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역사공원 안효공 심온 묘역
靑松 沈氏 安孝公派 派祖 靑川府院君 沈溫 墓域
묘역과 사당 전경
수원시 이의동 광교역사 공원에 위치한 공의 묘역은 750㎡ 규모로 광교 신도시와 영동, 용서 고속도로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한남정맥 응봉에서 내려오는 용맥은 입수도두 세 개가 뭉친 대혈로, 청룡 백호가 감싸주고 물이 환호하는 혈이 넘치는 황룡 농주형 존귀함을 뜻하는 명당이다.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면서 맥이 끊겼다. 산맥이 끊기면 땅의 기운은 더 이상 전달되지 않는다. 원래 이 지역은 청송 심씨 공신전이었다. 지역이 개발되면서 각종 도로와 개발 부지로 편입되면서 묘지와, 신도비와 비각, 외삼문, 내삼문 홍살문, 재실 사당(원효사) 만 남았다. 1979.09.10 경기도 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었다.( 유적 건조물, 무덤. 봉토 묘), 비석문은 조맹부체의 대가 외손자 안평대군 께서 썼다. 사료적 가치와 세종 국구 묘로써 상징이 있다. 당대 최고지관 이양달( 지관으로 서운관 ,판사로 1품벼슬을 받았다) 이 터를 잡았다.
홍살문 ,영의정 급이상 신령한 장소에 세운다 아무리 지체가 높다하더라도 말에서 내려 가시요 ! 양쪽 문주는 말을 타고 통과할수 없다.
安孝公은 1375년 고려, 개성에서 출생했다. 11세에 국자감 진사시(고려시대 국자감에서 진사를 뽑는 시험)과 1386년 문과( 문관을 등용하기 위해 실시한 과거)에 급제한 후, 관직에 진출하셨는데, 부친과 함계 조선 창업에 참여하시었다. 사간원과 사헌부 직무를 맡아보았다. 공의 부친은 청성 백 심덕부로 좌우위 녹사에 참군 되고 공민왕 13년, 갑진에 나아가 수원부사가 되고 위주 원년에 예의판서로 강계도 만호가 되셨다. 장수 덕목이 뛰어나 얼마 후 밀직부사 의주 부원수가 되셨다. 정사년에 서해도 부원수가 되여 왜적이 우리 남해를 자주 침범하므로, 병선 40척을 거느리고. 토벌하여 다시는 침범치 못하게 하였다 병인년에 문하찬성사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후 청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무진년에 태조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 서 창의, 회군하였고 공양왕 원년 기사년에 문화 좌시 중, 경기좌우도, 평양도 도통사 가 되셨다. 임신년에 판 문화부 시로 옮겼고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위화도 회군한 공을 추록하여 정사 일등공신으로 청성 백에 봉해졌다. 태조 원년 기묘년에 다시 좌정승이 되였다. 얼마 후 관직에서 물러나시고, 74세로 부음이 들리니, 태조왕이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중사를 보내여 치제하고 부의로 쌀, 콩 각 1백 석을 내려 주시고 시호를 정안이라 내렸다. 아들은 일곱으로 의홍 삼군부 도총제를 지낸 심인봉, 심의 귀, 심도 생, 경창 부윤과 인수 부윤을 지낸 심징, 심온, 심종은 태상왕 둘째 딸 경선 공주에게 장가들었고,의홍 삼군부 동지총제를 지낸 심정. 어머니 민씨는 번 한국 대부인에 봉해졌다. 안효공 께서는 다섯째 아드님으로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남달리 영특하셨다.
신주를 모신 사당 정문 (외삼문)
재실(齋室)은 홍살문 뒤쪽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데, 제관(祭官)이 머물며 제사를 준비하고 종손들이 종사를 논의하고, 자손들이 제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다.
공께서는 조선조 태조 1년 (1392년)에 병조와 공조 의랑, 정종 때에는 대호 군, 태종 7년(1407년) 승정원 동부대언에 올랐다. 이후, 좌부대언,의 홍삼 군부 동지 총제 등을 지내셨으며, 태종 11년 (1411년 영락 9년) 풍해도( 서해도를 풍해 도로 바꿨다 오늘날 황해도) 관찰사를 하시고.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7월 11일 경오년 기록을 보면 가뭄과 흉년으로 풍저창과 광흥창에 수납하는 소맥 세곡 절반을 군현에 보관하여 백성에게 종자로 빌려주고 풍해도 백성들이 작년 8월부터 10월까지 평양 축성공사에 동원되여 씨앗을 파종하지 못하므로, 축성 중이던 해주읍성을 내년 가을까지 늦추어줄 것을 장계를 올려 윤허를 받아 백성 근심을 덜었다
측면에서 바라본 재실과 사당
태종 11년 7월 29일 풍해도 관찰사 (최고의 지방장관으로, 관내 기관을 규찰하는 기능과 국왕 특명으로 도내를 순찰하면서 1년에 두 차례 수령을 비돗한 관리의 근무 평가를 보고한다) 인 공께서 우정승 조영무가 천거한 풍해도 수군 첨절제사 박영우를 파직시켰다. 박영우는 경박하여 군령이 엄격하지 못하고 병기 훈련에 게으르며, 백성에게 폐와 원성을 사는 침노를 일삼는 자로 파직하였다. 이로 볼 때 공은 공사가 분명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공무에 임하였다.
내삼문
공께서 우부대인직(승정원 정삼품)에 있을 때 장녀 심 씨(沈氏)가 1408년 태조의 3남 충녕대군과 혼인하여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는데, .충령 대군보다 2세 연상으로 14세였다. 숙모인 태종의 여동생인 경선 공주가 충녕군 배필로 추천했다고 한다. 예조판서 정인지가 영릉 지문을 지어 바친 글을 읽어보면 시부모를 극진히 섬겨, 두터운 사랑을 받았고 내전에 정위하게 되면 검소하고 엄숙한 옹화한 아름다움을 보였다. 왕후가 나아가고 물러갈 때, 전하께서 반듯이 일어서시니 그 공경하고 예로 대하심이 한결같았다. 왕후가 인자하고 어질고 성스럽고, 착한 것이 천성에서 나왔는데, 중궁에 정 위한 뒤에는 더욱 겸손하고 조심하여 빈잉을 예로 접대하고. 아래로 궁인에 이르기까지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은혜를 베푸니, 후궁이 빕기를 청하면 반듯이 위로하고 용납을 들어주며, 상감께서 총애하는 자는 특별히 융성하게 대하고, 지극한 정에 빈틈이 없으며, 낳으신 여러 아들을 모두 후궁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시니 후궁 또한 지성껏 받들고 순종하여 자기 소생보다 더한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감히 게을리함이 없었다. 빈과 후궁이 공경하기를 부모 대하듯 하였고, 서출 자식도 모두 소생 아들과 같이 하였으며, 모두 세세히 보살폈다. 국모로 계신 지 29년 동안, 절대로 바깥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궁중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작은 일도 임의로 처리한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친척을 위하여 사사로운 청을 구하지 않았다. 하늘이 성인을 내매 반듯이 어진 배필을 지어서 풍아에 팡여되여 천고에 빛났다. 왕후께서 이와 같은 덕과 행실이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지은 배합이다. 춘추 52세에 별궁에서 승하하시니 세종께서 30일간 소선을 마치고 책과 시호를 내리시어 소헌 황후(昭憲王后)라 하고 직접 합장릉을 명하고 영릉에 궁은 같이하고 실은 달리하여 동쪽실에 편안히 모셨으니 이것이 예이다. 정인지가 지은 초안을 읽고 세종께서 지문은 후세에 전하는 것이니 왕비가 사사로움이 없고 아랫사람에게 미치는 은혜가 무궁하니, 그대로 싣게 하라 하였다.
