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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마차로 간 미국 서부 개척 길을 자동차로 흰 돛을 연상시킨다'해서 스쿠너(Schooner)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포장마차(wagon)에는 온갖 살림살이 용품과 식량으로 가득 채우고 사이사이에 사람이 탔다.두 마리의 말이나 당나귀나 소가 끌었던 포장마차에 타는 사람은 주로 노약자나 아이들이었며 도중에 짐승이 힘들어할 땐 이들도 내려서 걸어야 했다.남자는 마차 앞쪽에 앉아 동물을 몰았고 옆자리에는 반드시 총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탔다. 이러한 모습을‘라이딩솻건(ridingshotgun)’라 부른다.이 자리에 앉은 사람이 진행 도중 악당들의 습격을 받을 때 총을 쏘며 이들을물리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다.이 말은 서부 개척시대에 우편물이나 돈 또는 귀중품을 실은 역마차(stagecoach)의 마부를 솻건메신저(shotgunmessenger)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지금은 자동차 운전석 옆자리가솻건시트(shotgun seat)이다. 당시 포장마차는 보통 두 마리나 네 마리의 동물 이끌었다.
오리건 트레일을 달린 마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바닥길이 3.3 - 5.8미터, 폭2미터 전후,깊이 1미터 정도 크기의 목재 바닥 양옆으로 철에 봉을 휘게 세우고 그 위에 두꺼운 흰 천을 씌웠다. 마차의 크기는 보통 750킬로그램에서 1.4톤 정도였다. 너무 무거우면 끄는 짐승이 오래 견디지 못하고 반대로 식량을 적게 실으면 도중에 생명이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적정 적재량의 판단이 중요했다. 서부영화에 등장한 포장마차는 대부분 말이 끌었지만 실제로는 소가 훨씬 많았다.이주민이 급격하게 늘어난 1850년대에는80퍼센트 정도의 포장마차는 소가 끌었다.말은 소에 비해 가격이 훨씬 비싼 데다 유지비도 많이 들어 여간 부자가 아니고는 사용할 수 없었다.가족수가 적은 사람은 말과 소 대신 당나귀를 이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가격이 소보다 좀 비쌌지만 당나귀는 강하고 걸음이 빠른 데다 어떤 풀이나 잘 먹기 때문에 사료비도 적게 들어 이주자들이 선호했다.
오리건 트레일은 서부로 향하는 개척자들의 이주가 시작된 직후인1849년 한 역사가에 의해 그 모습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이 무렵부터 일부 강에 다리가 놓아지고안내팸플릿도나왔으며수많은서적과논문, 영화, 연극, 시와 노래 등에 이 길이 잇달아 소개되었다.지금도 오리건-캘리포니아 트레일 협회와 와이오밍,아이다호, 내브라스카등오레곤트레일과관련있는주의박물관이연구를계속하며당시의상황을자세하게소개하고있다. 오리건 트레일은 본격적인 서부의 주가 시작되기30여 년 전인1812년 로버트 슈트 어스(Robert Stuart)란 사람이 이끈7명의 모피 상인들이 지금의 와이오밍주에서 처음으로 발견했다.그 후 1823년부터1830년대 초까지 사냥꾼과 탐험가와 모피 업자들의 이용이늘어나기시작했으며군탐험원정대와종교전도자들이뒤를 이었다.1842년엔 처음으로100여 명의 서부 행잉 주민들이 단체를 만들어 이 길을따라오레곤으로개척길에올랐다. 소규모로시작된서부행이주대열이 1943년부터1,000명을 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수가 계속 늘어나자 서부로 향하는길엔연중하얀포장마차가줄을이었다. 그리고 1869년까지50만 명 가까운 개척자들이 오리건 트레일을 타고 서부로 이동했다.
