그러나 네덜란드에 비해 교역이 부진했던 영국이 1623년 상관을 폐쇄해 버려 히라토에는 네덜란드상관만 남게 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선교사들이 추방된 뒤 외국인에 의한 포교는 금지되었지만 일본인기독교인이 계속 증가해 70여 만명 선에 육박하자 불안감을 느낀 에도막부는 고문과 추방 등으로 기독교를 강도높게 탄압하는 한편 외국선박도 선별 적으로 출입을 허용했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가톨릭국이 아닌 네덜란드와의 교역은 계속되어 히라토의 네덜란드상관은 창고건물을 증축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상관건물에 유럽에서 사용하는 서기(西紀)연도판을 부착했다는 사소한 이유를 들어 막부가 상관을 폐쇄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몇 년 뒤 다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교역의 필요성을 느낀 에도막부는 1636년 나가사키시에 작은 섬을 만들었다. 이 인공 섬이 데지마(出島)이다. 데지마 건설을 계기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의 교역은 다시 활기를 띠게되었다. 데지마에는 포르투갈이 1636년에, 그리고 네덜란드가 1641에 입주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내의 상권은 네덜란드가 잡고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입주 3년 만인 1639년에 철수했으며 네덜란드만 1859년까지 200년 넘게 일본시장을 독점했다. 쇄국정책의 강화로 기독교포교와 서양서적수입금지조치는 해제되지 않았지만 학자들의 양학 연구는 꾸준하게 계속되었다.
데지마상관의 네덜란드상인들은 새로 부임한 상관장이 인사를 위해 에도막부를 방문하는 일 외에 외부 나들이는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부채모양의 1만3천 제곱m(3,969평)크기인 데지마에는 9-13명의 네덜란드상인들이 상주했다. 그들은 매년 6-7월 한 차례 입항하는 화물을 창고에 보관했다가 쇼혼쇼닌(所本商人) 이라는 막부지정 상인들에게 판매했다. 네덜란드와의 무역에서 일본은 생사, 견직물, 모직물, 설탕, 유리제품과 서적 등을 수입하고 은, 동, 도자기, 칠기제품을 수출했다. 특히 도자기의 경우 조선도공 이삼평과 박평의가 개설한 아리타야키(有田燒)의 제품들이 주로 수출되었는데 짙푸른 색의 그림을 넣은 네덜란드의 델프트 도자기가 아리타야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쇄국정책이 길어지자 막부 내에서 조차 부분 적으로 나마 개방의 필요성이 제기 되어 1717년 8대 쇼군(將軍)으로 취임한 요시무네(吉宗)는 학문분야부터 다시 서양과의 교류 재개를 허용했다. 요시무네는 학문장려가 백성의 교양함양은 물론 사물에 관한 사고방식을 깊게 하고 나아가 정치수준의 제고와 생활수준 향상에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학문장려에 진력했다. 요시무네는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장을 에도성으로 불러 서양문화에 관한 여러가지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1720년 양서 연구와 서적수입금지조치를 완전히 해제했다. 이 해를 기점으로 일본의 네덜란드를 통한 학문연구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 때 유입된 양학이 난학(蘭學)이다. 에도막부 중기에 네덜란드를 통해 유입된 학술과 문화, 기술을 등 통틀어 난학 이라고 했으나 에도 말기로 들어서면서 유럽 여러나라로 부터 각 분야의 학문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에 명칭이 양학(洋學)으로 바뀌었다.
난학연구는 17세기 초엽 부터 네덜란드 상인들과 접촉이 있던 에도와 나가사키(長崎)를 비롯한 규슈지방 여러 번(藩)과 센다이(仙台) 등 일부 지방 번에서 산발적으로 시작되어 점차 교토와 오사카 등 전국 주요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초기의 대상 분야는 서양의 실상 소개로 시작되었으며 뒤이어 천문학, 역학(曆學)과 산수 등 분야로 다양해졌다. 최초의 난학소개는 주로 데지마의 네덜란드상관 주재 상인과 접촉이 잦았던 일부 일본 관원들에 의해 시작됐다. 이들이 네덜란드어를 배워 통역관이 되면서 부터 길이 열렸다. 일본 관원들의 네덜란드어 습득은 맨손으로 굳은 땅을 파는 작업과 비교될 정도로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 했다. 이들은 네덜란드인들과 그림을 그려 단어의 뜻을 파악하는 등 손짓발짓으로 표현하며 온 몸으로 하나하나 익혔다. 시간이 지나 네덜란드어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17세기 중엽 부터 상관에 배속된 네덜란드 의사와 서양학문에 관심을 가진 일본인들 간에 만남이 잦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18세기부터 분야별로 학자들이 직접 네덜란드서적을 번역하거나 저술 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기독교선교사의 입국이 금지되고 있던 1708년 이탈리아신부인 지오바니 시도티가 일본무사(사무라이)로 변장하여 규슈 남쪽 야쿠시마(屋久島)섬에 잠입했으나 바로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 시도티를 심문한 주자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시도티를 신문하며 얻은 지식으로 서양문화를 소개하는 서양기문(西洋紀聞)을 저술했다. 시도티 신부는 얼마 뒤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에도막부는 실학장려를 목적으로 서양문헌의 금서정책을 완전히 풀고 네덜란드어의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 학문분야별로 연구원을 선발하여 어학습득에 집중토록 했다.