내 명부를 가장 잘 다스린 조선 최고의 국모로 안으로는 지아비에게 사랑을 받았고 아래로는 만백성이 우러러 받들었다.
향과 축문을 보관하고, .헌관과 집사 등이 재게 하는 집사 청 문중회의가 열리기도 한다.
한양을 외부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공사를 전담하는 경성 수 보도감을 설치하였는데, 공을 참지의 정부 사로 삼았다 도성 축성공사는 경기에서 1만 2천 명, 충청도에서 2만 2천 명, 경상도에서 2만 7천 명, 전라도에서 2만 4천 명, 강원도에서 5천 명, 풍해도에서 1만 명 등 총 10만 명을 조발하여 시행하는 사업이었으나 백성이 피곤하고 겨울철이라 공사를 잠시 늦추고 이른 봄에 시작하기로 하였다.
제사집기와 음식을 장만하는 곳
태종 13년 10월 22일에 공을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셨다. 사헌부(감사원 기능)는 정치를 논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관리들 잘못을 조사하며, 책임을 탄핵하는 관청으로, 대사헌은 종이품 사헌부 으뜸 관직이다. 공께서는 임금에게 아뢰기를 의정부는 백관, 국정을 총괄하면서 육조를 지휘하며 국정을 운영하는데, 사무를 독점하면서 행정이 느리고 비효율적이라, 정책이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사오니 업무를 분장하여 중요한 결정만 의정부에서 관 활하고 나머지는 육조에 이관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즉, 국가 기본 대사인 백관, 국정을 총괄하고를 협의하고 결정하는 기획 업무에 중점을 두고 집행은 하위부서인 육조로 이관할 것을 건의하신 것이다. 의정부에서 세세한 잡무까지 결재하느라 능률이 나지 않습니다. 정책을 논하는 의결기관이 비효율적입니다 청하던데 의정부에는 삼공을 두고 육조로 하여금 업무를 집행하게 건의하였다. 즉 업무 효율을 위하여 집행부에 업무 이관을 건의하신 것이었다.
내삼문
태종 14년 1월에 우군 총 제가 되셨고, 12월에 형조판서로 임명되셨다. 태종은 노비 송사에 대한 형조판서, 건의를 승인하였는데, 상소 내용은 이렇다. 하늘이 백성을 낼적에 본래부터 양민과 노비 구분이 없었습니다, 상속받은 노비를 사사로운 재물로 여기며, 아비와 할아비의 노비라 칭하고, 다투며 송사함이 끝이 없으니, 골육상쟁으로 풍속을 해치니. 가슴 아픈 일이라 하겠습니다 공평히 생각하건대 성상께서 만세의 폐단을 훤하게 뚫어보고 대의로서 결단을 내려 무릇 여러 해를 두고 소송하던 일들을 전부 둘로 나누어, 갖게 함으로써, 쟁송의 실마리를 끊어버리셔야 합니다. 행정이 낭비되지 않아, 국가를 반석에 올려놓으실 결정이 될 것입니다. 법을 고치지 않으면 쟁송에 패한 자가 새로 증거를 만들고, 허위 증언과 말을 꾸며서 신문고를 쳐서 새로 소송을 하면 육조로 이첩하여 진위를 밝히게 되는데, 육조에서 진위가 밝혀 판정하면 노비를 얻은 자는 정당한 판결이고 잃은 자는 오결이라 할 것입니다 당사자로 하여금 수궁하게 판결하려면 수년이 걸릴 것입니다. 더욱 잘못된 판결이라도 반듯이 흑백을 밝히는 것이 아닐지언정 모두가 애매모호해서 진퇴양난이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대의로 판단하여 새로 고친 소송 중에서 양민과 관청을 상대로 한 소송을 제외하고, 원인을 밝히지 말고 모조리 반분하여 영원히 소송의 실마리를 끊어 버림으로써 여러 해 묵은 폐단을 혁파하소서 ..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재산상 이해관계가 극명하여 양반과 지배층의 반발을 샀다.
묘소, 올라가는 계단은 묘역 양쪽에 만들었다.
태종 15년 5월에 호조판서에 제수되고, 동년 12월에 좌군 도총제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태종 16년에 11월에 판한 성부사(한성부의 으뜸 벼슬로 품계는 정 2품)가 되였다.
사당에서 내삼문 을 바라본 모습 광교 아파트 숲과 대비를 이룬다.
태종 17년 6월에 이조판서에 임면되셨다 육판서 중 하나로 으뜸인, 수석 판서다. 왕으로부터 단자와 채견을 받았는데, 임금이 주신 물건은 전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 즉 나도, 비단 한 필을 택하여 옷을 지어 입으려고 하니 경 도 따라주기 바란다. 고 하셨다. 일 년 후 태종 18년 6월에 공을 공조판서로 제수하였다.
