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남도를 가다

강진 영랑생가

전라남도 > 강진군

by 고천 2019-04-16 조회 244 1

으뜸 국내여행의 하나는 남도여행이다. 자주 가는 길이지만 이 봄날 남도를 다시 갔고, 영랑생가를 들렸다.
영랑생가 뒤에 모란꽃 화원이 생겨, 모란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의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는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남녀노소 상관없이 김소월의 진달래와 함께 마음에 잠겨져 있는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1934년 <문학> 4월호에 실려 발표된 시인의 시는 그 당시의 언어로 되어 있어 요즘의 언어로 단장한 싯구에 비하여 더 정감있다.

1935년 시문학사에서 펴낸 <영랑시집>에는 제목없이 45번 이란 숫자로 실렸다.

 

매년 틈만 나면 떠나는 남도 여행길, 올해는 국립공원을 탐방하고 아울러 주변을 둘러보는 여행을 하기로 했고, 그 첫 여행지를 영암 월출산으로 정했다. 영암과 강진은 지척인지라 월출산을 등반하면서 자연스럽게 들리게 되는 도갑사와 함께 근방에 있는 호남 3대 별서정원 중의 하나인 백운동정원과 강진 무위사, 죽녹원 그리고 소쇄원 등을 방문하는 경로로 진행하였다.

또한, 강진하면 떠오르는 영랑생가를 빼놓을 수 없었고 당연 코스로 발길을 옮겼다.

 

영랑생가는 강진읍에 위치하고 있다. 남도가 이 시기 아무리 성수기라 해도 남도의 읍내는 여유롭다 못해 한가하다. 꽃피는 계절 광양의 매화마을이나 구례산수유 마을의 축제기간 동안이나 잠깐 그 지역만 붐빌까. 여유로운 마음으로 놓치지 말고 꼭 가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지랖 넓게 하는 말이다.

 

영랑생가를 방문하면서 5월 즈음이 아니면 늘상 아쉬운 것 하나가, 정작 모란꽃을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 아쉬움을 달래주려고 강진군은 영랑생가 뒷편에 사계절모란원을 조성하여 세계의 여러 모란 종을 모아 꽃을 피우도록 도왔다.

식물원을 들어서면 반갑게 맞아주는 모란꽃들이 영랑과 영랑의 시들에 대한 그리움과 정감을 갑절로 해준다.

 

영랑생가 앞에 세워져 있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비의 주변에는 모란이 심겨져 있지만 아직은 철이 이른지라 열심히 잎새만 키우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비 옆에 붉은 기운의 식물들이 모란이다. 모란은 5월에 피는 꽃이니, 아직은 이런 모습이 정상인 것이다.

 

시는 모란이 피기까지의 ‘기다림’과 모란이 떨어져버린 뒤의 ‘절망감’이라는 이중적인 마음을 표현하고 있으나, 절망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찬란함’과 ‘슬픔’을 결합시키고 있다. 이 시가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 중의 하나는 1930년대라는 일제치하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담고 있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사의 희망과 절망의 하모니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마치 김소월이 진달래 시에서 '헤어짐'과 '원망'을 말하지만 내면으로는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을 노래하듯이...

 

김영랑이 1903년에 태어나 1948년 9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기 전까지 45년간 살았던 집이다. 영랑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생가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지붕을 시멘트기와로 보수하였고, 기단부와 벽체는 시멘트로 발라 원형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1985년 강진군청이 그 집을 다시 사들여 복원작업을 하였고 원래 초가집의 원형으로 다시 지었다. 본채와 사랑채

2동만이 남아 있고 주변에는 모란밭이 조성되어 있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인 초가지붕이다. 본채에서 10여 m 떨어진 왼쪽에 사랑채가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가지붕이다.  집 뒤편에는 장독대가 놓여져 있고 언덕에는 오래된 동백나무와 대나무 숲이있어 운치를 더한다.

 

5월이면 생가의 마당에 조성된 모란이 만개한다.

1986년 2월 17일 전라남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0월 12일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지정되었다.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강진군에서 관리한다.

[발췌 : 두피디아 백과사전]

 


 

사실 조금은 인위적이고 너무 깔끔해서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 못한 느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갈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그렇다고 시인과 시인이 주는 정서에 생채기도 주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자주 찾고 싶다.

 

생가 앞에는 사진에서 보듯이 무려(?) 4가지나 되는 비아닌 비가 세워져 있다. 가운데 있는 안내판 두개는 하나로 모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너무도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리된 생가.

 

본채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곳이 영랑을 그린 초상화와 장롱과 족자가 있는 작은 방이다.

부리부리하게 생긴 눈을 보면서 눈이 커서 그렇게 세상을 크고 이쁘게 볼 수 있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고, 저렇게 매섭게 생긴 사람이 마음 속에 어덯게 그런 감성이 숨어 있을까 하는 선입감이 먼저 고개를 쳐든다. 나만 그런걸까 ^^*

 

영랑을 시인으로만 이해한다면 많이 아쉬운 면이 있다. 그는 시인이고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강한 저항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행동과 마음으로 실천한 실천주의자였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해방 이후에는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등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사람이었다.

