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서쪽 끝까지

#2. 시베리아 횡단열차

To the Westernmost #2. Trans-Siberian Railway

러시아

by 송지수 2018-07-09 조회 619 2

마음 속에 품었던 로망이나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일이 드디어 내 눈 앞에 드리워졌을 때, 그 누구든 아마 가슴 속이 설렘으로 가득 찰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 전의 나도 그랬다. 비록 7일이 약간 안 되는 161시간이나 기차 안에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침대에 걸터앉아 시베리아의 광활한 벌판을 두 눈에 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욱 기대가 되었다. 더구나 이미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경험한 많은 여행자들, 블로거들의 글들을 많이 읽었던 터였다. 그들이 이 열차에서 만든 추억들과 비슷한 추억을 나도 만들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플랫폼에서부터 가슴이 두근댔다. 처음 보는 러시아 사람과 보드카를 마시고, 한국의 술 게임을 가르쳐 주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가만히 사색할 시간을 갖고..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마터면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평생 저주하며 살 뻔했다. 내게 먼저 다가와 준 친절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말이다.

 



내가 탈 기차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밤 11시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러시아에서 열차를 탈 때는 마치 공항처럼 짐 검사를 거쳐야 한다고 들어서 역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하지만 사람도 없고 텅 비어서 금방 짐 검사를 끝내고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사진에서만 봤던 9288 표지석이 플랫폼 정 가운데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모스크바까지 달리는 거리, 9288km. 말이 9288km지, 이 길이가 지구 둘레의 약 1/4 가량 된다고 한다. 그 말인즉슨 이 열차를 한 번 타고 세 번을 더 타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이 자리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다. 실로 어마어마했다.

드디어 기차에 올라탔다. 생각보다 의자 겸 침대도 푹신하고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3등석을 예매했는데, 방이 따로 있고 문까지 달린 1등석, 2등석과는 달리 오픈된 복도 양 옆으로 침대가 2층으로 주욱 늘어선 형태였다. 의자 밑에 짐을 넣을 수 있어서 배낭과 카메라 가방 등을 넣고, 차장에게 베개와 이불을 받아 자리를 정리하고 나니 곧 열차가 출발했다.

자정 가까운 시각에 출발을 해서 그런지 창 바깥으로 보이는 거라곤 가로등과 나무의 실루엣 정도였지만, 그래서 그런지 야간기차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낭만도 조금은 느껴졌다. 하지만 낭만이란 말은 참 배부른 말이었다. 잔뜩 센티멘탈해져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눈을 붙인 지 채 30분이나 되었을까? 새벽 두 시에 내 맞은 편 침대에 한 아줌마가 탔다. 타자마자 능숙하게 이불을 깔더니 객차 안에서 제일 큰 소리로 코를 골기 시작한다. 어린아이가 울고, 불이 꺼지지 않는다. 새벽에도 열차가 정차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다. 잔뜩 올라오는 스트레스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이어폰을 꽂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잠이 드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러다 눈이 부셔 눈을 떠 보니 다섯 시간을 겨우 잔 것 같았다.

3등석의 구조는 대충 이러하다. 복도의 오른편에 복도와 수직인 순방향 침대 2개, 역방향 침대 2개가 마주보고 있고, 복도 왼쪽에 복도와 수평인 침대 2개가 있다. 나는 복도 오른쪽 순방향 1층 자리였다. 순방향 침대와 역방향 침대 사이에는 사진처럼 작은 탁자가 있는데, 저 탁자에서 4명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신다. 때문에 내 자리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많이 부대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자리였다. 이 곳에서 서로 이야기도 하고 놀면서 정겨운 모습으로 열차에서의 일주일을 보내기를 기대했지만, 직접 겪어보니 경계가 없는 공동공간에서 24시간 같이 생활한다는 사실은 꽤 스트레스를 주기도 했다.