이후 난학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서양학문연구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난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나가사키 출신 니시가와 죠겐(西川如見)이 펴낸 유럽 여러나라의 사정을 통상의 관점에서 기술한 화이통상고(華夷通商考)는 난학 연구서의 효시로 꼽히고 있다. 이어 쇼군의 주치의 였던 노로 겐죠(野呂元丈)가 네덜란드어입문서와 어류, 곤충관련 서적을, 아오키 곤요가 네덜란드어회화책을, 시바 고우간(司馬江漢)이 세계지리를 그리고 처음으로 일본에 지동설을 소개한 모도키 료에이(本木良永)가 천문학서적을 펴 냈으며 네덜란드어를 일본어로 번역한 일본최초의 난화(蘭和)사전도 이 시기에 나왔다.
당시 출간된 서적 가운데 스기다 겐바쿠(杉田玄白)가 번역한 해부관련 의학서적인 해체신서(解體新書)와 난학사시(蘭學事始)가 대표적인 서적으로 꼽힌다. 1774년에 발간된 해체신서는 인체의 정확한 해부학적 구조를 밝힌 서적으로 당시 일본으로서는 우주의 비밀처럼 경이로운 내용 이었기 때문에 ‘소우주’라고도 불렀다. 해체신서는 의학분야뿐만 아니라 문학면에서도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난학연구가 붐을 이룸에 따라 에도, 오사카, 나가사키, 사쿠라 등 4곳에 난학전문 교육기관인 난학숙(蘭學塾)이 개설됐으며 커리큘럼도 초기의 의학, 천문학에서 점차 물리학, 화학, 박물학 및 서양건축학과 군사학 등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어 뒤 날 일본의 근대화 진입에 크게 기여했다.
18세기초부터 19세기까지 100여 년간 난학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양학연구는 수학, 천문학, 지리, 측량 등 범위와 깊이를 더해가며 꽃을 피웠다. 일본의 서양에 대한 열정은 학문연구에 그치지 않고 당시 개발된 각종 전문서적을 비롯하여 망원경과 시계, 무기, 그림 등 물품 수입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천문학자를 동원해 18세기 초에 현대식 천문대를 설치했으며 나아가 태양과 달, 혹성, 항성 등 의 위치와 일출과 일몰, 그리고 일식과 월식 등 천체의 여러 현상을 기재한 천체력(天體曆)을 발간하고 온도계, 자석, 측량기기, 지구의 등 각종 기기도 발명했다. 이밖에 인체구조를 기록한 장지(臟志), 신화해설서인 고사통(古史通), 지구의 모양의 세계지도 작성, 그리고 치료에 현미경이 최초로 사용되고 전신마취에 의한 유방암수술에도 성공했다. 또한 서양 포술을 전수받아 대포를 만들었으며 우주생성이론에 관한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일본의 양학연구에는 한 외국인의 도움이 컸다. 1823년 28세의 독일 청년 시볼트(Philipp von Siebolt)는 네덜란드 의사로 신분을 위장하여 일본입국을 허가받아 데지마의 네덜란드상관 소속원이 되었다. 그는 거주지가 데지마로 제한된 네덜란드 상인들과 달리 거주지 제한을 받지 않았다. 시볼트는 나가사키시 남쪽 나루다키(鳴滝)마을에서 의료행위를 하며 사학(私學)인 나루다키숙(鳴滝塾)을 열어 일본인들에게 서양의학과 박물학 등을 가르치는 한편 일본을 서양에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나루다키숙을 모델로 에도와 오사카, 사쿠라 등 세 곳에도 학원이 개설됐다. 5년 동안의 임기 동안 시볼트는 5년간 일본에 체류하며 61명의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이들이 저마다 담당분야에서 일본 현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시볼트는 귀국 후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소개한 ‘일본(日本)’과 ‘일본식물지(日本植物誌)’그리고 ‘일본동물지(日本動物誌)’등 3권의 문헌을 남겨 일본을 유럽에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나가사키시 남쪽, 그리 높지 않은 산 발치에 자리한 시볼트 기념관은 1989년에 새로 지어진 것이다. 3층의 붉은 벽돌 건물은 옛 주택과 나루다키숙 자리 바로 위에 있다. 건물 앞에 그의 동상이 서있고 건물 안에는 그의 이력소개와 그가 일본에서 행한 업적 등 200여 점의 각종 자료와 그의 가문 문장(紋章) 등이 전시돼있다.시볼트기념관은 일본중요문화재로지정돼있다. 일본인은 시볼트를 일본의학의 아버지로 존경하고 있다.