뒤뜰후면세서 바라본 풍경
태종 18년 6월에 큰 사건이 있었는데 태종이 세자(양영 대군) 이제를 페하고 경기 광주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충령 대군(휘)으로 왕세자를 삼았다. 태종은 말하기를 제관들이 올린 상소문을 읽어보니 몸이 송연하다. 이는 하늘의 뜻으로, 천명에 따르겠다. 공조판서인, 공을 비롯한 문무백관들에게 명하여 전지하기를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가 청하였기에 이미 페하였다. 무릇 사람은 허물을 고치기가 어렵다. 나라의 근본은 한시도 늦출수없고. 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일 정하지 않으면, 인심이 흉흉할 것이다. 옛적에는 유복자를 세워 선왕의 유업을 이어받게 하였고, 또, 적실의 장자를 세우는 것은 동서고금에 변함없는 규칙이다. 세자 이제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다섯 살이고 차자는 세 살이니, 나는 제의 장자로 세자를 삼으려고 한다. 장자가 유고하면 그 동생을 후사로 삼을 것이다. 왕세손이라 칭할지, 황태손이라 칭할지 대신들이 협의하여 결과를 아뢰어라. 하였다. 한상경 이하 군신들은 모두 제의 아들을 세우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다 이때, 영의정 유정현이 말하기를 신은 배우지 못하고 고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에는 권 도와 상경이 있으니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좌의정 박은이 말하기를 아비를 폐하고 아들을 세우는 것이 고제에 있다면 가 합니다 그런데, 없다면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합니다. 이에 모든 대신들이 어진 사람을 고르소서 하였다. 철 성부 원군 이원 이 말 하기를 옛사람은 큰일이 있을 때 반듯이 거북점과 시초점을 쳤으니 청하던데 점을 쳐서 정하 기기 바랍니다. 하니, 태종이 신하들에게 의론 하라고 하고 내전에 들어가 왕비에게 물으니 왕비는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환란의 근원으로 불가하다고 하였다. 태종은 이를 옳게 여겼으니 한참 후에 곧 깨달아 말하기를 금일의 일은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나라 근본 은 막중하므로, 어진 사람을 고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제의 아들로서 세자를 삼고자 했으나. 경들이 불가하다고 하니 어진 사람을 골라서 아뢰어라 영의정 유정현이 아뢰기를 아들을 알고 신하를 아는 것은 군부와 같은 이가 없습니다 하니, 태종은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에 만복이라고 하였다. 둘째, 효령대군은 자질이 미약하고 성질이 개 좌하여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 말이 없다 또, 술 한 모금도 못하니 중국 사신을 접객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중전도 그가 항상 웃기만 할 뿐 실천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한다. 충령 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해서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니 그가 병이 날까 두려워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럼에도 내, 큰 책을 청하여 전부 가져 같다. 또, 치제를 알아서 큰일에 헌의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중국 사신을 접대할 적에 신체와 언어 동작에 능하니 나는 충령으로 세자를 삼겠다. 영의정 유정현 등이 아뢰기를 신등이 이른바 어진 사람을 고르자고 한 것은 충령 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니, 태종께서 통곡하여 흐르끼다 목이 멨다. 태종은 대제학 조말생에게 하교하기를 사직이 걸린 중요한 큰일은 시간을 끌면 반듯이 사단이 일어난다. 너는 선지를 내어서 속히 세자 책봉식을 거행하라. 문무백관들이 입궐하여 세자를 정한 것을 하례 하였다. 태종은 즉시 장천군 이종무를 종묘에 보내여 조상에게 고하였다.
- 충령 대군이 효성스럽고 우애와 온화하고 인자하여 진실로 저부에 합당하다는 여망이 있어, 감히 고합니다-
사당에서 내삼문을 바라본 풍경
충령 대군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덕망이 날로 높아져, 좋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종과 왕비의 총애가 날로 더해 같다. 세자 양영 대군은 광폭하고 방종하여 여러 사람들이 장차 중임을 다하지 못할 것이라고 염려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세자를 폐하고 다른 왕자로 세울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군신들이 청하자. 반색하였고 왕비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충령 대군이 세자가 되자 온 나라가 흡연하고 기뻐하며 경축하였다. 이숙번이 일찍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사람들이 모두 청하기를 충녕은 가산(家産)에 물욕이 없이 사람들이 신뢰합니다. 말했다. 외부에서 여러 사람들이 충령을 만나 빕기를 원했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또, 평상시에 부인을 경대하여 그녀가 나아가고 물러갈 적마다. 반듯이 일어나, 보내고 맞이하였다. 그때 임금이 경복궁에 임어하니 대, 소인이 경복궁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는 자가 적었다. 대군은 지날 적마다 반듯이 말에서 내렸는데, 밤이나 낮이나 비가 오나, , 눈이 오나.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그 공경과 효도가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 번은 중국 사신 황엄이 대군을 보고 매양 똑똑하고 겸손한 것을 두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영 명하기가 뛰어나 부왕을 닮았다. 동국의 전위는 장차 이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하였다. 후에 온민생이 세자를 봉하도록 청하는 표문을 가지고 연경에 오자 황엄이 물으니, 온 민생이 말하기를 세자를 바꾸기를 청합니다 하니 황엄이 필시 충녕을 봉하도록 청하는 것이리라 하였다.
오부후원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
바로, 세자에게 관교(임명장)를 내려주고 심 씨를 봉하여 경빈으로 삼고 공을 이조판서에 제수되셨다. 태종 18년 7월에 최고의 정무 기관인 의정부 참찬(정 2품) 제수되셨다. .
태종 18년 8월 8일에 태종이 세자에게 국보를 주고 영화방의 옛 세자궁으로 이어하고, 태종이 경회루에 나와 지신사 이명덕, 좌부대언 원숙, 우부대언 성엄들을 불러 내가 재위한지 18년 동안 호랑이 등을 탔으니 이제는 족하니, 내려오고 싶다고. 양위할 의사를 밝히자 영의정을 비롯한 좌의정, 우의정 육조판서 육조 참판 등이 한결같이 성상께서 춘추가 아직 노쇠하지 않고 전하가 천조한 이래 백성이 평안하고 물자가 풍부하고 인심이 태평한 적이 지금 같은 적이 없습니다. 양위는 불가합니다.라고 아뢰었다. 태종이 아비가 아들에게 전하는 것이니 신하들이 간여 쟁하지 마라. 이미 결정한지 오래되였 으니 그리 아시게! 태종이 의관을 정제하고 보평전으로 납시었다 승전원에 하교 하기를 오늘 개인할 일이 있으니 속히 대보(옥쇄)를 바치라 이르고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일절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문밖에 대소 신하가 호천통곡하면서 내선 거조를 정지시키고, 대보를 붙잡고 바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태종이 승정원 동부대언 이명덕에게 윽박지르기를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이 신하의 도리인가? 하니 이명덕이 마지못하여 대보를 태종에게 바치었다. 세자기 급히 태종이 무슨 연유로 부르는지 내용을 모르고 허둥지둥 서쪽 지게문으로 들어가니 태종이 세자를 보고 애야 이제 대보를 주겠으니 일단 받아라 하였다.
위폐를 모신 사당 안효사.
