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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바닷바람이 양 뺨을 강타해도 우리의 여행은 계속된다!
꽁꽁 얼어버린 블라디보스톡 바다 위에서 인생 노을을 마주한 이야기
[지난 러시아 여행기 보기]
[러시아 여행기 1편] 블라디보스톡에서 새해를 맞이하다
[9박 10일 여행 코스]
[7. 마약 등대]
마약같은 마약 등대?
러시아 여행 넷째 날,
나와 친구는 이 날 하루를 통째로 과감히 투자해서 마약 등대에 다녀오기로 했다.
사실 마약 등대의 공식 명칭은 토카레프스키 등대다.
그런데 왜 마약 등대라고 부르냐고?
러시아어로 '마야크'(маяк [mayak])가 '등대'라는 뜻이 있고,
또 이 단어가 한국어의 '마약'과도 발음이 비슷해서
한국인 관광객들이 편의상 토카레프스키 등대를 마약 등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니 굳이 직역하자면 '등대 등대'가 되겠다.
등대의 원래 이름보다 마약 등대라는 별칭이 워낙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하기도 하고
또 등대의 풍경이 정말 마약처럼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기도 하니
나도 이 포스팅에서는 마약 등대라는 이름을 더 많이 쓰도록 하겠다.
마약 등대로 가는 길
블라디보스톡 시내에서 마약 등대까지는 택시를 타고 20여 분을 가야한다.
모든 관광지가 대부분 도보로 이동이 가능한 블라디보스톡에서 마약 등대는 관광지 치고 꽤 거리가 있는 편에 속한다.
그래서 시내에 있는 다른 관광스팟들보다는 확실히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덜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난 오늘 이 포스팅을 읽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마약 등대의 매력을 알리고 마약 등대를 적극적으로 영업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마약 등대 본격 홍보 포스팅인 셈이다.
숙소에서 막심 어플로 택시를 잡고 마약 등대까지 이동했다.
참고로 가는 길이 꽤 험하다.
구불구불한 산길 같은 비포장도로를 넘고 넘어서 가야하기 때문에
비싸고 맛있는 것을 먹고 난 직후에 택시를 탄다면
아까운 음식물들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 수가 있다.
평소 멀미가 심한 편이라면 멀미약을 미리 준비해놓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난 비위가 강한 편인데도 길이 하도 구불구불해서 막판엔 살짝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렇게 꼬불꼬불 길들을 달리고 달려서 마약 등대에 도착했다.
마약 등대(토카렙스키 등대) 기본 정보
주소 블라디보스토크 프리모르스키 크레이 러시아 690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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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는 등대 바로 앞에 내려주지 않고 등대로 가는 길목 입구에서 내려준다.
거기서부터 등대까지 쭉 뻗어있는 길을 따라 걸어가면 된다.
남극인가 북극인가 블라디보스톡인가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두 가지에 놀란다.
첫째, 어마무시한 바닷바람이 온 몸을 강타한다.
블라디보스톡에 온 지 나흘 째 되는 날이라 추위에는 어느정도 익숙해질 때도 됐다고 생각했는데
절대 아니다.
러시아의 겨울 추위는 겪어도 겪어도 당최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마약 등대는 7월 달에도 우리나라 초겨울 날씨 같다고 하니 등대를 방문할 예정이라면 옷차림에 유의해야한다.
둘째, 극지방에 온 것과 같은 착각이 든다.
온 바다 전체가 다 얼어있다.
얼마나 추우면 바다가 다 얼까 싶은데 정말 바다가 얼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추위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이 사진을 보내니
가족들이 지금 혹시 북극에 가있는 거냐고 했다.
이렇게 거대한 깨진 얼음 조각들이 바다 곳곳에 있어서 마치 극지방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추위로만 봐서는 극지방 못지 않을 것 같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에 신기해서 자꾸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이렇게 넓은 바다가 다 얼어있다니.
얼음의 색깔이 투명하고 예뻐서 크리스탈 같았다.
처음에는 언 바다 위를 걷는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얼음이 깨지면 어떡하지 걱정이 됐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다 아무렇지 않게 언 바다 위에서 걷고 뛰는 것을 보고
나도 용기를 내어 조금씩 발을 디뎌보았다.
아주 멀리까지 나가지만 않으면 안전한 것 같다.
등대로 걸어가는 길에 얼어있는 바다의 풍경이 아름다워 카메라 셔터 누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여름에는 이곳 해변에서 일광욕이나 서핑 등 물놀이도 즐긴다고 하는데
사실 난 겨울의 모습만 봐서 그런지 도저히 여기서 일광욕을 하는게 상상이 안 간다.