난학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의 학문과 기술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양학연구에 열중하고 있을 19세기 중엽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유럽 등 세계 열강과 본격적인 국가개방의 기회를 만나게 되어 선진국대열에 진입하는 획기적 계기를 잡게 된다. 미국의 동인도함대사령관 페리(Perry)제독이 최 신예 증기군함 4척을 이끌고 에도(도쿄)남쪽 미우라(三浦)반도의 작은 항구 우라가(浦賀)에 상륙한 것이 1853년 7월 3일. 이른바 ‘구로후네(黑船)’로 알려진 흑선 함대였다. 페리제독은 일본의 개방을 요구하는 필모아대통령의 친서를 에도막부에 전달하고 바로 답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막부의 로쥬(老中, 최고행정책임자)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는 1년 뒤 답을 줄 것을 약속하고 페리를 일단 돌려보냈다. 1년이 지나도 반응이 없자 1차 때 보다 증강된 7척의 군함을 이끌고 1854년 2월 13일 두 번째 일본을 찾은 페리는 에도 앞 바다 까지 깊숙이 들어가 무력시위를 벌이며 막부를 압박했다.
힘에 밀린 막부는 더 이상의 쇄국정책이 일본에 이롭지 않다고 판단하고 일단 미국선박에 대해 급유와 재난 때에 한해 일본 기항을 허용키로 결정하고 내용을 담은 조약을 체결했다. 이 것이 일본이 구미 제국과 국가간에 처음으로 맺은 미일화친조약(가나가와조약)’ 이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현 시즈오카현의 시모다(下田)와 북해도의 하코다데(函館) 두 항구를 개방하고 이어 같은 해에 영국, 네덜란드, 러시와 도 동등한 내용의 조약을 맺었다.
아베 마사히로에 이어 1858년 다이로에 오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한 발 더 나아가 미국과의 교역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천황의 허락을 필요로 하는 주요 외교문제 였으나 조정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임에 따라 이이 나오스케가 자신의 판단으로 조약에 서명해 버렸다. 그리고 이어 영국, 러시아, 프랑스, 화란 과도 같은 내용의 조약서명도 뒤따랐다. 특히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일본이 관세 자주권을 포기한 데다 미국에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등 일본측에 많은 문제점이 있는 불평등조약이었다. 이이 나오스케는 조약이 일본측에 불리한 조건 이었지만 조약의 거부가 미국과의 무력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당시의 상황을 간파했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처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854년의 미일화친조약으로 일본은 200년 이상 계속돼 온 쇄국정책의 막을 거두고 구미 여러 나라에 문을 열었다. 2년 뒤인 1856년 미국은 시모다에 최초의 영사관을 열었다. 그리고 4년 뒤 다시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일본은 대표적 항구인 요코하마(橫浜)와 고베(神戶)항을 개방하고 미국과의 본격적인 교역에 들어갔다. 당시 나라개방 결정은 300여 년 전인 16세기 후반부터 네덜란드 등 서양 선진국과 국가차원의 외교는 아니었지만 교역을 통해 꾸준히 관계를 이어오며 서양문화에 익숙해 있었던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쇄국시대에 선진 유럽으로 향한 교역과 문화교류의 유일한 창구로서 세계를 배우고 일본을 외부세계로 알렸던 데지마는 일본근대화를 촉진시킨 국제교류의 거점이었다. 명치유신 직전 일본이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네덜란드와 화친조약을 맺은 것도 데지마 시대의 역할에 대한 보답이었다. 철포와 기독교와 난학은 당시 일본에 유럽의 물질문명과 정신 문명이 동시에 유입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시모다 항 개항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이 일본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의 현대화를 크게 촉진시켰다. 또한 매국노로 비난 받으면서 까지 앞을 내다보고 불평등조약에 서명했던 당시의 국정책임자들은 후에 혜안을 가진 정치가로 재평가를 받고 있다. 이 두 조약은 훗날 세계 속에서 일본의 위상을 자리 매김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국익보다 실익 없는 명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말을 듣는 우리에게 일본의 개국역사는 타산지석이 되기에 충분하다. 한 걸음 빨랐던 개방으로 구미열강의 무력침공을 피했고 쏟아져 들어온 여러 분야의 유럽 선진문물이 일본근대화에 촉매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이 이같이 밖으로 힘차게 뻗어나간 19세기 중반 우리나라는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정쟁으로 날밤을 새며 부패세도정치에 기를 쓰던 철종 왕 시대에 해당한다.