일단 침대가 2층이고 테이블은 1층에 있기 때문에, 2층에 자리가 있는 사람이 식사를 하는 등의 테이블을 쓸 일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내 침대에 앉아야 했다. 그 동안은 내가 누울 수도 없고, 자유롭게 뭘 할 수도 없다. '대체 그 많은 블로거들은 이런 공간에서 어떻게 그렇게 행복하게 지냈을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 기차의 생활은 원래의 기대보다는 많이 달랐다.



하나 더 힘든 게 있다면, 바로 식생활이었다. 안 그래도 움직일 일이 많지 않은 열차 안에서 마땅히 먹을 것도 많지 않았다. 다른 블로그에서 본 조언대로 열차에 타기 전 라면과 빵을 몇 개 사가고 주스와 물도 들고 갔지만, 그런 음식만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도저히 이런 생활을 어떻게 일주일 동안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남들이 좋다고 해서 나도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이런 생활도 고깝게 여기지 않고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환경에 예민하고 낯을 가리는 사람들은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막상 외국인이 내 눈 앞에 나타나고, 러시아인들은 영어도 할 줄 모르니 대체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할 지 몰라 어색하게 몇 시간을 마주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도 열차는 계속 달렸다. 끝없는 평원을 지나고, 자작나무 숲을 지나고, 유유히 흐르는 개울가 옆 들꽃이 소담스럽게 핀 언덕도 지났다.

첫 날 새벽에 탔던 맞은편 아줌마와 어색한 침묵 속의 몇 시간을 보낸 후, 드디어 아줌마가 내게 말을 걸었다. 사실 말을 걸었다기보다, 그냥 말없이 빵을 건넸다. "스파시바! (감사합니다!)" 했더니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많이 먹으라는 몸짓을 한다. 러시아 사람들은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극히 적다. 게다가 미국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영어로 대답을 하면 불쾌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간단한 러시아어 회화를 외워서 갔다. 어딜 가든 "안녕" 혹은 "감사합니다" 정도는 그 나라 언어로 하려고 하지만, 러시아에선 그렇게 외워간 것이 특히 잘 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라면 국물에 빵을 찍어가면서까지 맛있게 먹는 내가 아들같아 보였는지, 이것저것 나에게 뭔가 얘기하려고 하신다. 그럴 줄 알고 준비한 비장의 무기, 핸드폰 번역기를 꺼냈다. 군인인 아들을 보러간다는 말과 함께, 나에게 사진도 보여주었다. 나와 아줌마 사이의 어색한 공기가 사라지고, 전날 무자비하게 코를 골아서 짜증이 났던 감정들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친해진 지 얼마나 됐다고, 그 날 저녁에 아줌마가 바로 내렸다. 먹을 것도 이것저것 챙겨주고 여러 모로 감사해서, 번역기를 통해 감사하다는 말과 건강하시고 앞으로 좋은 일만 있길 빈다는, 식상한 인사말을 적어 건넸다. 그랬더니 나를 안아주면서 어찌나 고마워하던지,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히시더라. 대체 뭐가 그렇게 좋으셨을까? 아무튼 모스크바까지 간다고 하니, 공부하러 가냐고 물으신다. "니옛, 야 뚜리스뜨 (아니요, 저는 여행자에요)" 라고 하니 모스크바 말고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훨씬 좋으니 꼭 가보라고 하신다. 걱정 말라고, 다 갈거라고 얘기하고서 작별인사를 했다. 러시아에 와서 처음 친해진 러시아인과의 이별, 그 빈 자리가 꽤 많이 허전했다.

오늘 밤엔 조용히 잘 수 있을까 기대하며 누웠지만, 아줌마가 내린 자리에 탄 사람도 어김없이 코를 골았다.





그래도 어제보단 조금 익숙하게 잠이 들었다. 그런데 새벽에 인기척이 느껴져 깨 보니 웬 사람들이 내 자리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다. 엄청나게 큰 보드카가 병채 테이블에 있고, 실눈을 뜨고 보니 근육질에 엄청나게 무섭게 생겼다. 내 다리를 마음대로 탁탁 쳐서 치우고 앉아 이 사단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맞설 수 없었다. 맞섰다가는 모스크바까지 운반되는 시체가 될 것만 같았다.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서 그냥 자는 척을 했다.

