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황량하고 고요해서 쓸쓸했다. 그들을 지켜준다는 푸른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초원을 걷다가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존재의 가치를 논하기에 앞서 여기서 나는 참으로 무기력하다.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도무지 꿈도 꿀 수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그들은 세상 밖으로의 질주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1206년 칭기즈칸이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대집회를 열어 "몽골국(Mongol Ulus)" 탄생을 선포했을 때, 몽골인의 인구는 약 5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초원의 유목민들이 인접국들의 도발을 응징하고자 일어섰다가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버렸다. 세계사를 바꾸는 대장정은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알게되면서 시작되었다. 미지의 집단이라는 신비성과 파괴력, 잔인함으로 무장을 하고는 유라시아 대륙과 해상까지 장악하는 세계제국을 건설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푸른 늑대의 후예라는 칭기즈칸이 있었다.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칸의 땅이라고 푸른 하늘이 명했다. 그들은 그 말을 믿었다.
울란바토르 중심가에 위치한 몽골 혁명영웅 수흐바타르 동상
울란바토르 역사박물관에 재현해 놓은 무당의 모습이 섬뜩했다.
몽골의 샤머니즘은 하늘, 산, 물, 땅, 길 등의 신앙이며 대표적인 것으로 "텐그레(tengre:하늘)"가 있다. 우리민족이 술자리에서 하는 "고수레"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오른손 약지에 술을 찍어 하늘로 튕기며 텐그레를 외친다.
" 먼저 하늘에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울란바토르 국립극장에서 열린 몰골 전통 민요 흐미(khoomei)와 마두금 연주
흐미 혹은 후미라 불리는 몽골의 전통 민요는 목소리 창법으로, 산과 강, 바람, 동물 등의 소리를 모방하여 굵은 저음과 청명한 고음을 동시 내는 독특한 창법이다. 중국의 내몽골에서는 장조(長調)라는 이름으로 각기 계승 발전되고 있다.
몽골에 있는 '어워'라는 돌무더기는 우리나라의 서낭당과 유사하지만 종교적 색채보다는 초원의 이정표정도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서낭당의 괴기스러움이 없다고나 할까. 그들은 어워에 돌을 얹고 어워 주위를 세 바퀴 돌며 소원을 비는 것이 전통이라고 했다. 깃발은 텡그리를 연상케 하는 파란 색이 주를 이룬다.
티베트의 간덴 사원을 모델로 했다는 간덴 사원(Gandan tegchinlen Monastery)과 소원 비는 나무
소원 비는 나무에 뚫린 작은 구멍에다가 입을 대고 소원을 말한다.
소곤거리는 것으로 보아 지구의 평화 따위를 비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그런 걸로 소원을 낭비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어떤 작은 마을에서 열린 몽골의 전통씨름 부흐. 우리씨름과 같은 화려함은 없었지만 사내들의 땀 냄새 나는 몸싸움은 볼만했다.
티베트의 오리지널 마니통.
경전이 들어 있는 통으로 한 번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는 것 같은 효험이 있다.
몽골의 마니통에는 보시다시피 귀가 달려있다. 한참을 웃었다. 옴마니반메흠!
달라이 라마와 몽골
사진출처: 달라이 라마 페이스북
1206년 칭기즈칸이 티베트의 항복을 받아낸 이후로 몽골과 티베트 불교는 거의 한 배를 탔다고 해도 무방하다. 티베트에 왕권은 사라지고 몽골의 세력과 결탁한 각 종파의 수장들이, 의탁한 몽골 권력의 부침에 따라 돌아가며 티베트를 지배하곤 했다. 1578년 티베트 고원 북부에 위치한 청해(靑海) 부근에서 몽골의 수장 알탄 칸과 티베트 겔룩파(Gelugpa)라는 개혁교단 즉 황모파(黃帽派) 교단의 수장인 소남 갸쵸가 만났다. 겔룩파의 교세는 빠른 속도로 신장되었지만 확실한 헤게모니를 쥐지 못한 상태였기에 알탄 칸과 같은 강력한 세속군주의 지원을 필요로 했다. 정치적으로 야망이 있던 정치 승려인 그는 몽골의 위세를 등에 업게 되었다. 그 당시 정치상황으로 볼 때 큰 흠이랄 수는 없다. 그리고 알탄 칸 역시 군주권을 강화하고 분열적인 부족장들을 규합하기 위한 이념을 필요로 했다. 알탄 칸은 소남 갸초에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달라이 라마" 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몽골어로 ‘바다’를 의미하는 ‘달라이’는 실상은 갸쵸를 번역한 말이다. 라마는 스승이라는 티베트어다.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받은 그는 까르마파의 "연속적 환생"이라는 제도를 도입하여, 스스로 3대 달라이 라마(앞대는 그의 스승)가 되고, 후대에 이르러서 실질적인 티베트의 국왕이며 법왕이 되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1585년에 당시 수도였던 카라코룸에 건립한 에르데니 조(Erdeni Dzo) 불교 사원은 티베트의 소남 갸초와 만난 이후에 몽골에 불교를 장려하기 위해 알탄 칸이 만든 사원이다.
이사 가는 날
게르의 내부. 굵은 기둥은 연통.
그 동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네 놈은 네가 싼 똥이랑 계속 뒹굴며 살아라! " 자기가 싼 똥이 뒹굴고 있는 곳에서의 삶을 영위하는 정착민들의 삶을 멸시하는 몽골의 유목민들은 성城을 쌓기보다 길을 닦아 나갔다. 그런 유목 사회가 세상을 전율에 떨게 하고 또 오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붙박이 삶을 살아온 내가 이해하기 힘든 그들만의 생존 방식이 있을 것이다.
13세기 칭기즈칸은 유목민을 통합한 후에 예케 자사크(Yeke Jasag)라는 성문법전을 발효했다.
주요 항목만 기술해보면,
제1조. 간통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제2조. 수간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제3조. 거짓말을 한 자,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몰래 훔쳐본 자, 마술을 부리는 자, 남의 싸움에 개입하여 한쪽 편을 드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제4조. 물과 재에 오줌을 누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좀 가혹하다 싶은 이 법령이 유목 사회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유목사회의 생명이랄 수 있는 내부 결속을 해치는 자와 가축, 물, 불을 가벼이 여기는 자들을 본보기로 삼는 무거운 형벌로 유목사회를 지탱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