진정한 겨울왕국이다.
매서운 바닷바람을 뚫고 걸어가다보니 저 멀리에 등대가 조그맣게 보이기 시작했다.
위의 사진에서 왼쪽에 조그맣게 보이는 것이 바로 마약 등대다.
등대를 찾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 한국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뿐만 아니라 대체로 블라디보스톡 시내에서 한국인 관광객들을 잘 보지 못했었는데,
아마도 겨울엔 날씨 때문에 블라디보스톡을 찾는 사람들이 적은가보다.
춥기는 해도 겨울 러시아만의 황홀한 진풍경들을 볼 수 있는데..
내가 좀 더 많이 홍보를 해야겠다.
차가워진 손을 핫팩으로 녹이며 바다 위를 걷다보니 어느새 등대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톡의 땅끝 지킴이, 마약 등대
짜잔! 블라디보스톡의 땅끝 지킴이, 마약 등대 되시겠다.
러시아 극동 최남단의 가장 오래된 등대인 마약 등대(토카레프스키 등대)는
1876년부터 약 140년 동안 블라디보스톡의 땅끝 토카렙스키 만을 지키는 등대다.
평소에는 육지와 등대 사이에 바닷물이 차 있어서 등대까지 걸어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썰물 때가 되면 육지가 드러나 모세의 기적이 재현되는 장소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따뜻하고 온화한 계절에 해당되는 얘기고
이토록 추운 겨울엔 등대 주변으로 바다가 모두 얼어있어 등대까지 가는 길을 마음대로 걸을 수 있다.
빨간색 지붕이 인상적인 등대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바다 한 가운데에 있어 하늘과 바다와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이 참 운치있다.
고독하게 바다 가운데 홀로 서 있지만 그래서 더욱 고고해보인다.
겨울에 블라디보스톡에 간다면 마약 등대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주변 풍경도 마치 미셸 공드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몽환적이다.
자차를 가지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아까 택시에서 내린 곳에도 주차할 공간들이 있었고 등대 바로 앞에도 사람들이 차를 세워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이와 함께 온 부모들도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는 바닥이 얼어있는 곳이 많아서인지 이렇게 썰매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얼음길에서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하긴, 얼음썰매 타기엔 정말 이보다 좋은 곳이 또 없다.
이 사진 뒷 배경을 보면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산길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는 길이 약간 험하기는 하지만 이런 풍경에 대한 대가로는 충분히 감수할 만 하다.
문득 다른 계절에 왔다면 이곳이 또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진다.
검색해서 사진들을 찾아보니 다른 계절에도 충분히 아름다운 곳임은 틀림없다.
한참 구경하고 걷고 사진을 찍다보니 어느새 또 해가 질 준비를 하고 있다.
한겨울 블라디보스톡, 일몰 시간이 정말 이르다.
그만큼 해가 떠있는 모든 순간들이 소중해지는 곳이다.
[8. 해양공원의 노을]
블라디보스톡 넘버 원 관광지, 해양공원
블라디보스톡에서 일몰을 제대로 즐기려면 해양공원에 가야한다.
나와 친구는 다음날 일몰을 보러 해양공원으로 향했다.
해양공원은 아르바트 거리 끝에 위치해있다.
구글맵에 검색할 땐 해양공원에 있는 놀이동산인 Karusel을 검색하거나
아르바트 거리를 검색해서 거리가 끝나는 지점으로 걸어가면 된다.
해양공원 기본 정보
주소 Batareynaya Ulitsa, 1, Vladivostok, Primorskiy kray, 러시아, 690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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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공원과 해양공원에 있는 놀이동산은 혁명광장, 니콜라이 2세 개선문 등을 비롯해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다.
KBS 2TV 예능 프로그램 <배틀트립> 블라디보스톡 편에서 해양공원이 소개된 이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더욱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여름에는 해수욕을, 겨울에는 꽁꽁 언 바다를 볼 수 있으며
양질의 킹크랩과 곰새우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해서 먹을 수 있고
주변에 맛집과 맛있는 디저트를 판매하는 예쁜 카페들이 많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명실상부 블라디보스톡 넘버 원 관광지다.
그래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주 목적은 보통 해산물을 먹기 위해서거나
근처 아르바트 거리에서 맛있는 음식과 디저트를 먹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해양공원을 가는 이유는 하나였다.
언 바다 위로 지는 아름다운 태양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물론 우리도 해양공원에서 킹크랩과 디저트를 먹기는 했다 ㅎㅎ)
해양공원 노을 사냥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옷차림을 단단히 해야한다.