오후 한 시가 되어서야 눈을 떠 보니 여전히 열차는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작은 마을 옆도 지나가고, 어제와 비슷한 듯 다른 풍경이 계속 펼쳐져 있었다.

열차는 약 1~2시간 간격으로 역에 정차하는데, 작은 역에서는 3~5분 정도 정차하고 큰 역에서는 20분에서 길게는 1시간 동안 정차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한 번 큰 역을 떠나면 다시 큰 역에 도착하기까지 5시간 정도가 걸린다. 큰 역에서는 오래 정차하기 때문에 플랫폼에 내려서 담배도 한 대 피우고, 역사로 들어가서 식량을 사가지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뭔가 움직일 수 있는 때는 하루에 두세 번 큰 역에 정차해 기차에서 내렸을 때가 유일하다 보니, 온 몸이 굳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행하는 동안 심심하면 읽으려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가져갔는데, 잘 한 선택이었다. 시간이 너무 안 간다. 반나절만에 다 읽어버리고 나니 저녁이 되었다. 오늘의 마지막 정차역을 지나 벽에 기대어 달을 바라봤다. 아마도 보름인가보다. 달이 정말 크고 밝았다. 서울과의 시차는 한 시간이니 아마 지금 서울에서도 밝은 달이 보일거라 생각했다. 내가 그리워하는 그 곳에서, 그리운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달을 보고 있을거라 생각하니 외로우면서도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사흘 째에는 울란-우데 역에서 식료품점을 찾아 이것저것 사 가지고 돌아왔다. 생각보다 생수 등 마실 것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한 번 장을 볼 때 좀 여유롭게 사야지 싶었다. 안 그래도 답답한 열차 안에서 물까지 제대로 못 마시면 정말 힘들다.

여전히 시간이 잘 가지 않는 평화로운 열차 속, 저 멀리 드디어 바이칼 호가 보이기 시작한다. 지구 상 얼지 않은 담수량의 무려 20%를 차지한다는, 면적으로는 아시아 단연 1위의 거대한 호수, 바이칼 호. 호수가 가까이 다가올 수록 설렘은 곧 경이로움으로 변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바다같이 넓으면서도 잔파도 하나 없는 그 고요함이, 정말 경이롭다는 말 밖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하필 마침 해가 질 시간에 바이칼 호를 지나가니 하늘의 색과 호수의 색이 똑같아지면서 거대한 데칼코마니가 만들어졌다. 산책나온 가족들, 낚시하는 노인들을 보며 이토록 기차에서 내리고 싶은 적이 없었다. 베개와 이불따위 없어도 좋으니, 이 거대하고 장엄한 호수 옆에 터를 잡고 하루라도 가만히 이 풍경을 감상하면 어땠을까? 모스크바 직통으로 기차표를 끊은 과거의 내 자신을 멍이 들 때까지 때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 너무나도 물이 맑아 40m 속까지도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맑은 호수. 약 2600여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데, 그 중 80% 이상은 바이칼 호에만 서식하는 고유종이다. 이 장대한 호수가 품은 생태계가 얼마나 거대한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속 수백 킬로미터의 열차를 타고도 한두 시간이 넘어서야 지나칠 수 있는 이 커다란 호수 앞에, 나는 정말로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5일째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어젯밤에 탄 무리들이 내 침대에 앉아있어 또 조금 거슬렸다. 일어나서 멍하니 앉아있자 그 중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건다. 어디서 왔냐는 둥 어디로 가냐는 둥, 이름은 또 뭐냐고 묻는다. 얘기를 하다 보니 그래도 또 친근감이 느껴진다. 자기들의 이름도 소개해 주고,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 사진으로 보여준다. 이들의 관심과 호감이 싫지가 않아 번역기를 동원해가며 얘기를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나에게 음식까지 한껏 가져다 주었다.



