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통합검색

메인 주요 글

주요 아티클

경유나 중유를 연료로 하는 '디젤엔진'

압축·점화에 따라 작동하는 왕복운동형 내연기관.
디젤기관, 압축점화기관이라고도 한다. 먼저 실린더 안에 공기를 흡입, 압축해서 고온, 고압으로 한다. 여기에 액체연료를 분사하여 자연발화시킨 다음 피스톤을 작동시킴으로써 동력을 얻는 내연기관이다. 디젤엔진은 1893년 독일의 기술자 R. 디젤이 처음 만들었다. 디젤의 연료는 처음 중유(重油)를 사용했으나, 회전수 증가 등 그 개량이 진전됨에 따라서, 착화성(着火性)이 양호한 경유(輕油)를 사용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분당 4,000회전 이상에 이르는 것도 있다. 개발 초기에는 육상용(陸上用)뿐이었으나, 1930년 이후 선박, 자동차, 철도 등의 동력원으로서 쓰이게 되었다. 최초의 디젤엔진은 1922년 독일에서 만들어졌는데, 자동차에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가볍고 작았다. 그래서 이전의 낮은 출력 때문에 디젤엔진이 응용될 수 없었던 많은 분야에 사용되었다. 고속 디젤엔진은 디젤이 개발했던 저속 연소행정방식이 아니다. 연료는 압축행정이 거의 끝날 때 실린더에 분사되고, 피스톤이 사점(死點) 근처에 있는 동안 압력이 갑자기 상승하면서 급속히 연소된다. 초기 디젤엔진의 압축점화와 연료분사만이 현재의 고속 디젤엔진에 남아 있다.1940년대 중반 이후의 디젤엔진은 주로 시간당 마력당 비교적 낮은 소비비로 저급연료를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약 5,000마력의 장치에 사

마야 문명 말기의 도시, 욱스말 선 스페인 도시

마야 문명 말기의 도시로 마야 문명의 사회경제적 구조, 예술, 건축 등을 보여준다. 유카탄 반도 북부에 있는 마야 고전기 후기(600~1000)의 도시 유적이다. 유카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들 중의 하나로 전성기 인구가 2만 5천명에 달했으나 12세기부터 쇠퇴의 길을 걸었다. 유적지에는 욱스말이 정치, 경제, 종교 중심지였던 전성기의 건축물들이 남아 있는데, 마야 문명 말기의 건축과 예술의 백미로 꼽힌다. 이곳 건축물들은 특히 마야 문명 말기 푸크 양식(Puuc style)을 가장 잘 구현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의 하부는 낮고 단순하며 건물의 상부는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는 형태로, 장식 주제로는 주로 뱀, 격자무늬, 비의 신 차크(chac)의 형상 등이 쓰였다. 비의 신 차크의 상이 특히 많은데, 그만큼 비에 대한 염원이 간절했음을 알 수 있다. 욱스말은 동서 길이 약 600미터, 남북 길이 약 1000미터이며, 마법사의 피라미드와 부속 사원들은 마야 건축물 중 드물게 타원형으로 만들어졌고 높이가 38미터에 이른다. 난쟁이 마법사가 하루 만에 지었다는 흥미로운 전설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약 300년 동안 여러 차례 증축과정을 거친 것이다. 서쪽 사원의 입구 역할을 하는 거대한 차크 신의 얼굴상이 인상적이며, 얼굴의 입을 통해 사원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외벽 면에는 차크 신의 얼굴이 무수히 조각되어 있다. 총 78개의 방이 있는 수녀원 건물도 있는데, 널따란 안뜰을 사 면에서 네 개의 건물이 감싸고 있는 형태가 마치 스페인의 수녀원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건물마다 각기 다른 모양의 장식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총독의 궁전은 현존하는 푸크 양식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낮고 길게 뻗은 건물은 하부는 단순하고 상부는 화려하게 장식된 전형적인 푸크 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궁전 전면의 머리가 두 개인 재규어가 새겨진 왕좌와 100여 개에 달하는 정교하게 조각된 차크 신의 두상이 훌륭하게 만들어져 있다. 마야 유적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넓은 구기장도 있다. 높이 4미터, 길이 34미터, 높은 벽이 폭 10미터쯤 되는 공터 양쪽으로 늘어서 있으며, 벽 위쪽에는 돌로 된 고리가 달려 있다. 마야인들은 이곳에서 고무공을 튀겨 고리를 통과시키는 놀이를 했는데, 손을 쓰지 않고 어깨와 팔꿈치, 허벅지 등만 사용했다. 이외에도 거북이가 띠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는 거북이의 집, 사각형의 구멍이 여러 층으로 나 있어 비둘기 집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건물, 손상되어 일부만 남아 있는 대피라미드, 전설 속의 난쟁이를 데려다 길렀다는 노파의 집 등이 있다.

슬라이드 바로가기

전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을 벌인 우당 이회영과 그 가문

한말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여섯형제와 일가족 전체가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서전서숙' '신민회' '헤이그 특사' '신흥무관학교' '고종의 국외망명' '의열단' 등 국외 항일운동의 전반에 관여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하였으며 신채호, 이을규 등과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운동을 전개하였다. 출생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우당(友堂)이다. 1867년 서울 중구 저동에서 이조판서 이유승(李裕承)의 여섯아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의넷째 형이다. 이회영의 집안은 백사 이항복(李姮福)이 10대조 선조이며 여섯 명의 정승과 두 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로, 숙종 이후 노론의 견제 세력인 소론 출신을 배경으로하는 개혁 성향이 강한 가문이었다. 항일운동 1896년 항일의병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풍덕에 인삼농장을 운영하였으나 일본인의 계획적 약탈로 실패하였고 이상설, 이시영과 함께 을사오적(乙巳五賊) 암살을 모의하기도 하였다. 만주 용정촌 서전서숙 설립에도 참여하였으며 서울 상동교회 내 상동청년학원 학감으로 근무하면서 1907년 4월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발족하였으며,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파견을 주도하였다. 만주로 망명 헤이그 특사 실패 후 국외에 독립기지마련을 위해1910년 12월여섯형제와 가족, 노비 40여명의 일가족 전체가만주로 망명하였으며 이 때 여섯형제가 전재산(약 600억 원으로 추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으로 운용했다.이후 가족들은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鄒家街:중국 추씨 집성촌)에 정착하였으며 1911년4월 이주동포들의정착과 농업지도를 위한 '경학사'를 조직하는 한편, 1911년 5월 광복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

포토 커뮤니티

지구촌 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