세자가 부복하여 일어나지 못하니 소매를 잡아 일으켜서 대보를 주고 곧 안으로 들어 같다. 세자가 몸 둘 바를 몰라 대보를 안고 따라 들어가 지성으로 사양하고 군신들 또한 통곡하여 마지않으며, 국세를 되돌려 받도록 청하고 황제께 세자를 봉하도록 청하지도 못했는데, 어찌 이리 급박하십니까? 하니 태종이 어찌 중국에 주문할 연고가 없겠나. 하고 최한 으로 하여금 대소 신료에게 하교 하기를 내가 이미 국왕에게 대보를 인계하였으니 경들은 다시 청하지 말라, 세자에게 명하여 대보를 받았으니 궁에 머물게 하고, 상서관과 대언에게 명하여 대보를 지키게 하였다. 세자가 다시 한번 전에 나아가 대보를 바치며 굳이 사양하니, 밤이 되자 태종이 나의 뜻을 유시한것이 벌써 두세 번이나 되는데 어찌 이리 불효를 하느냐! 신료들의 청을 들어 복위한다면 너는 살아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세자의 두 손을 맞잡아 북두칠성을 가리키며 맹세하셨다 결코 복위하지 않는다. 내가 이러한 약조를 천지와 종묘에 맹세하고, 고! 하였으니 어찌 감히 변하겠는냐 세자가 황공하고 두려워하면서 지충추원사 이명덕을 돌아보면서 어찌해야 하오 하니 이명덕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뜻이 정해졌으니 효도를 다하심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다음날 세종이 전에 나아가 다시 한번 사양하는데, 신은 성품과 자질이 어리석고 둔하여 학문도 아직 결실하지 못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위엄이 없습니다 그동안 외람되게 세자 지위에 있으면서 조, 석간으로 근심하고 걱정하여 그 자리가 합당치 못할까 항상 두려웠습니다. 어찌 오늘 맞기신다는 하명이 있을 줄을 헤아렸겠사옵니까. 뜻밖의 일을 당하여 정신이 아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청하옵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춘추가 왕성하시고 성덕이 바야흐로 융성하시온데 갑자기 정사가 고달프다고 하시면서 종묘사직의 막중한 책임을 어리석은 이 몸에 맞기시려고 하시니, 신자의 마음이 더욱 두렵고 황송할 뿐입니다. 진실로 두렵건대 조종의 신령께서 놀라실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어리석은 신의 지극한 사정을 살피시고 국가 대계를 염려하시와 종묘사직과 신민의 기대를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 태종은 내가 다른 성에 위를 전한다면 너의 청이 당연하지만 내가, 내 아들에게 위를 전하는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하느냐! 하고 익선관을 친히 세종의 머리에 씌우고 국왕의 의장을 갖춰 경복궁에서 즉위하게 하였다.
나이 어리고 아둔한 내가 국가 대사를 감당하기 어려워 지성껏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도다.
이로 써 세종이 등국 하면서 공께서는 임금의 국구가 되시었다.
사당과 묘역 전경
태종이 최한에게 명하여 정부 대신들에게 하교 하기를 주상이 아직 장년이 되기 전에는 군사는 내가 친히 창단할 것이고 또한 국가에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부, 육조로 하여금 함계 그 가부를 의론하게 할 것이며, 나 또한 의론 하리라, 하니 좌의정 박은 등이 대답하기를 임금께 오서 전위하려 하심을 신들은 편안히 쉬시려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제야 깊은 뜻을 알았나이다. 청컨데, 교서를 내리시와 전위하시는 뜻을 밝혀, 신민의 심정을 편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예조판서 변계량에게 명하여 전위하는 교서를 짓게 하였다. 또, 대언에 명하기를 병조 당상은 모두 나에게 시종하고, 대언들은 주상전에 시종하라 하였다.
태종 18년 8월 10일 공께서 청천 부원군이 되시고 공의 부인 안 씨를 삼한 국대부인으로 삼았다.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이 지은 태종 신도 비문에, 우리 중궁 공비 심 씨는 문하시중 심덕부의 넷째 아들 심온의 딸인데 4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문종) 은 곧 세자이고.... 경숙옹주를 경빈으로 봉하고 책문을 내리기를 공의를 따라 원량을 세우니 세자의 자리가 바로 정해졌고 배필을 신중히 하여 종사를 받드니 위호를 마땅히 높여야 할 것이다. 이에 아름다운 칭호로써, 떳떳한 법전에 따르노니 아아, 너 심 씨는 곧고 아름다운 성품과 단정한 몸가짐으로 늘 공경함과 두려운 마음을 지녔고 일찍이 근검한 덕이 현저하여 내조의 덕이 풍성한지라 한 집안 식구 됨이 합당하다. 이에 좋은 날을 가려. 대례 절차대로 신하 아무를 보내, 경빈에 책봉하노니 정숙하고 화기롭게 힘쓸지니 지아비가 정치에 전렴하게 내조하고 화목함으로 부부간에 서로 받들 것이며, 자손이 번창하여, 상서로움이 더욱 클지어다! 라고 지었다 시아버지가 최고의 찬사로 며느리를 칭한 것이라.
세종 즉위년 8월에 중국 황제에게 새로운 국왕 탄생을 승인한 사은의 뜻을 전하기 위한 사은사를 보내야 하는데 상왕이 말하기를 사은사는 반듯이 친척을 보내야 한다 . 한장수가 비록 친척이긴 하지만 심온만 못하고 또한 황엄은 평소에 온을 알고 지내는 사이니, 온이 간다면 엄은 반듯이 정성을 다할 것이다 한 장수 대신에 온을 보내기로 하였다. 상왕이 세종과 더불어 양정에 나아가 사은사 심온과 부사 이적 및 박신을 전송하고 상왕은 공에게 내구마를 하사하시었다. 세종 즉위년 9월에 상왕이 말하기를 심온은 국왕의 장인이니 그 존귀함이 비할 데 없으니, 마땅히 영의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절차는 좌, 우 두 정승과 상의하도록 하라 하니 박은이 아뢰기를 마땅히 창령 부원군 성석린의 위에 두어야 할 것이 옵니다.라고 했다. 세종 즉위년 9월에 공께서 영의정 부사에 오르셨다.
세종 즉위 년, 9월 8일에 상왕이 환관 황도를 보내여 문밖까지 공을 전송하게 하고 세종은 환관 최용을 ,중궁은 환관 한호련을 각각 보내여 연서 역에서 공을 전송하게 하니 공은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이 못돼 여 만인 지상의 지위에 오르게 되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이날 전송 나온 사람으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다.
공의 묘역 (200m/m RF2.8 렌즈로 찰영)
묘역은 조선 초기 형태로 3단 계체석 구조로 조성되었다. 상석을 비롯한 고석, 배설석, 장면등.문신석등 당시 석물 양식대로 잘 갖추어져 있다. 상석을 받친 고석을 사각형으로 만들고 중앙에 종으로 한 줄 두터운 선을 내린 것이 특이하다. 장면 등 옥개석 지붕 위에는 둥근 절병 통을 올렸으며, 사방으로 화창을 낸 화사석 몸체에는 아름답게 화문으로 장식했다. 복두 공복을 착용한 채 묘역 좌, 우에서 시립해잇는 문인석은 신체 비례가 기하학적으로 안정된 비례를 이뤘다. 조각은 세부 표현이 매우 뛰어난 사실적인 조각품이다. 계체석 우측에는 제향 때 쓸 제물을 올려놓던 배설석이 놓여있다.