당시 이 길이 시작되는 미주리 준 인디펜던스(Independence)를 출발하여 캔자스,네브래스카,와이오밍, 유타, 아이다호주를 거쳐 오리건으로 향하는 이주자들은중서부로 흘러가는1,700킬로미터의 플래트 강관 그 지류인 스위트 워터 강을 건너고 광활한 사막을 지나 로키산맥의 서쪽 관문 인해 발2,300미터의 사우스 패스(South Pass) 의 산악 길을 넘은 후 목적지인 오리건의 위라 미트 계곡(Willamette Valley)에서 마차의 짐을 부렸다.1849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된 소문이 퍼지면서 서부로 향한 이주자는폭발적으로 늘어났다.어떤 날은500여 대의 왜건이 수백 킬로미터까지 길고 길게 이어지기도 했다.먼 지평선에는 언제나 줄에 꿴 보석처럼 하얀 포장마차를볼 수 있었다.엘도라도를 찾아 캘리포니아로 몰린 탐광 업자들이 계속 러시를 이루어 삽시간에 25만 명에 이르렀으며 한창때는 한 달에25,000여 명이 캘리 포니 아로 마차를 몰기도 했다.
자유와 기회의 땅,그리고 엘도라도는 캘리포니아의 대명사가 되었다.캘리포니아행 금광업자들은 로키산맥이 다소 완만해지는와이오밍주의 사우스 패스(SouthPass) 산길을 따라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며 이 무렵 종교적 박해를 피해 뉴욕 주에서 서부로 이동하던 모르몬 교도들도 이곳에서남쪽으로마차를돌려유타주솔트레이크쪽으로내려갔다. 솔트레이크시티는 이들이 세운 도시이다.새 중앙 템플 스퀘어에는 장엄한 모르몬교회(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와 유명한모르몬태버너클합창단(Mormon Tabernacle Choir)의 건물 등 모르몬교 관련 건물들로 꽉 차있다.모르몬교 법에 따라 솔트레이크시티에는 술집은 물론 세속적인 오락시설도 허가가 나지 않는다.금맥을 찾아1849년에 캘리포니아로 간이 주자들을 49 숫자를 또 포티나이너스(Forty-Niners)라고 부른다.샌프란시스코시 미식축구팀의 이름‘Forty-Niners’는 이해를 기념해 붙여진 것이다.
오리건 트레일은 미국을 대서양에서태평양으로확대하는문화전달에결정적인역할을담당했다. 이 길이 지금은 거의 대부분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연결하는80번과 시애틀에서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시티를 연결하는84번 고속도로,그리고에레곤주에서네브라스카주까지이어지는26번 국도로 바뀌었고 현재 옛길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은 이곳저곳 합해 약480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초기의 오리건 트레일이 지나간 자리에는125개소의 역사유적과 관광 도로 및 표지판이 당시의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오리건 트레일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 국립공원 당국을 비롯하여 국토관리 협회와 미국 삼림 보존협회,그리고 민간기구 및 옛 개인 토지 소유자 등이 합동으로 보존 업무를 맡고 있으나 이길 주변이대부분사유지이기때문에보존에어려움을겪고있다.
1869년 대륙 횡단철도가 개통되기가 지 오래 건 트레일은 미국 대륙을 동서로 잇는 가장 길고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많은 도로였다.미주리 주인 뒤 펜던트에서 시작되는 오리건 트레일은 종점인 오리건주의 윌라 미트 벨리까지 포장마차로4개월 남짓 걸렸다.당시의 오리건 트레일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도로가 아니었다.앞서간 포장마차가 지나가면서 남긴 자국을 따라가야 하는 좁고 험한 길이었다.이 자국을 따라 키 작은 관목과 억센 잡초로 덮인 광활한 사막을 지나고 때로는 강을 건너며 험산을 넘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인디펜던스 시가 출발점이 된 것은 이곳이 당시 동부에서 시작되는철도의 종점이었기 때문이다.이주민들은 우기와 추운 계절을 피하기 위해4월 중순에 인디펜던스 시를 출발,10월 초쯤 오래 건이나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는 일정을 택했다.하루 평균25킬로미터를 행진하고 해뜨기 전에 출발하여 도중에1시간쯤 휴식을 취했으며해질무렵그날의일정을마감했다. 밤을보내는곳에선마차를울타리처럼원형으로배치하고보초를세워외적의침입에대비했다.