빵에다가 통조림에 든 돼지고기, 그리고 물을 부으면 으깬 감자가 되는 걸 가져다주었다. 저 으깬 감자 안에 돼지고기를 넣어서 마구 섞은 다음 빵이랑 같이 먹으면 맛있다고 해서 먹어봤는데, 솔직히 정말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엄청 맛있다고 하니까 다들 자지러지듯 좋아해서 사진까지 찍으라고 한다. 귀여운 사람들이다. 과자도 계속 갖다주고, 훈제 베이컨에 빵, 바나나도 갖다줬다. 바라빈스크 역에 내려서는 아이스크림도 사 줬다. 그러면서 러시아 영화는 본 적 있냐고 물어보고, 또 막 이것저것 물어본다.





이렇게 얘기를 나누고 나니 그토록 불편하고 스트레스받던 열차 안에서의 생활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친구니까 내 자리에 앉아있는 것도 괜찮고, 테이블에서 같이 음식을 먹는 것도, 모든 것이 이젠 그냥 편해졌다. 왜 나는 그동안 항상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했을까? 그것은 러시아인들이 자리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도, 배려가 없어서도 아닌 결국 내가 이들의 방식에 익숙해지지 않고 벽을 쳤기 때문일 것이다. 알고 보면 이렇게 친근하고 베풀기도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내 속에 깊숙히 자리잡은 경계심과 편견이 나를 가두고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말 놀랍게도 그 날 저녁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러시아인이 탔다. 그 사람을 번역기 삼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도 잘 안가고 지루하고 불편했던 이 열차가 어느새 너무 정다운 공간이 되었다. 여기서 만난 사람과 페이스북 친구까지 맺을 줄 어제까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플랫폼에 내려서 운동삼아 걷다가 놀라운 것을 보았다. 기차 맨 뒤쪽 끝에 바로 이런 칸이 있었던 것이다. 창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북한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평양에서 출발한 열차와 합쳐진 것일까? 평생 만나보지도 못한 북한 사람을 여기서 만나보는구나 싶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면 북한 사람을 종종 만나기도 한다던데, 난 얘기는 해보진 못했지만 어쨌든 그들을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만난 셈이 되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화장실을 소개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도 등급이 있다. 보통 여행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1번 열차와 현지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99번 열차가 있는데, 나는 99번 열차 티켓을 끊었다. 1번 열차보다 조금 환경이 열악한데, 세면대도 정말 작고 물을 받을 수가 없다. 변기는 저런 식으로 생겨서, 볼 일을 보고 레버를 당기면 밑에 구멍이 열리면서 내용물을 철길로 그냥 버려버린다. 때문에 역에 정차하기 앞뒤로 2~30분 전에는 화장실 이용이 금지된다. 샤워는 당연히 할 수 없다. 드라이샴푸를 가져가서 2~3일에 한 번 머리를 감는둥 마는둥 씻었고, 샤워는 물티슈 서너 장으로 온 몸을 닦는 것으로 대신했다. 말이 이렇지 일주일 가까이 지나면 찝찝해 죽을 것만 같다.



대체 언제 일주일이 지나갈까 했지만, 벌써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총 9288km를 달리는 동안 시간대가 7번이나 바뀌는 어마무시한 열차. 덕분에 시차적응도 자연스레 되었다. 하루에 한 번씩 한 시간이 늦어지는 식이었으니.



매일 라면에 빵으로 끼니를 해결하다가. 마지막 날에 그 동안 잘 버틴 나에게 선물을 주는 기분으로 식당칸으로 가서 고기 수프를 시켜 먹었다. 자극적인 조미료 맛 말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으니 양이 차진 않아도 참 감격스럽더라.



그렇게 멀고 먼 길을 달려, 마침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정말 오긴 왔구나, 스스로에게 대견했다. 찌들고 냄새나는 몸을 이끌고 숙소로 향했다. 빨리 샤워를 하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히 들었다.