묘, 뒤에서 바라본 모습
공께서 비록 병조판서 강상인 등, 옥사에 연루되여 죄를 받은 것은 건국한지 50년 된 초기 왕권 강화를 위해 상왕이 양위히하면서 세종이 아직 어리다 하여, 병권과 국가 중대사를 양여하지 않고 친히 관장하기로 한 방침에 따라 군사문제를 세종에게만 보고하고 상왕에게는 보고하지 않은 강상인등과 공의 아우 심정이 영이 두군데서 나오니 혼란스럽다고 한말이 고변이 되여 무술년에 옥사가 일어났다. 태종은 왕권약화로 이어질수 있는 처족발호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의도된 계략에 엮인 것이다. 세종 즉위 년 12월 23일 무술옥사로 수원에서 사사되시었다.
- 세종실록 43권, 세종 11년 3월 17일에 의정부와 육조 관원이 의정부에 모여 심온 일을 논의하고 계하기를 , 심온 사건에 연루된 강상인 등을 이미 처형하였기 때문에 대질신문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의심스러운 옥사입니다. 그 당시 강상인 등에 관련되여 잡혀 있던 자들 중 상당수가 강상인과 대질조사한 후 죄를 면한 자가 많은데, 이것을 보더라도 어찌 의혹이 없겠습니까? 만약 태종께서 장차 온에게 죄를 중하게 주시려고 하셨다면 온이 돌아와서 대질하도록 기다리지 않고, 강상인등을 다 처형하였겠습니까? 이는 온을 용서하시려고 한 것이 아닌지 그 뜻을 알기 어렵고, 용서하시려고 대질할 강상인을 죽이고, 바로 온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유배하시려는 것인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하니, 세종이 내 마땅히 헤아려 보겠노라 하였다.
이때 이조참판 정초 가 좌중에게 말하기를 - 신이 당시 사간으로 그 옥사 국문에 참여하였습니다 온이 국문을 할 때, 마음속으로 자치 지종을 밝히려고 하였으나 하루 동안 두 차례나 신장을 맞고 세 차례나 압슬형을 당하여도 오히려 굴복하지 않더니 도제조 유정현이 온에게 말하기를 공의 지위와 권세로 미루어 오늘 이국 문하는 정세를 본다면 가히 알 것이니, 끝내 승복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하니 온이 이 말을 듣고, 한마디 말도 없이 일일이 승복한 것입니다. 정초의 말대로 온의 승복(자백)이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태종이 이와 같은 사실을 어찌다 아셨겠는가? 하였다.
세종실록 53권, 세종 13년 9월 8일
형조판서 숭선이 아뢰기를 신이 무오년 대옥 초록을 보온즉, 심온의 말에 신이 무반이기 때문에 병권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하였으나 온의 참뜻이 아닐 것입니다. 형벌을 두려워하고 형세에 피박되여 할 수 없이 납초(자백) 한 것이며 또, 대질도 하지 않았사오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종께서 사제를 하시고 또, 예장을 명하셨으니 국모의 친아버지를 죄인으로 기록하여 두게 함은 신은 불가하다고 아뢰옵니다. 이에 세종이 선조 때 일어난 일로 뒤에 고칠 수 없다. 하니
형조판서 숭선이 다시 아뢰기를 신이 거듭 생각하오니 국모의 아버지를 죄적에 이름을 기록한 것은 심히 불가합니다. 만약 태종대왕께서 오늘날 계시었으면 반듯이 이와 같이 아니 했을 것입니다. 후세에 전하를 융통성이 없다고 이를까 깊이 두렵습니다. 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무엇이, 융통되지 않는단 말인가? 선군께 득죄한 사람을 내가 감히 어찌 가볍게 용서하리오!!
세종이 선지 하기를 심온은 비록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지 못할지라도, 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관 이양 달(당대 최고의 지관, 비록 물이 없어도 한양은 도읍지로 명당이라는 한양 천도론을 주장했다. ) 보내여 장사 지낼 땅을 가려정하고 수원부에 명하여 장사를 치르게 하고 관곽, 종이, 석회를 내려주고 내관을 보내여 장사를 돌보게 하고, 수원부 관원으로 하여금 치제케 하였다. 공께서 44세에 졸하시었다 공은 성품이 인자하고 온순하여 물정에 거슬리지 않았다.
방부 규수 백 대리석 비신 앞면에 두 줄, 유려한 팔분 서로 안효라는 시효가 들어간 신원을 쓴 것은 복관 이후에 입석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방부 윗면에 복련으로 장식하고 좌우 1칸 앞뒤에 2칸 식의 당초문을 화려하게 조각했다. 비석 규모에 비해 두께는 매우 얇다. 묘역이 광교역사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진품은 유물 보호를 위해 수원 광교박물관에 위탁관리하고 똑같이 만든 복제품을 세웠다. 조선 전기 사 대 명필인 외손, 안평대군 필적은 송설 체의 대가로 우리나라 서예사와 금석사 연구의 귀중한 유물이다.
전경을 200m/m 렌즈로, 길건너편에서 찰영햇다.
풍수지리에 지식이 없어도 공의 묘역은 대한한 길지라는 것을 느낄수 있다. 당대지관이 골랐다는 것이 수긍이 절로 간다.
문종 1년 11월에, 외손, 문종이 외조부에게 安孝公이라는 시효를 내리니, 화친한 것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음은 安 이요, 오종(고조부, 증조부, 조부, 자, 손,의 5대를 말함) 을 편안하게 한 것을 孝라 하였다.
신 도 비 전 문
유명 조선국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여의 정부사 겸 영 경연 서운 관사 청천 부원군 증시 안효 심공 신도 비명 병서 9세손 보국숭록대부 행 판충추부사 치사용봉조하 단은 삼가 찬을 하고 외예 숭정대부행 호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동지성균관사 예문관제학 서명균은 삼가 썼으며 13대손 어모장군 행 호분위 부사과 육 삼가 전하다. 공의 이름은 온이고 자는 중옥이다. 청송 심씨의 시조는 고려조의 문림랑위위시승 홍부로 그의 아들인 연은 합문지후였고, 연의 아들인 용은 이조정랑으로 문하시중 청화 부원군에 추봉 되었으니 이 분이 공의 조고이시다. 아버지인 덕부는 좌시 중으로 특진하여 청성 백으로 봉해졌고, 아조에 들어와서 훈작이 내려졌으나 받지 않으셨으며 시호는 정안이었다. 비는 청주 송 씨인 청원군 유충의 따님이었고, 계비 문 씨는 감문위 낭장 필 대의 따님이었다.