자유와 넓은 농토,그리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가슴 부푼 이 주였지만 목적지에 도달하기가지의 노정은 영화처럼 낭만적이지 못했다.사람은 대개 걸어야 했기 때문에 진행 도중 질병과 사고로 이음모를 길 옆에 묻히는 경우도 허다했다.20명 중1명 정도는 목적지에 닿기 전 목숨을 잃었으며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된 1946년부터1969년 사이3만 명 가까이 사망했다는 통계도 있다.역설적으로 죽은 사람이 나도 물의 시체가 길 안내 역할을 하기도 했다.하루 길게20개가 넘는 새 무덤을 지나기도 하고 고장 난 왜건을 손보는데 길게는 사흘이 걸릴 때도 있었다.도중에 부족한 식량은 들소를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아 보충하고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대개25-30세대가그룹을지어이동했기때문에행진하며일으키는흙먼지도참기어려운고통이었다. 서 보행이 급증한1849년엔 하루500여 대의 마차 대열이 길게 이 이어지고1850년에는 하루에2000여명이 한 곳에 천막을 치기도 했으며 1852년6월 2일엔 24,000여 명이 행렬을 이룬 날도 있었다.
가까운 곳에 마을이 없어 보안관이나 재판관 등 치안 관계자가없었기때문에일행중에서대표를뽑고자치규정을만들어질서를유지했으며어쩌다길인근에주둔하는 군부대의 보호를 받기도 했다.영화에 자주 나오는 장면처럼 원 주민의 습격은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길 안내나식량등원주민들로부터도움을받았다. 행진 도중 결혼 행사와 출산도 있었다.삭막한 노정에 오락거리가 없어 한 시간 정도 낮 휴식시간엔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며 기분을전환하기도 했다. 특히‘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이 나오,스잔나(Oh, Susanna), 올드 블랙 조(Old Black Joe) 등 향수를 달래는 노래가 애창되었다.민요 작가인 스티븐 포스터의 작품 등 대부분의 미국 민요나 군가가오리에 곤 트레일이 붐비기 시작한1840년대부터 막을 내릴 무렵인1869년 사이에 발표되었다.
1840년대부터 오리건으로 향하는 이주자의 급증은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 원동력이었다.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급전하자 타개책의 하나로 의회가 연방정부에 대해 실업자의 서부 진출 대책을 마련토록 촉구했다. 의회의 지원을 받은 정부가 이주민들에게 일정 면적의 토지를 무료로 주기로 약속하자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다.오리건으로 향하는 이주민들이 몰려들자1859년 미합중국은 오리건을 주(州)로 선언하고 이주민에게 4년간의 거주와 경작을 조건으로 기혼자에게 320에이커를, 그리고 미혼자에게는160에이커의 토지소유권을 부여했다.
미국 역사에서 서부로 향한 본격적인 길을 최초로 뚫은 개척자(pioneer)는 대니얼 분(Daniel Boone)으로 기록되고 있다.개척자, 탐험가, 사냥꾼, 그리고 변경 개척민 등이 언제나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다.너구리 꼬리가 달린 쿤스 킨 캡(coonskin cap) 털 모자를 쓰고 다녔던 분은 지금도 미국 최고의 민간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1734년 펜실 베이니 어주에서 태어난 분은41세 때인1775년 혼자 애팔래치아산맥의좁고험한컴버랜드골짜기(Cumberland Gap)를 넘어 켄터키주까지 산길을 열었다.그리고 지금의 켄터키주 렉싱턴시 동남쪽 50여 킬로미터 지점에 마을을 건설한 뒤 분스 조로(Boonesborough)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곳에2년 남짓 살기도 했다.뒷날20여만 명의 서부 이주민들이 이 길을 따라서 부로 갔다.이 무렵부터1820년 초까지 동부에서 테네시주로 이어지는윌더니스로드(Wilderness Road)와 미주리 주인 뒤 펜던트에서 뉴멕시코주 산타페를 연결하는 산타 페트 레일(Santa Fe Trail) 등 내륙 길이 몇 가닥 열리기도 했다.다니엘 분이 혼자서 개척한 길이 무려500여 킬로미터에 이른다.
