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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아스터교

조로아스터교

조로아스터교는 예언자 조로아스터(Zoroaster)의 가르침에 종교적·철학적 기반을 두고 있으며,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믿는 고대 페르시아 종교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철학자이자, 오늘날 예언자로 불리는 조로아스터(Zoroaster)에 의해 창시된 종교로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며,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은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믿는다 하여 스스로를 마즈다 예배교(마즈다야스나 : Mazdayasna)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배화교(拜火敎), 중국에서는 현교(祆敎)라고 하여 삼이교(三夷敎)의 하나로 꼽혔다.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BC 599~330)에 오늘날의 이란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까지, 서쪽으로는 페르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초기 전파 과정에서는 여러 남신, 여신 등을 믿는 고대 토착 종교와 혼합되었으며, BC 4세기 경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후에 파르티아 제국 시대(BC 247~AD 226)에 이르러 유일신 신앙이 확립되었으며,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출현하며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아 발전시켰다. 사산 왕조(AD 224~651)는 조로아스터교 이외의 종교는 박해했으며, 이 시기에 경전 《아베스타(Avesta)》가 집대성되었고, 일상어인 팔레비어 해설판이 쓰여지기도 했다.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 사상, 내세관, 선과 악으로 대비되는 세계관 등은 유대교·그리스도교·불교·이슬람교 등과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받

알멘드라도스

알멘드라도스

아몬드, 달걀, 설탕, 레몬 제스트 등을 첨가하여 만든 반죽을 작은 크기로 오븐에 구워낸 스페인산 쿠키. 아몬드, 레몬 제스트(lemon zest: 음식에 레몬의 향미를 첨가하기 위해 활용되는 레몬의 껍질)를 주재료로 하여 만든 스페인의 쿠키이다. 이때 스페인어로 알멘드라(almendra)는 아몬드 열매를 의미한다. 알멘드라스는 15세기 혹은 그 이전에 만들어진 쿠키로 간 주로 크리스마스에 즐겨 먹는다. 아몬드와 레몬 제스트, 달걀, 설탕을 첨가하여 만든 반죽을 하루 동안 건조시킨 뒤 오븐에 구워낸다. 간식으로 먹을 수 있는 달콤하고 가벼운 맛의 쿠키로, 윗부분에는 통 아몬드가 올라가는 것이 기본이다. 조리법 아몬드는 잘게 갈아 준비한다. 볼에 설탕, 달걀, 레몬 제스트, 아몬드 가루를 넣어 반죽을 만든다. 반죽 윗부분을 덮은 뒤 약 12시간 동안 냉장보관한다. 반죽은 호두만한 크기로 떼어내서 공 모양으로 성형한 뒤 설탕에 넣어 굴린다. 그런 다음 반죽 윗부분에 통아몬드를 올린다. 베이킹 팬 위에 베이킹 시트를 덮고 모양을 만들어 놓은 반죽을 올려서 177℃로 예열한 오븐에 약 8~10분간 구워낸다. 쿠키는 오븐에서 꺼낼 때까지는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하여야 하며, 식히는 과정을 통해 겉부분이 딱딱해져야 한다. 완성된 알멘드라도스는 완전히 식힌 뒤 밀폐용기에 보관한다. 영양정보 주재료인 아몬드에는 비타민 E가 함유되어 있어 항산화 작용과 면역력 강화에 좋으며, 단일불포화지방산

야로슬라블 역사지구

야로슬라블 역사지구

러시아의 서북부 도시 야로슬라블에 위치한 세계유산이다. 야로슬라블이 크게 번영하였던 시기인 17,18세기에 세워진 교회, 수도원, 극장, 시청 건물 등의 다양한 건축물들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2005년 유네스코에 의해 그 문화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러시아의 서부 야로슬라블주(Yaroslavl Oblast)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이 자리한 야로슬라블 주의 주도 야로슬라블(Yaroslavl)은 수도 모스크바(Moscow)에서 북동쪽으로 약 250km 떨어진 곳으로 볼가 강(Volga)과 코토로슬 강(Kotorosl River)이 합류되는 지점이다. 야로슬라블은 11세기 초 로스토프(Rostov) 공국의 변경 식민지로 처음 세워진 후 점차 그 지리적 이점을 살려 주요 상업지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이곳은 도로와 철로 그리고 수로가 교차되는 중요한 교통 지점이다. 13세기 로스토프 공국으로부터 독립해 자치권을 획득했으며 17세기에는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18세기 야로슬라블은 카트린느 2세(Catherine II, Catherine the Great, 1729~1796, 재위 1762-1796)의 대규모의 도시 계획에 따라 신고전주의(Neo-classical)의 영향을 받은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 지역이 번영을 누리던 17세기에는 수많은 수도원과 교회들이 세워졌다. 건물들은 야로슬라블 형식(Yaroslavl type)으로 칭해지는 건축 방식으로 지어졌는데 붉은 벽돌로 건물을 지은 후 외부를 밝은 색 타일로 장식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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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대첩

한산도대첩

1592년(선조 25)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泗川船艙)·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소식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加德島)와 거제도(巨濟島)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었다. 이런 보고를 접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은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와 연락하여 재차 출동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熊川) 방면에서 출동하였고,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49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露梁)에 이르러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의 함선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固城)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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