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서원탐방

정읍 무성서원

전라북도 > 정읍시

by 고천 2019-10-07 조회 246 1

지난 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 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9곳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9군데 서원 중 일부는 내가 이미 방문을 한 경험이 있는 곳이지만 몇군데는 가본 경험이 없었던 지라 이번을 계기로 시간을 두고 차례로 방문하기로 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서원 9곳은 아래와 같다.

 

 

나의 두번째 세계문화유산 서원 여행지는 전라북도 정읍 칠보면에 있는 무성서원으로 정했다. 정읍은 내장산의 단풍과 구절초 공원이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고 가을 여행지로 각광을 받은 곳이기도 하지만, 역사문화적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장소와 사건을 많이 간직한 곳이다. 정읍은 삼국시대에 형성된 무척 오래된 촌락이다.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가요인 <정읍사>의 탄생 지역이고, 신라시대에는 태산현이 설치되었고, 근래에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최초의 강호가도(江湖歌道) 가사인 정극인의 <상춘곡>이 지어진 곳이다. (강호가도는 정극인의 상춘곡에서 시작해서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무성서원은 통신신라 시대의 학자인 최치원이 이곳 태산현의 현령으로 재직 시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가 합천군수로 이직한 이후에 월연대에 생사당(生祠堂, 생존해 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태산사라 부른것이 시초였다. 이후에 신잠.정극인.송세림.정언충.김약묵.김관을 추가 배향했다. 고려시대에는 태산서원으로 불리워 오다가 조선 숙종 22년(서기 1696년) 사액되면서 '무성(武城)'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존손했던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발췌 : 인터넷]

 

 

"최치원(崔致遠). 신라의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아버지는 견일(肩逸)로 숭복사(崇福寺) 창건을 도왔다. 최승우(崔承祐), 최언위(崔彦?)와 함께 문장의 대가인 '신라삼최'로 꼽힌다. 중국에서 과거에 오르고 글솜씨를 널리 알렸으나 크게 쓰이지 못했고, 신라에 돌아와서도 골품제의 영향으로 뜻을 펼치지 못하면서 저술 활동에 전념하며 만년을 맞았다.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중시조이며, 금돼지의 자손이라는 설화가 전한다." [사진발췌: Wikipedia]

 

원래 무성서원에 모시고 있었던 최치원의 영정은 1784년 쌍계사에서 모셔온 것인데, 1968년 문화재위원 두명이 고려시대 그림이니 국가보물로 지정한다고 가져간 이후 행방이 묘연해 졌단다. 그 이후 원래의 영정을 모사한 것 중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던 것을 영구임대 형식으로 빌려와 모시고 있다.

 


 

무성서원을 들어서면서 본 생경한 모습에서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무성서원은 다른 서원들과 달리 마을안에 위치해 있다. 다시 말해 '마을 속 서원'이다. 무성서원은 모든 백성들에게 열린 배움터였고, 마을 사람들이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서원 앞에 세워진 홍살문 아래에 비계를 세워 놓고 그 위에서 두 사람이 홍살문의 창(槍)살 교체작업을 하고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을 보러 온 사람의 입장에서 볼때 그들의 작업 행태가 많이 아쉬웠다. 우선 아무런 안전장구를 착용하지 않은 채 일하고 있었고, 빼낸 창살을 아래로 툭툭 던졌다. 마치 바로 버릴 쓰레기 처리 하는 듯했다. 전에도 서원의 모든 것들이 소중했지만 이제는 창살 하나, 기왓장 하나 하나가 다 소중한 세계문화유산의 일원 인 것이다.

 

무성서원의 배치도를 보면 강당을 중심으로 한 동서 양재의 서원양식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서재는 없어진 상황이다.

 

서원 내부는 정문인 현가루를 통과하여 들어 갈 수 있지만, 오른쪽에 있는 비각과 갑오창의기적비 왼편의 작은 문을 통하여 들어 갈 수도 있다. 참고로, 서원 내외부에는 모두 15기의 비석들이 있고, 대체로 역대 현감들과 무성서원을 지켜낸 인물들에 대한 공적기가 대부분이라 한다.

 

1905년 일제와의 굴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 해인 1906년 면암 최익현과 그의 문하생이었던 둔현 임병창의 주도로 무성서원에서 호남 최초의 의병이 일어났다. 병오창의기적비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92년 세워졌다.

 

비각과 기적비 뒤에는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東齋) 강수재(講修齋)가 있다. 원래는 서원내 중심에 있는 강당을 사이에 두고 동서양재가 있었으나, 서재인 흥학재는 없어지고 현재는 동재만 남아 있다. 뒤쪽으로 문이 있어 바람도 통과하고 뒷편의 여유롭게 펼쳐져 있는 편안해 보이는 초록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성서원의 주문인 있는 '현가루'이다.