미국 여행을 하면서 오리건 트레일 생각을 오래전부터 머리에 담고 있었으나 기회가 닿지 않아 숙제로 남겨두었다가 나이가 더 들기 전에 결행해야겠다는 생각이들어관련자료와카메라와갈아입을속옷몇장등가벼운행장으로샌프란시코행밤비행기에올랐다. 이번 여행에는 캐나다에 있는 막내가 함께했다.세어 제이(SanJose)에 있는 둘째 아이 집에서 이틀을 쉬며 시 차를 조정했다.제대로 살피려면 시발 지점인 미주리 주인 뒤 펜던트에서 종착지인 오리건 시가지지 가야겠지만 주요 흔적이 네브래스카,네바다, 유타, 그리고 와이오밍 주에 집중돼있기 때문에 닷새 동안4개 주만 탐방키로 하고 가장 먼 네브라스카주부터시작해돌아오는순서로일정을잡았다. 4개 주 중에서도 오리건 트레일과 관련 있는 흔적은 와이오밍주에 가장 많이 남아있다.네브래스카주의 목적지까지 2,000킬로미터가 넘기 때문에 다음날부터의 시간을 벌기 위해 첫날은1,400여 킬로미터를 달렸다.이날의 긴 드라이가 닷새 동안 찾아볼 데를 한 곳도 빼지 않고 다 돌아보게 해주었다.
와이오밍주와 경계선에서 가까운 네바다주서쪽에서부스코츠블러프(Scottsbluff) 시동 남쪽60킬로미터 거리에서 부 이주자들 이랜드 마크로 삼았다는코트하우스앤드제일록스(Courthouse and Jail Rocks)와 여기서40여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심니 록(ChimneyRock)을 먼저 찾았다.높이가121미터인 코트하우스 앤드 제일 록스와91미터인침니록은평지에우뚝솟아있어10킬로미터의 먼 거리에서도 볼 수 있어서 부이 주자들에게 확실한 길잡이 구실을 했을것 같았다.워낙 넓은 곳이어서 평지로 느껴졌지만 실은 해발1,300여 미터나 되는 고지였다.코트하우스란 이름은 바위의 모습 이성을닮았다 해서1845년 이곳을 지나가던 한 이주자가 붙인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심니 록은 엎어놓은 그릇 위에 굴뚝 모양의 돌기둥이 우뚝 솟아있는 바위이다.이 두 바위는2006년 네브래스카주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다.이곳은 오리건과 캘리포니아로 가는 이주자들과 모르몬교도,그리고 말을 탄 사람들이 지나간 길에서 거리가 가까웠다.
촬영 후 바로 와이오밍주를 향해 길을 서둘렀다.100킬로미터 서쪽에 위치한 두 번째 목적지인 구언 우지(Guernsey) 마을에는 밤8시 넘어 닿았다.다음날들른구언지마을인근의오레곤트레일러트(Oregon Trail Ruts)는 사암(砂岩) 산을 넘어가는 바윗길이었다.사람이 올라가기에도 쉽 잖은 바위산을 길이800미터에 폭 0,6 - 1.83미터 크기로 깎고 함께 행진하던 이주자들이 모두가 달라붙어 한대씩 한 대씩 마차를밀어올렸다. 이들은 본래 가까운 거리에 있는 플래트 강을 건널 예정이었으나 강폭이 넓은데다늪지여서이산길을택할수밖에없었다. 지금도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이 길은 아무리 보아도 마차가 지나가 지나가기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좁고 험하다.길이 되기30여 년 전인1812년부터 사냥꾼과 선교사,그리고 모피 상인들이 가끔이 바위산을 걸어서 넘나들었다.주변의 바위에는 이주자들이 새긴 이름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오리건 트레일러 틀에서 서쪽으로1킬로미터 정도 거리에 연회색의 사암 절벽이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레지스터 클립(Register Cliff)이라고 적힌 안내간판을 길 옆에 세워놓았다.이 앞을 지나는 이주자들에게 긴요한 길잡이가 되었던 이 절벽엔 당시 사람들은 물론, 최근까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새긴 이름과 짧은 글이100미터 가까운 벽을 빼곡히 메우고 있다.이 절벽은 개척자들이 오리건 방향으로 제대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레지스터 클립은1969년 와이오밍 주 역사기념물로 지정됐다.