공은 홍무 을묘년에 태어났으니 계비 문 씨의 소생이었다. 12세에 병인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태조 때에 병 · 공조 의랑을 역임하였다. 공정 즉위 년에 보공장군 용무사 대호 군에 제수되었고, 태종 원년 신사에는 본직으로 지합문사를 지냈으며, 4년 갑신에는 대호 군으로서 판 내시다 방사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용양 사상 회군으로 승직되어 판통례 문하사를 겸하게 되었다.7년 정해에 승정원 동부대언으로 발탁되었다가 좌부로 승직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가선으로 승계되어 좌군 동지 총 제를 배수 받았다. 8년 무자에는 잠저에 계신 세종의 비를 명가의 규수 가운데 구함에 있어 공의 장녀가 간택되었다. 11년 신묘에 가정으로 승계되어 풍해도 관찰사를 배수 받았고, 돌아와서는 참지의 정부사가 되었다가 곧 사헌부 대사헌을 배수 받았다. 14년 갑오에는 자헌으로 승계되어 형조판서, 한성부 판윤, 좌군도 총 제 등을 배수 받았고, 정헌대부로 가자 되어 이조판서를 지냈다.
18년 무술에는 세종이 세자로 승격되어, 8월에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상왕이 되셨으니, 공은 국구로서 청천 부원군에 봉해졌다. 상황이 말하기를, “임금의 장인은 그 존엄함이 비할 데 없는 것이니 마땅히 영의정을 배수하고 그 위차는 좌 · 우상이 의논하여 계하라.”하시니, 좌상 박산이 말하길, “그 위차는 창령 부원군 성석린의 위에 둠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사은사로서 경사로 향할 때 3전에서 각각 내시를 보내어 교외에서 전별하니 이를 보는 자가 모두 경도되었다.11월에 공이 돌아와 복명을 하기 전에 강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처음 상왕이 이미 선위하였으나 군국 중사는 모두 상왕에게 품계하도록 명하였는데, 병조에서는 다만 작순사만 품계하고 나머지 일들은 모두 품계 하지 않으니, 상왕이 진노하여, “누가 이 일을 주동하였는가?”하시며 금부에 명하여 주동자를 체포하여 심문하도록 하였다. 드디어 병조판서 박습, 참판 강상인, 참의 이각 및 여러 낭관들을 잡아다 문초하였으나 자백하지 않으므로 모두 석방하였다.
이에 이르러 또 근거 없는 말들이 상왕의 귀에까지 전해지자 다시 상인 등에 대한 국문을 명하여 4차례에 걸쳐 압슬을 행하자, 상인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자백하기를, “우연히 동지 총제 심정을 궁문 밖에서 만났는데 정이 신에게 말하기를, ‘내금위의 결원이 심히 많은데 시위의 허소함을 어찌 제때에 보충하지 않는가?’하여, 신이 말하기를, ‘군사를 한 곳에만 배치한다면 어찌 허소함이 근심되겠습니까?’라고 하자, 정이 말하기를, ‘한 곳에만 배치한다면 군사의 많고 적음이 또한 어찌 문제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라는 것이다.정은 즉 공의 동생이니 금부에서 정을 잡아다 대질하자, 정이 말하기를, “신은 임금을 시위하는 내금위 절제를 맡고 있으므로 상인과 더불어 그 시위의 허소함을 직접 의논하였을 뿐이고, 일처 운운은 신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상인에게 다시 압슬을 가하자 상인은 다시 지금까지의 말을 바꾸어, 날짜는 분명하지 않지만 영상 심온을 상왕 전문 밖에서 만났을 때, 시위 군사가 두 곳에 나누어져 있어서 갑사가 부족하니 마땅히 3천 명을 증원하여야겠다고 말하자 온이 그렇겠다고 하였고, 후에 일이 있어 온에게 찾아갔을 때 다시 “군사는 마땅히 한곳으로 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하자 온이 "그렇다."라고 하였다. 상왕이, “과연 내가 들은 바와 같다."라고 하셨다.
참판 조말생 등이 말하기를, “이성의 자효함이 하늘에 이를 정도인데 이들 무리들이 마음대로 군무를 바꾸고자 하니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왕이 말생에게 명하여 상인의 국문을 하도록 하자, 상인이 말하기를, “사실 고통을 이기지 못하였을 뿐으로 실상은 모두 거짓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정을 국문하자 정이 매를 이기지 못하고 무고하게 공을 끌어들여 말하기를, “신의 형이 군사는 마땅히 한 곳으로 귀속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라고 하자, 상왕은 “주모자는 온이다.”라고 하시며 좌상 산을 부를 것을 명하셨다. 산이 말하기를, “소위 일처라는 것이 어찌 상왕전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주상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라고 하며 독대를 청하여 여러 가지로 공이 권세와 재물을 탐하고 있음을 말하였다.상왕이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있다가 이윽고 “사람으로 권세를 탐하지 않을 이가 누가 있겠는가, 좌상의 말을 들으니 이것이 오늘에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로구나!”하시며, 교를 내리기를, “상인의 죄가 중하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고, 습 등은 상인에 비해 그 죄가 가벼우니 잠시 보류하여 온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떠하겠는가!”하셨다. 또한 온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 어떤 이는 습 등이 죄상을 자복했으니 하루라도 형을 늦추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고, 어떤 이는 습 등을 죽인다면 온은 누구를 상대로 무고한지를 가릴 수 있겠느냐며 온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산이 말하기를, “온의 죄상은 사실이 명백하게 증명하므로 온이 비록 돌아오더라도 다시 뒤집을 수는 없으니 보류한다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하니, 상왕이 산의 말을 따라 습 등을 주살하였다. 이에 유정현, 조말생 등이 산에게 부화뇌동하여 혹은 공이 분주하게 중국에 호소하여 조변을 꾀한다 하기도 하고, 혹은 공이 암암리에 본국에 돌아와 난을 칭하며 서변에서 책략을 꾸미고 있다고 하기도 하였다.공이 돌아와 국경에 이르게 되자 함 거로 압송되었으나, 공은 상인 등이 이미 죽은 것을 알지 못하여 대변하기를 구하였으나, 상왕은 수원부에 유배하여 사사할 것을 명하면서, “상인 등은 이미 죽었으니 어찌 가히 가릴 수 있겠는가, 경은 왕비의 부이므로 단지 사사만을 명하는 것이니 마땅히 나의 뜻을 알라.”고 하셨다. 이해 12월 25일에 사사되었으니 연세가 겨우 44세였다.