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초 까지 우리나라는 조선 13대 명종과 14대 선조시대에 해당한다. 당시 조선은 서양에 대해서는 존재여부도 잘 몰랐으며 지리나 수학 등 실용학문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 서원이 처음으로 개원됐으나 중국의 고전 만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우리나라 서원1호인 경북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이 때 세워졌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역사는 너무나 차이가 난다. 명종 초인 1545년에는 이른바 한 집안으로 당시 권력을 휘 두른 외척 윤씨 일가가 대윤과 소윤으로 갈라져 권력투쟁을 벌여 소윤이 승리한 후 대윤일파를 숙청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는 등 권력싸움이 그치질 않았다. 이어 1592년에는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폐허가 되도록 큰 피해를 입었고, 1636년 다시 청나라의 침공을 받아 왕이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국난을 겪으면서도 조정은 권력싸움에 매몰돼 1800년 부터는 망국의 길로 이어지는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까지도 외부세계의 동향은 아랑곳 없이 조선의 당쟁과 쇄국정책은 계속 이어졌다. 일본이 유럽과 미국 등 서구 선진국과 통상 및 학문 분야에 걸쳐 활발한 교류를 전개하고 있던 이즈음 조선은 쇄국정책을 한층 강화했으며 이 때문에 통상을 요구하는 나라들과 마찰이 잦았다. 1866년(고종3년) 1월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조선에 머물고 있던 9명의 프랑스신부와 수천명의 조선인 신도들을 학살했다. 병인양요(丙寅洋擾)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한 보복 조치를 취하기 위해 이해 3월 중국에 머물고 있던 프랑스함대가 조선원정에 나서 9월부터 11월 까지 한강과 강화도 일대에서 조선군과 포격전을 벌이다 일단 철수했으나 조선은 외규장각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1866년 8월 21일에는 미국은 통상 교섭을 위해 무장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조선에 파견,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강경 대응으로 돌아서 조선과 전투가 벌였으나 배가 침몰되고 선원들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 배에 항해사 겸 통역인으로 타고 있던 27세의 영국인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도 선원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조선 땅을 밟은 서양 개신교 선교사의 첫 순교로 기록돼 있다. 미국은 1871년 6월 1일 셔먼호 사건의 책임추궁과 통상교섭을 목적으로 1871년 6월 1일 650여 명의 병력을 실은 5척의 전함을 조선으로 보내 강화도 인근으로 들어왔다. 6월10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강화도 초지진(草芝鎭)을 점령하는 등 초반에는 미국측이 유리했으나 조선조정의 완강한 거부로 통상교섭에 실패하자 결국 철수하고 말았다. 미국과 싸운 이 전쟁이 신미양요(辛未洋擾)다.
신미양요 후 4년 째인 1875년 9월 20일(고종12년) 이번에는 일본군함 운양호가 측량을 한다며 강화도로 밀고 들어와 초지진 으로 접근하다 조선수비대와 전투가 벌어졌다.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이다. 이 전투에서 화력이 우세한 일본군의 공격에 초지진이 파괴되고 나아가 육지에 상륙한 일본군은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며 행패를 부렸으나 힘에 밀린 조선은 결국 1876년 2월27일 조선측에 불리한 조약을 맺고 싸움을 끝냈다.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이다. 다른 이름으로 강화도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 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문과 11관(款)으로 된 이 조약은 조선국은 자주지방(自主之邦)으로 일본국과 동일한 권리를 보유한다, 일본인에게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조선과 일본 민간인 간의 교역에 정부가 간섭할 수 없게 규정한다는 등 조선측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불평등조약이다. 조일수호조약은 일본이 과거 서양제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 대한 그 간의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함으로써 언제든지 조선을 침략할 수 있는 길을 내주고 말았다. 근대화의 적기를 만난 시점에서 대안 없는 쇄국정책과 끊임 없는 당파싸움, 그리고 궁중 안의 치열한 자중지란이 불러 온 국가적 재앙이었다.