9288km동안 총 129개의 역을 지나는 세계에서 가장 긴 단일노선 철도, 시베리아 횡단열차. 하바롭스크, 벨로고르스크, 치타, 이르쿠츠크, 크라스노야르스크, 노보시비르스크, 예카테린부르크 등 모스크바의 동쪽에 위치한 꽤 큰 도시들을 비롯한 시베리아 구석구석을 지나간다. 1등석인 룩스나 2등석인 쿠페를 선택한다면 2만 루블에서 최대 7만 루블(한화 약 35~124만원*) 의 가격을 지불하고 꽤 편안하며 안락하게 여행할 수 있지만, 3등석인 플라츠카르타를 이용해 여행한다면 단돈 1만 루블(한화 약 17만원*) 에 시베리아를 누빌 수 있다. 3등석에서는 샤워도 못 할 뿐더러 개인 공간도 부족해 조금 불편할 수는 있지만, 맞은편에 침대를 두고 부대끼는 현지인들의 친절함과 웃음이 그런 불편함을 메우고도 남을 것이다. 혼자 이어폰을 끼고 창 밖을 보며 사색하는 시간만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때는 아니다. 침실마저 오픈된 좁은 공간에서 다가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고 익숙해질 때, 다른 문화의 사람들을 마주하며 생긴 마음의 벽을 깨부수고 그들이 가진 배려심과 호의를 알아볼 수 있게 될 때, 한 층 성숙해진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로 화장실에 대해 소개할 때 언급한 1번 열차와 99번 열차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를 왕래하는 두 가지 종류의 열차다. 1번 열차는 더욱 신식이며 화장실이나 충전 등의 편의시설에 있어서도 조금 유리하기 때문에 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편이다. 99번 열차는 비교적 구식이며 따라서 시설 면에 있어서 1번 열차에 비해 조금은 열악하다 할 수 있다. 게다가 1번 열차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146시간, 99번 열차는 161시간이 걸린다. 약 15시간 정도 1번 열차가 빨리 도착하는 셈이다. 하지만 같은 등급 기준으로 1번 열차의 요금이 60% 가량 더 비싸다. 어느 쪽을 선택할 지는 개인의 취향에 달려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러시아의 철도청 사이트부터 역사에 게시되어 있는 모든 열차시간은 '모스크바 표준시'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땅 자체가 넓어 시간대가 무려 11개나 존재하며,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구간 또한 8개의 시간대에 걸쳐져 있다. 때문에 각 지방마다의 시간을 사용하면 혼돈이 있을 수 있어 러시아의 어느 지방에 있든 열차 시각을 표기하는 데는 모스크바 표준시를 이용한다.

이 글을 읽고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계획하는 분이 있다면, 딱 하나만 조언을 보내고 싶다. 적어도 바이칼 호수에서만큼은 열차에서 내려 최소한 하루를 묵으며 해질녘의 바이칼호수를 가만히 감상해볼 것.


* 18.07.09 고시환율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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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서쪽 끝까지:
2016년 5월부터 8월까지 87일간 비행기 없이 한국에서 유라시아 최서단까지 횡단하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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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웨이드 2018-07-09

    가격차이가 꽤 나네요;; 영화 설국열차가 생각난다는...ㅋㅋ 그래도 저는 3등석에서 저는 현지인들과 부대끼며 지내보고 싶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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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min 2018-07-09

    여행에선 건축물이나 음식 자체에 대한 기억도 중요하지만 사람에 대한 기억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ㅎㅎ 읽는데 제가 다 따뜻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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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reeny 2018-07-10

    헉 161시간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 나라 안에 시간대가 11개 존재한다니 여러모로 스케일이 차원이 다른 느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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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ojin61 2018-07-16

    블로그에서 보던거랑 확실히 다르네요ㅠㅠ이런 현실적인 여행이야기 넘 좋아요!! 아 그리고 군데군데 통찰력 있는 좋은 문장들이 참 많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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