처음 상왕이 선위하고 자 하였으나 이를 말로써 드러내지 않았는데 산이 이를 헤아려 알고서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근일의 임금의 뜻을 공은 알고 있습니까, 임금께서 일을 처리하심이 선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끝내는 아무런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그 뜻이 비록 선위라고 하지만 확실한 보장을 받아야만 끝내 후환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공이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께서 산을 의롭지 못하게 여기고 또한 공과 더불어 그러한 말을 한 것을 미워하였다. 상왕이 말하기를, “산은 사심이 없는 신하가 아니로다.”라고 하셨다. 산이 이를 듣고 공을 심히 원망하였는데, 공이 죽음을 당하게 되자 산은 시종 모함하는데 더욱 힘을 쏟게 되었다. 공이 임종하는 자리에서 가인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자손들은 세세토록 박 씨와는 서로 혼인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아아! 권임이 이미 공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는데 다시 중궁을 폐할 것을 청하자, 상왕이 엄히 이를 물리치며 “사서의 아녀자도 출가하면 연좌됨이 없는데 하물며 국모임에 서랴."라고 하셨다. 상왕이 교를 내리기를, “이 사람을 비록 예장할 수는 없지만 장례는 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시며, 이양 달을 장지에 보내고 수원부에 명하여 장례 일을 돌보도록 하였으며 관곽과 석회를 하사하고 귀인을 골라 호상토록 하며 소재지의 관에서 치제토록 하였다. 장지는 용인 산의 곡 부자의 언덕이다.문종 원년 신미에 정원에 내린 교에서 대략 말하기를 모후 부가 영릉의 비문에 마땅히 실려야 하거늘 직명이 없는 것이 어찌 가하겠는가. 의정부에서 의논하여 계하라 하셨다. 좌의정 황보인, 우의정 남지, 좌찬성 김종서, 좌참산 안숭선, 우참찬 허후 등이 합계하여, “가정 만으로 연좌되어 실제로 꾸민 일이 아니면서 도리어 억울하게 죄를 썼고, 사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느라 변명조차 하지 못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를 원통하게 여깁니다.
특히 태종 임금께서 법을 엄히 집행하여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한 것뿐이며, 세종임금께서는 부왕의 처분을 어길 수 없어서 신원되지 못하였으니 지금 직첩을 환급함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계하기를, “송나라의 악비, 우리나라의 정몽주는 이미 설원 되어 모두 시호를 추증 받았는데 태종 임금께서 아울러 허락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태상시에서 시법을 살피니 화호부쟁함을 안, 오종을 효라 하니, 공의 시호를 안효로 추중하고 공의 두 아들을 기록하여 회, 결은 모두 돈녕 주부를 제수하였고, 준은 앞서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 미에게 농전 직장을 제수하였다.
공의 배인 삼한국대부인 순흥 안씨는 영돈녕부사 소의 공 천보의 따님이다. 공이 화를 당하자 조정에서 주청하여 그 자식들은 노비로 삼고 부인은 천안에 기록되었다. 그 후 우의정 이직 등이 계하기를, “공비 전하는 한나라의 모범인데 그 어머니 안 씨가 천안에 있는 것은 국체에 미안한 일이오니 청컨대 천안에서 삭제하고 직첩을 환급하소서.”라고 하였다.
세종임금이 지신아 곽존중을 불러 면 유하기를, “내가 일찍이 태종, 태비 양전을 모시고 있는 자리에서 태비께서 공비의 모친이 천안에 있는 것은 심히 불가한 일이라고 말씀하시자, 태종 임금은 내가 마땅히 이를 고쳐야 하지만 아직 시행하기에는 미급하니 내가 빨리 세상을 떠야 한다고 하시니, 내가 부왕의 뜻이 이와 같음을 알고 아직 때가 아니므로 감히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근일에 이를 말하는 자가 많고 지금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천안에서 삭제하게 직첩을 환급하며 아울러 그 자녀를 면천 시키도록 하라. 또한 모자가 서로 만나지 못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날을 정해 공비가 직접 안씨 집을 행차하도록 할 것이니 경등은 그렇게 알고 있으라.”하셨다.후에 세종 왕후께서 돌아가시고 공의 묘는 지금까지 천묘 되지 못하였다가 관에서 제수를 지그하고 국가에서 애도하는 은전을 베푸니 이에 이르러 여한이 없게 된 것이다. 부인의 묘는 안성군 동면 가미 둔 임 좌의 언덕에 있다.
공은 천성이 인후하고 자 순하면서도 겸공하여 남을 사랑하고 이익을 위해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왕가와 척련을 맺게 되면서부터 더욱 근검하고 겸손하셨다. 영묘가 동궁에 계실 때 공이 아뢰기를, “지금 사대부들이 신을 대함이 모두 지극히 은근하여 신은 실로 두렵습니다.”하셨다. 요컨대 두문사객하면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는 것으로 의혹을 멀리하고자 하는 남다른 신중함이 이와 같았으며,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항상 나라의 휴척을 같이 하고 의로움을 벗어나지 않으셨다. 그러나 물러나 있으면 또 그렇게 해서 임금의 환심을 사려 한다고 헐뜯는 자들이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공은 이러한 모함 역시도 순순히 받아들였을 뿐이다.아! 자고로 군자가 참화에 걸리는 것은 혹 매우 어려운 시대를 만나거나 혹 권세를 탐하거나 해서 이니, 비록 불행한 일이지만 역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이지만, 공은 홍창의 치하에 명철한 지혜를 갖추고도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지극한 원통함이다. 또한 세종 때에 필부필부라도 원통함이 없었는데 유독 공만이 처한 처지로 인해 의혹을 받았으니, 감히 선조의 일을 가볍게 바꿀 수는 없는 것이지만 공의로 수십 년간 억울함을 당하였던 것이 또한 공의 지극한 원통함이다.
그러나 끝내는 공의 억울함이 풀어지고, 공이 뿌리고 기른 덕과 선행은 그 자손에게 내려 크게 번창하게 됐으니 그 보답인 것이다. 딸을 낳아 적위에 오르고, 아들을 낳아 대신의 지위에 이르니, 위로는 일월이 음으로 양으로 짝하여 밝게 드러나게 한 것이며, 아래로는 나라의 동량이 되어 찬란하게 훈업을 이룬 것이니, 심 씨의 융성함은 나라의 흥함과 더불어 끝이 없을 것이리라.대저 천도는 유원하고 인경의 선은 긴 것이어서, 도리어 수십 년의 억울함은 다만 경각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보여주니 공이 어찌 원망함이 있으리오. 지나간 자취를 어루만지면서 지극한 서러움을 지닐 이가 사사로운 자손들뿐이겠는가.