1653년 파도에 밀려 제주도에 표착한 후 바로 연행돼 13년 동안 잡혀있다 일본으로 탈출한 헨드릭 하멜의 경우와 1865년 첫 선교지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순교 당한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에 대한 조선조정의 조처에 비해 세 사람의 포르투갈상인과 스페인 선교사 프란시스 하비엘 신부를 따뜻하게 환영하고 이들을 적극 활용한 일본의 선택은 그 후의 결과가 극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철포와 기독교와 난학의 일본전래는 그 시작이 참으로 별 것 아닌 사건이었으나 하찮은 우연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살린 그들의 치밀한 대응이 역사발전에 큰 전환의 계기가 된 좋은 예이다. 일본도 상당기간 쇄국정책을 실시했지만 쇄국기간에도 계속된 양학연구가 지식수준을 높였고 난학을 통해 터득한 합리적 사고와 자유와 평등사상은 에도막부 말기 일본이 근대국가로 진입하는데 좋은 영양제가 되었다.
일본이 이처럼 밖으로 힘차게 뻗어나갈 무렵 조선은 오로지 당쟁에 매몰되어었고 쇄국정책도 20세기 들어와서 까지 이어졌으며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 탈취되고서야 자동 폐기되었다. 조선왕조 518년(1392년-1910년)동안은 일관된 쇄국정책으로 대외 교류 면에서 암흑시대로 기록되고 있다.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후반에 걸쳐 한동안 실사구시의 실학연구 기운이 일기도 했으나 이 실학도 유럽과의 직접 교류가 아닌 중국을 통해 전해진 것이었다. 조선은 18세기부터 19세기 후반에 걸쳐 오히려 척양척외(斥洋斥倭)의 쇄국정책을 한층 강화했다. 19세기 중엽 10여 년 동안 미국, 프랑스 및 일본 등의 나라로 부터 교역과 기독교 포교를 요구하며 접근한 선박이 이어졌지만 모두 무위로 끝나 근대화의 시기는 점점 멀어져갔다.
17세기 초엽 일본 최초의 대 유럽 무역항으로 개방되고 기독교가 들어와 일본에서 가장 먼저 유럽인들과 섞여 살았던 나가사키현 북서쪽 끝에 위치한 작은 섬 히라토(平戶). 남북 32킬로미터, 동서 10킬로미터, 면적 163제곱킬로미터에 인구 34,000명. 이중 거의 대부분인 약 31,000명이 히라토시에 몰려있다. 지나간 역사 덕분에 지금은 관광이 주 산업이 되어있다. 섬 전체가 산이다 싶을 정도로 농지를 거의 볼 수가 없다. 후쿠오카(福岡)시내에서 탄 급행버스는 80여 킬로미터 거리인 사가현(佐賀県) 이마리(伊万里)까지 두시간 남짓 걸렸고 이마리에서 갈아 탄 완행버스는 40여 킬로미터인 히라토섬 입구의 다비라 히라토구치역(たびら平戶口驛)까지 다시 한 시간 넘게 달려야 했다. 역에서 다시 택시로 5분 남짓 걸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빼닮은 히라토대교(平戶大橋)를 건너자 바로 히라토시였다. 시에서 꼬부랑 골목길을 5분 정도 진행하자 주변 건물에 비해 몇 배나 큰 흰색의 네덜란드상관이 나타났다. 앞 바다와 맞닿아 있다.