 


본명은 윤식()이다. 전라남도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고,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결혼하였으나 1년 반 만에 사별하였다.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으며, 이 때부터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에 입학하여 중학부와 영문과를 거치는 동안 크리스티나 로세티, 존 키츠 등의 시를 탐독하여 서정의 세계를 넓혔다. 그러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면서 귀국하여 고향에 머물며 은거하였다. 1930년 박용철(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참가하여 동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서정시를 계속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金)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저항 자세를 보여주었고, 8·15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시의 세계와는 달리 행동파적 일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6·25전쟁 때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은신하다가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발췌 : 두피디아 백과사전]

 

현재 남아 있는 2동의 집은 그 당시 시인이 살던 집의 전부가 아니라 했다.

 

사랑채로 들어가는 입구쪽에는 오래된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모란은 5월쯤에 피고, 배롱나무 꽃은 7~8월 성하의 계절에 핀다.

왜 이곳에 모란과 배롱나무가 심겨져 있는지 이해가 간다. 모란의 희망과 절망을 딛고 나면 무더운 성하의 계절에 배롱나무는 이 어려운 기간을 잘 이겨내자는 의미의 붉은 꽃을 피우는 것이다.

 

배롱나무는 꽃이 오랫동안 피어 있어 백일홍나무라고 하고,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고 하여 간즈름나무 또는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사랑채 정경이다.  뒷편에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바람이 불면 댓잎이 서로 몸을 비비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본채에서 바로 사랑채로 갈 수도 있지만, 밖에서 들어오는 문이 있다. 비록 기와집은 아니지만, 강진 읍내의 한 부농의 집에 들어서는 문의

느낌이 강하게 든다.

 

생가 뒷편에 있는 모란공원으로 가는 길은 양쪽으로 대숲이 조성되어 있고, 역시 대나무로 만든 사립문이 있다.

얼마전에 문을 연 모란 식물원과 이 문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다. 어느 나이 들어보이는 분이 팔짱을 낀채 깊은 사색에 잠긴 몸짓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사색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중년의 나이를 넘긴 사람이라면...

 

가능하면 먼저 영랑생가를 보고, 천천히 여유롭게 이 계단을 올라 식물원으로 가기를 권한다.

 

가을 철... 온 세상이 옷을 갈아 입을 때... 첫 단풍을 보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매 단풍들것내" 라고 ....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결실의 계절 추석을 기다리면서, 한편으로는 바람이 불까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시인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지만, 그는 아마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는 아름다운 날을 기다리고 즐거운 명절을 기다렸고, 그러면서 그 희망이 바람때문에 사그라들까봐 걱정했던 것이라고 이해한다.

 

해가 지고 있다. 어쩌면 새벽과 함께 가장 세상이 아름다운 빛으로 둘러쌓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란꽃이 보고 싶고 궁금한 사람들을 위하여 모란원이 준비되었다. 모란꽃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란이 중심에 있다.

 

이게 모란이구나!!!

다른 곳에서도 자주 봤겠지만 여기서 보니 더 반갑다. 그리고 더 아름답고 정겹게 느껴진다.

 

아주 넓은 식물원은 아니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어 영랑생가에서 영랑과 그의 시를 만나고 감성이 풍부해진 상태에서 여기를 들린다면 아주 풍성한 마음으로 잠시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다. 

 

 

그러고 보면 강진은 참 볼게 많고, 갈 곳도 많고 대체로 모든 것이 풍성한 편이다. 인심도 좋고...

강진을 남도여행 1번지라고 한 이유가 있다.

 

해도 저물어가고 그렇잖아도 한가로운 길이 아무도 없는 길로 변했다. 하지만, 빛은 여전히 아름답게 길을 채우고 있다.

 

영랑생가 바로 앞에는 시문학파기념관이 있다.

시문학파기념관은 1930년대 순수시 운동을 전개했던 '시문학파' 라는 문학동인회를 기념하는 곳으로, 영랑 김윤식, 용아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변영로, 신석정, 허보, 이하윤 등으로 당대를 대표했던 시인들이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기념관은 시문학파 시인들의 시를 그림이나 사진과 함께 엮은 시화들도 전시되어 있고, 시인들의 시가 실린 여러 문예지 등의 장서들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또한, 전시실, 세미나실, 도서관 및 학예연구실 등이 있고, 2층에는 시인의 전당, 북카페도 있어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한껏 각박한 세상에서의 때를 벗어던지고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곳이다.

 

그가 그리는 하날은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 이었다.

햇발같고, 샘물같고, 붓그럼같고, 물결같은 그런 하늘...

 

밖으로 나와 돌담길을 걸으면서 그가 바라보던 하날(하늘)을 올려다 본다.

사람들이 먹고 놓고 간 빈 통들이 담벼락에 자리한 담쟁이 마른 가지들 사이에 매달려 있다.

 

언제나 그가 그리던 하날이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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