공이 돌아가신지 어언 300여 년이 지나도록 묘도의 현수가 없으니, 비록 집안이 화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공의 행적이 없어짐은 후예들의 책임인 것이다. 이에 종인들 이 함께 도모하여 비석을 세우고 단으로 하여금 년고한 어른을 모셔 자필을 맡기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근근이 야사와 유기에서 주워 모아 그 피화, 신원의 본말과 공의 입조, 덕업의 사실을 기록하였으나, 부인의 행의에 대해서는 실전하여 기록하지 못했으니 실로 애통한 일이다.
공은 3남 6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소헌왕후로써 세종의 배이며 문종의 어머니이시다. 세조는 또 여섯 대군과 두 공주를 두셨다. 아들 준은 영중추, 회는 영의정으로 시호는 공 숙공이며, 결은 영돈녕으로 시호는 정이이다. 딸은 판서 강석덕, 동 중추 노물재, 지돈녕 유자해, 지중추 박숭지, 지돈녕 박거소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서자로 장수, 장기가 있다.
영중추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감사 미와 판관 치이며, 공숙공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참의 린, 좌윤 한, 판관 원이며, 정이공은 한 아들을 두었으니 수사 정원이다.강석덕은 3남 5녀를 두었으니 부윤 희언, 찬성 희맹, 그리고 희참과, 사위는 감찰 남준, 판사, 신축, 부사 김원신, 장원 군 황춘, 참의 박미이다. 소물재는 4남 5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부사 회신, 판사 전신, 영의정 사신, 목사 호신이며, 사위는 목자 정결 우군 정호, 첨정 이종연, 의령군 남윤, 정부이다.
유자해는 4남 6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첨지 균, 목사 양, 첨지 돈, 감정 오이며, 사위는 주부 성효원, 화산군 권감, 판관 유수창, 첨정 최희, 좌랑 하주, 감찰 정제이다. 박거소는 3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평양군 중선, 감찰 계선, 중추 숙선이며, 사위는 우경종, 직장 이문, 동지 민박이다. 증손 이후는 내외 모두 수효가 많아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임란에 사절한 기백 대, 그리고 사간 태부, 참판 연, 관서백 택, 장령 득원, 좌랑 유의는 미의 후손이며, 직소하였다가 을사년에 화를 당한 정언령, 그리고 부사 순, 사예 정호, 좌랑 한필, 도사, 세우, 정랑 일의는 린의 후손이다.
원은 3 남을 두었으니 돈녕 부정 순도, 우윤, 순경, 사인 순문인데 순문은 연산시에 직언하였다가 화를 입었다. 사인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영의정 연원이고 차남은 수찬 달원으로 기묘명현이었으며, 3 남은 동지돈녕 봉원, 4 남은 좌의정 통원이다.인순왕후를 탄생한 청릉 부원군 강, 대사헌 의겸, 판서 충겸, 대교, 혼, 영의정 열, 사인 광세, 청성 군 정화, 청운군, 명세, 교리 희세, 부윤 총, 부윤 황, 참판 평, 감사 권, 그리고 단의왕후를 탄생한 권의 손자 청은 부원군 호, 참의 수량, 주서 귀서, 응교 유, 병사 주, 증 사서 익, 대사헌 공, 우의정 수현, 행판서 택현, 교리 태현, 지평 육은 모두 연원의 후손들이다.
기백 전, 목사 우정, 기백 우승, 도정, 시, 판서 즙, 행판서 액, 좌랑 선, 응교 동귀, 승지 광수, 지평 세탁, 감사 세정, 부제학 유, 좌랑 백, 헌납 사홍, 정언 상, 감사 발, 봉조하 단, 사성 방, 승지 당, 정득 낭정자 득천, 좌랑 균, 수찬 성희는 모두 달원의 후손들이다.정자 건, 좌의정 희수, 교리 유, 행판 중추 재, 통제사 박, 판결사 최량, 감사 중량, 승지 계량, 현감 주관은 모두 봉원의 후손들이며, 우윤 뢰, 부사 극명, 승지 언명은 모두 통원의 후손들이다. 또한 전한 의흠, 사예 원해, 장령 원하, 정랑 지는 모두 정원의 후손들이다. 명하기를, 나무에 여러 아름이 있고 산에도 반드시 높은 봉우리가 있듯이, 도를 돕고 덕을 높이 쌓은 이를 세상에서는 반드시 희홍이라 부르리니. 찬연한 영릉이여, 동방의 요순이로다. 누가 기룡이라 하는가, 긴절히 공에게 매여 있도다. 정성으로 왕비를 잉태하사 두루 조종을 도우셨네. 해와 달에 의지하고, 구름과 달을 맺었으며 척신이며 재상이니, 양궁의 날개로다.
근신과 겸손으로 이름을 드높이고, 정성으로 몸을 바침이 끝이 없었네. 어짊으로 돕고 겸양으로 보 우하시니 가히 하늘을 떠받치려는가. 누가 비단으로 옷을 지으며, 그 누가 제 지내 무지개를 그리는가. 억울하게 연루되어 죄를 받으니 뜻밖의 재난이 어지러울 뿐이네.몸을 구부리고 발끝으로 걷더라도 원통함은 백세토록 남으리 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 선이요, 감출 수 없는 것이 충 이러니. 물이 막힌 샘에서도 어느 때인가는 통하는 것처 천도는 언제나 좋게 돌아오는 법, 정중하게 송 조하라는 왕명이 있었도다. 직첩으로 쇠름으로, 은전은 따라서 융숭해지니 억울함은 씻었어도 슬픔은 드러내지 않았네. 굽히고 펴고 이기고 지는 것이, 그 이치가 실은 어두운 것이 아니었으니, 사서에 바르게 써서, 영원히 궁하지 않음을 보이리라.
9세손 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단 찬하고 외예 숭정대부행 호조판서 서명균 쓰고 13세손 부사과 육 삼가 전하다. 정기원 후 104년(영조 13, 1737년) 월 일
領政靑院君贈謚安孝沈公神道碑銘
세종이 동궁에 있을 때, 공께서 아뢰기를 지금 사대부들이 나를 보면 모두 은근한 뜻을 보내니 내가 심히 두렵습니다. 마땅히 손(관직)을 사절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하니, , 세종이 상왕에게 아뢰었더니 네 비의 집안은 상패하였으나 오직 안수 산만이 홀로 남아 있으니 마땅히 고관대작에 임명해야 할 것이라고 하므로 수산이 얼마 아니 가서 중추부로 들어왔다 - 세종실록-
공은 10대에 관직에 나아가 20대와 30대에 국가요직을 두루 거치시고 사십대 초반에 뜻하지 안은 변고를 당하시니 어찌 침통하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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