서쪽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여 더글러스 마을의 개척자 기념박물관의 들러30여 분서부개척시대에의전시물을돌아본후사막길250여 킬로미터를 더 달려 다음 목적지에 이르렀다.주변에는 집이라곤 한 채도 없는 벌판이었다.중부 와이오밍 주 사막에 우뚝 솟아있는 거암 인디펜던스 로크(Independence Rock)은 옆으로 길게 뻗은 거암이다.호주의 우르르(Uluru, Ayers Rock)를 닮았다.서부행개척자들에게훌륭한길잡이가돼준 높이 40미터, 폭260미터 그리고 길이가580미터인 이 바위는 와이오밍 주 역사기념물로 지정돼있다.멀리 뒤로 로키산맥이 뻗어있고 바위 앞으로 개척자들이 건너야 하는 스위트 워터(Sweetwater) 강이 흘러간다.주변에 눈에 띌만한 표적이 아무것도 없어 바위가 더 돋보였다. 이곳을 통과한 많은 개척자들이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아다.바위 이름 인디펜던스는 미주리주를 출발한 개척자들이 눈이 내리기 전에 목적지 오리건에 닿으려면 늦어도 미국 독립기념일인7월 4일쯤에는 이곳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그 바램을담아 붙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마 위에서 서남쪽으로30킬로미터쯤 더 가는 곳에 데블스 게이트(Devil’sGate)라는 협곡이 있다.높은 산맥의 중허리가 마치 칼로 쪼갠 듯 갈라져 있다.그곳까지 길이 나있지 않아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높은 언덕 위 전망대에서 보아야 했다.가까이 갈 수 없어 좀 아쉬웠지만 워낙 큰 산맥 이어서 조망에는지장이 없었다.협곡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여섯 채의 집이 있고 몇 마리의 검은 소가 보였다.서부 이주자들이 실제로 이 협곡을 통과하지는 않았지만,이곳을 지나 서부로 가는 이주민과모르몬교도들에게요긴한랜드마크역할을담당했다. 협곡 앞으로 흘러가는 스위트 워터 강이 협곡에 부딪히면서 만들어진 협곡이다.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사우스 패스(South Pass)는 오리건 트레일전 도정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사우스 패스는 이주자들에게서 부로의 진입을 확인시켜주는 관문이다.북미 대륙의 물줄기를 동서로 가르는 로키산맥의 콘티넨털 디바이드(Continental Divide)가 통과하는 곳이기도 하다.끝없는 사막 길을 힘겹게 거쳐온 서부 개척자들은 여기서부터 태평양으로 흘러드는물을 마시게 됐다.더욱이 이 길이 시작되는 계곡에서1867년 금이 발견되었다.소문은 삽시간에 번졌고1868년엔 좁은 계곡에2,000여 명이 넘는 사우스 패스 시티(South Pass City)라는 마을이 생겼다.그러나 금 생산량이 너무 적어 붐은 급속하게 식었고1870년까지 주민들이 모두 떠나 마을은 유령촌이 되고 말았다.그 뒤 1890년대와1900년대에 다시 몇 명의 탐광 업자들이 곰 채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그 뒤로 끔 채굴은 없었다.그러다 최근 들어 수십 명이 다시 마을로 돌아와 살고 있다.지금의 마을은 이름이 애틀랜틱시티(Atlantic City)이다. 마을 비탈에 가물에 콩 나듯 무질서하게 새 집이 몇 채 있을 뿐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가 더 많이 남아있다.
사우스 패스 길을 물어보려 마을에 들어갔으나 거리에 나다니는 사람을볼수없고초입에서여자한사람과마을안으로들어가60대 남자 한 사람을 만난 게 전부였다.사우스 패스는1812년대에 한 사냥꾼이 처음으로 이곳을 지나간 뒤 알려지게 되었다.이 길이 미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곳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수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였다.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와 약15킬로 남짓한 사우스 패스는 옛날의 굴곡이 심한 비포장길 그대로이다.사우스 패스는 해발2,300미터의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마을 비탈에 가뭄에 콩 나듯 무질서하게 새 집이 몇 채 있을 뿐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가 더 많다.
이번 여행에서 거친 네바다,유타, 와이오밍, 그리고 네브래스카 등4개 주 중 네브래스카를 제외한3개 주는 모두 사막이 대부분인 주들이다.앞에 멀리 보이는 산은 두어 시간을 달려도 좀처럼 가까이 다가서지않아거리를가늠하기어려웠다. 귀갓길에 넘은 시에라 네바다(SierraNevada) 산맥의 짙은 녹색 수프루스 숲이 풍요롭게 보였으나 단조로운듯하면서도 매 순간 바뀌는사막 풍광은 종일 달려도 싫지 않았다.네바다주는 면적이 한반도보다 넓은28만 6천 제곱킬로미터이지만 인구는294만여 명에 지나지 않으며 그나마63만여 명이라 스베 가스에 몰려있다.유타주도22만 제곱킬로미터 면적에305만여 명이 살고 있고 와이오밍주는 면적25만 제곱킬로미터에 주민은58만 명에 불과하다. 이들 세주는 도로가 수십에서 백 킬로미터 가까운 직선이 대부분이다.솔트레이크 호수 왼쪽에 펼쳐진 소금 벌고 레이트 솔트레이크 데저트(Great Salt Lake Desert)는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로 광활하다.남북 길이 약 210킬로미터, 폭이 넓은 곳은60킬로미터에 이르고 무려10,360제곱 킬로미터인 면적은 경상남도와 같은 크기이다.