 

현가루는 <논어>의 양화편(論語,  陽貨篇)에 나오는 "공자께서 무성에 가셔서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어셨다(子之武城, 聞絃歌之聲)"와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絃歌不轍)"에서 따온 말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이 생겨도 학문을 계속한다"는 뜻이라 한다.

 

조금 이른 시간에 들려서일까. 홍살문을 수리하던 분들과 모 방송국에서 나온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상태였다. 방송국 사람들도 급하지 않은지 내가 나올 무렵 쯤에야 드론을 날리기 시작했다. 현가루를 지나면 바로 강당이 보인다. 강당 중앙 마루를 통하여 보이는 태극무늬가 있는 문이 태산사 내삼문이다.

 

현가루 마루.. 현가루는 출입이 금지 되어 있어 들어가지 않았고, 계단에 올라 바라보았다. 고풍스러운 모습과 많은 개보수가 없어 보이는 원형을 잘 간직한 모습에서 순천에 있는 선암사가 떠올랐다.

 

동재쪽에서 들어오는 문이 있다.

 

무성서원 강당을 가까이에서 담아보았다.

 

강당의 뒷편에서 바라본 현가루 쪽 입구. 상당히 대칭성이 강하고, 앞쪽에 보이는 산들과 어울린 풍경이 논산 돈암서원의 산앙루의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지을때 주변의 풍경을 꼼꼼하게 고려했고 특히, 멀리 있는 산의 형세도 고려하였다"는 말에 여기에서 또 한번 동의했다.

 

최치원 등 배향된 분들이 모셔진 사당인 태산사이다. 내삼문의 좌우문이 열려져 있었고, 중문은 닫혀 있었다. 여느 사당에서도 자주 보이는 태극무늬가 선명했다.

 

문에서 들여다 본 안쪽 모습

 

사당 문이 닫혀져 있어 안은 볼 수가 없었다.

 

내삼문을 사당쪽에서 바라본 뒷모습이다. 태산사의 외형적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배향자의 면면이랄지 단정하게 차려진 사당과 내삼문 등을 보면 절대 작은 서원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아침 햇살이 문을 통하여 들어오고 문틈 사이로 초록빛이 보였다. 마음이 맑아지는 기운들이 사당의 출입문을 통하여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문창살에 자그마한 벌집이 세워져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터를 잡고 살고 있었을까. 동그란 작은 출입문이 앙증맞다. 주인은 어디 갔는지 낌새도 없고 아침 햇살은 그 작은 집에도 햇볕을 주고 있었다.

 

사당의 옆문. 차분하고 조용했다.

 

사당을 나와 서원을 나오면서 당장 떠나기가 아쉬워 동재 뒷편으로 가 보았다. 일반적으로 보이는 고택의 뒷모습에서 친근감이 들었다.

 

강당 오른쪽으로 향하는 문을 들어서면 비각이 2개 서 있다.

 

내가 처음 서원에 들어 섰을때부터 있었던 모방송국 직원들이 드론을 시험삼아 날리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촬영은 시작하지 않았고 이리 저리 드론을 조정하고 있었다.

 

현가루 아래에서 낮은 각도로 바라본 강당과 뒷편의 태산사의 모습. 햇빛을 받아 색감들의 채도가 더 높아 보여서인지 화려하게 보였다.

 

서원을 둘러보고 나오니 홍살문을 수리하던 사람들은 다 사라졌고, 살들이 질서정연하게 꽂혀 있는 홍살문 위로 푸른 하늘이 편안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새 한마리가 주변을 맴돌았다.

 

 

무성서원 부근에는 동진강이 흐르고 있다. 강 근처에는 물테마유원지가 있고, 잘 만들어진 수위조절용 제방과 어도가 있다. 수량이 많아서인지 제방과 어도를 흐르는 물이 장관이었다. 한참을 들여다 보고 마음에 담아 왔다.

 


 

예전에 보았던 돈암서원이나 소수서원. 병산서원에서의 건축적인 느낌은 상당히 형식적이고 틀에 짜여져 있고 비슷비슷 하다는 생각이 강했다. 사실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말을 들으면서 서원에서 보아야 할 것은 건축 양식이 아니고 그 안에 배향된 분들의 인품이나 역사적인 의미가 더 강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 몇군데를 집중해서 보면서 그 생각이 많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 무성서원은 좀 다른 생각이 들어왔다. 무성서원의 전체적인 느낌은 덜 형식적이고 오히려 종가집 고택의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마을 속 서원이라 그런것 아닌가 싶고, 오래된 모습이 유독 강한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정읍사(井邑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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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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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는 대 졈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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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긔야 어강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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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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