히라토에는 일찍이 1550년부터 1599년에 걸쳐 포르투갈을 비롯하여 스페인과 영국상선들이 간헐적으로 기항하며 유럽과의 교역이 이루어지다 1609년에 이르러 네덜란드와, 그리고 1613년엔 영국인들이 들어와 상관설립허가를 받아 자리를 잡았다. 이후 네덜란드는 1611년 주택과 물건을 보관할 창고를 지었으며 1639년에는 당시 일본인에게는 처음인 거대한 유럽풍의 석조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가독교교리가 봉건제와 충돌 됨을 두려워한 도쿠가와막부가 쇄국정책으로 급선회 함에 따라 1641년 히라토의 네덜란드상관을 폐쇄하고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이전시켰다. 히라토에 남아있는 지금의 네덜란드상관 건물은 지난 2000년 일본과 네덜란드 간의 통상 400주년을 기념해서 새로 지은 것이다. 히라토는 이에 앞서 7세기초부터 9세기에 걸쳐 일본의 견수사(遣隋使)와 견당사(遣唐使) 그리고 견신라사(遣新羅使)의 기항기지로 사용되는 등 먼 옛날부터 외국에 대한 중요교통거점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네덜란드상관 1층에는 1600년 처음으로 일본에 표착한 리프테 호의 모형과 배 머리부분에 장식했던 목상과 역대 상관장들의 초상화와 그들의 활동상황 그리고 유럽 풍의 갑주 등 수 많은 역사적 자료 및 유물이 전시돼있다. 히라토에는 하비에르 신부를 기념하는 아름다운 성프란시스코 하비에르기념교회’가 높은 언덕에 우뚝 서있다. 히라토는 면적과 인구 대비로 일본에서 성당이 가장 많은 곳이다. 하비엘기념성당을 비롯해 일본국가중요문화재에 올라있는 가톨릭다비라천주당 등 모두 4개의 성당이 이 좁은 섬에 몰려있다. 가장 역사 깊은 호키(寶龜)성당은 1898년에 창립되었다.
17세기 초부터 중반에 걸쳐 히라토에서 이루어졌던 일본의 대유럽통상과 문화유입은 17세기 중반 부터 나가사키시 데지마로 장소를 옮겨 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 나가사키시 중심 가에 있는 데지마는 외국인의 일본 입국을 통제하기 위해 1634년 에도막부가 바다를 매립해서 만든 부채 모양의 인공 섬이다. 전날 가끔 비가 와 신경이 쓰였는데 다음 날 날씨가 쾌청으로 바뀌었다. 데지마까지는 호텔에서 천천히 걸어 10분쯤 거리여서 개관시간인 8시에 맞추어 호텔을 나섰다. 8시가 되자 작은 삿갓을 쓴 옛날 상인복장을 한 직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입장객은 나 뿐이었다. 수년 전에도 한번 들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달라진 곳만 돌아보았다. 데지마는 본래 1636년부터 포르투갈상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포르투갈이 3년 뒤인 1639년 철수해 버려 1641년 부터는 네덜란드 상관이 입주하여 1859년 까지 교역을 계속했다. 네덜란드와의 무역은 모두 이 작은 섬에서 이루어졌다.
중앙도로 양 옆으로 상관장 집무실과 창고, 상담실 등 옛 네덜란드상관의 건물이 줄 지어 서있다. 육지에서 데지마 사이로 흐르는 나카지마강(中島川) 위에 있었던 다리는 1887년 없어진지 130년 만인 지난 2017년 11월24일에 복원되었다. 길이 38.5미터 폭4.4미터인 철제 다리는 중간 부분이 위로 조금 부풀어 오른 아치 모양으로 돼있다. 이 작은 인공 섬이 지난 200여 년 동안 섬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유폐나 다름 없이 살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서양세계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선생이었다. 강력한 쇄국정책의 실시로 암흑의 긴 터널에 갇혔던 시대에 히라토와 데지마는 유럽을 향해 열린 유일한 작은 창이었다. 이 작은 창문을 통해 유입된 서구문화가 일본의 근대화를 앞 당긴 소중한 촉매 제가 되었다.
1641년에 개설되어 1859년까지 218년 간 일본의 대 유럽창구역할을 맡았던 데지마는 1904년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가 1922년 다시 국가사적으로 지정됐으며 본래의 건물 25동이 2010년에 모두 완공되었다.
이곡 권 태 명
나가사키현 지도
네덜란드 상관(히라토시)
히라토시
히라토 시 거리
프란시스 하비엘신부 기념성당
성당 내부
일본에 최초로 입항한 네덜란드 선박 모형
네덜란드 상관(데지마)
데지마 거리
데지마 모형도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과장 집무건물
육지와 데지마를 연결하는 다리
다리 입구
육지에서 본 데지마
18세기 일본인이 그린 세계지도
시볼트기념관(나가사키 시)
나가사키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