백인들이 미국 땅에 들어온17세기 초까지 미국 땅에는 길다 온 길이 없었다.먼 옛날부터 원주민들이 사냥이나 다른 부족들과 상거래를 위해 다니던 오솔길이 고작이었다.서부로 향하는 이주민들이 이 길로 가다가 길이 끊어지면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길을만들며 진행했다.앞서간 사람들이 표지판을 남기거나 안내서를 만들어 뒤따르는 이들을 도와주기도 했다.끝없이 이어지는 황량한 사막을 지나고 강과 험준한 산을넘어야 했다.로키와 시에라 네바다주 산맥은 석 달 이상의 여정에 치친 이들에게 절망의 장벽이었다.수심이 깊은 강을 만나면 새 길을 찾아 멀리 돌아가야 했다.옐로 스톤 고지에서 발원한 플래트 강은여러주를통과하기때문에몇차례나건너야하고와이오밍주의스위트워터강과스네이크강도이들을힘들게했다. 물이 귀한 사막은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고속도로와 국도변에는 그 길이 지난날 오리건 트레일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표지판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있다.미국 대륙을 동서로 연결하는 격자형의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는1956년 아이젠 하워 대통령의 제의로 만들어졌다.그는1919년 초급 장교 시절 그가 워싱턴 D.C.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군용 차량 다를 인솔하는데62일이나 걸린 경험을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대통령 당선 후 바로 의회의 동의를 얻어 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했다.미국 의회는 그의 공적을 기려1973년 미국의 고속도로를 ‘Dwight D. Eisenhower Highway’로 명명했다.
서부 개척자들이 태평양 연안 목적지에 도달하기가 지 넉 달 걸린 오리건 트레일을 자동차로 달려보았다. 편도 구간은 그들이 간 거리보다 짧았지만 왕복한 여행이어서 만만찮은 노정이었다.닷새 동안5,011킬로미터를 달렸다.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잇는 대륙횡단거리 4,842킬로미터보다169킬로미터 더 긴 거리이다.사막이 너무 넓어서일까 몸이 밀리 정도로 강하게 부는 바람도 소리가나지 않았다.먼 지평선에 번져가는 낙조의 아름다움은 의외의 선물이었다.광활한 사막의 고요함이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어쩌다 스치는 목장의 소떼가 죽은듯한 사막에 생명의 존재를 알게 해주었다.
“서부로 가라 젊은이들이여.그리고 나라와 함께 힘차게 성장하라"라며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실의에 빠진 미국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뉴욕 트리뷴지의 창업자 호레이스 그릴리(Horrace Greeley)는 고난과 희망의 노정인 오리건 트레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은 짧은 문장으로 규정했다.“작은 물방울이 모여 개울을 이루고 개울이 합쳐져 대하가 되었다.이 길은 사람과 동물과 기술의 합작품이다.지금도 옛 흙길 그대로인 사우스 패스에서 우리는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이곡권태명
오리건 트레일
포장마차
포장마차에 실은 생필품
사막의 직선도로
코트하우스 앤드 제일록
침니 록
오리건 러츠(돌산길 자국)
레지스터 클립(바위 절벽)
이주자들이 벽에 새긴 이름과 연도
인디펜던스 록
스위트워터 강
데블스 게이트
사우스 패스 마을로 가는 길
사우스 패스 마을
플래트 강
사막에 있는 마을
와이오밍 주 사막
폐업한 사우스 패스 마을의 금제련소
유타주의 소금벌
소금벌 위를 달리는 이주자 대열(와이오밍 주 박물관 자료)
사우스 패스 흙길
모르몬 교회
시에라 네바다 산맥
모르몬 태버너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