해양공원도 바닷가이기 때문에 마약 등대처럼 바닷바람이 거세다.
양말을 하나씩 더 신고 핫팩을 두 개씩 더 챙기고 비장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해양공원도 다른 블라디보스톡의 관광지들처럼 시내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한 곳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좋다.
일몰이 또렷하게 잘 보이려면 날씨 운이 따라주어야 하는데 다행히 이 날도 하늘이 맑았다.
가는 도중 길거리에서 모피코트를 입으신 할머님들을 마주했다.
단체복을 맞춰입으신 것처럼 모두 비슷한 코트를 입고 계셔서
(이런 말씀 드리면 실례일지 모르지만) 정말 귀여우셨다.
혁명광장에서 10분에서 15분쯤 걸어가니 해양공원에 있는 놀이동산이 나타났다.
블라디보스톡 해양공원 놀이동산 = 용마랜드?
지난 편 포스팅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블라디보스톡은 정말 알록달록한 색채들로 가득한 곳이다.
놀이동산에서 처음으로 보였던 회전 놀이기구부터 화려한 색깔로 눈을 즐겁게 했다.
아쉽게도 추운 날씨 탓에 겨울엔 놀이공원이 운행을 중단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갔을 때는 놀이동산에 아무도 없었다.
놀이기구들도 눈 속에 파묻혀 있었고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눈길에 사람 발자국이 하나도 없었던 걸로 미루어 보아
최근에 이 곳을 찾은 방문객은 우리를 제외하고는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아주 고요하고 한적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보니 유일하게 운행하고 있는 놀이기구가 보였다.
대관람차였다.
사진은 마치 아주 푸르고 맑고 따뜻한 여름날처럼 보이지만
이 날 최저기온은 영하 20도까지 떨어졌었다.
들숨과 날숨을 타고 시베리아의 매서운 칼바람이 온 몸의 모세혈관까지 얼려버리는 듯한 추위였다.
그 엄청난 추위가 사진에는 다 담기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는 하다.
나는 여행에서 딱히 몸을 사리지 않는 편이다.
뭐든 도전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여행지에서 할 수 있는 액티비티는 다 해보려고 하는데
영하 20도의 추위에서 앞 뒤가 휑하게 뻥 뚫린 대관람차를,
그것도 아주아주 처언천히 움직이는 대관람차를 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한 바퀴 다 타고 내려온 뒤에도 내 심장과 허파와 기타 모든 장기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안 탄다고 조금도 후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대관람차는 눈으로만 즐기기로 했다.
그래도 한화로 2,000원이 채 안 될 만큼 이용 가격이 상당히 저렴하고
대관람차 꼭대기에선 먼 바다까지 한 눈에 담을 수 있으며,
알록달록한 대관람차 칸에 타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앉아 쉬어가는 것도 꽤 낭만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름에 오면 꼭 타볼 만한 놀이기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겨울엔 아무래도 무리다.
해양공원의 놀이동산은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고
놀이동산보다는 '동네에 있는 조그만 유원지' 정도의 타이틀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용마랜드처럼 버려진 폐놀이공원 같아서 굉장히 분위기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조용한 것은 겨울이어서 그랬던 것이고 여름엔 사람들로 북적이는 유명한 관광명소다.
예쁜 곳에 왔다면 인증샷은 필수다.
바다가 땅이 되고, 땅이 바다가 되는 곳
놀이공원을 다 구경하고 해양공원의 바닷가로 향했다.
언 바다는 마약 등대에 갔을 때 본 적이 있어서 감흥이 덜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넓고 탁 트여서 더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좀 더 넓고 거대한 바다의 풍경을 보고싶다면 해양공원에 오기를 추천한다.
얼어있는 바닥에 구멍을 뚫어 얼음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호수나 강가에서 얼음낚시를 하는 것은 봤어도 바다 한 가운데에서 하는 것은 처음 봤기 때문에 신기했다.
이렇게 넓은 땅이 사실은 땅이 아니라 바다라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바다는 땅이 되고, 땅이 곧 바다가 되는 신비로운 곳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바닥이 평평하지 않고 굴곡지고 울퉁불퉁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바닥이 자잘자잘한 것은 사람들의 발자국 때문이 아니라
파도 모양과 물결을 따라 그대로 얼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 순간을 잊지 않고 소중히 기록하기 위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내 모습이다.
SNS에 이 사진을 업로드 하니 친구들이 <남극의 눈물> 다큐멘터리 촬영감독 같다고 했다.
아까 방문했던 놀이동산의 대관람차도 보인다.
지금 내가 땅이 아닌 바다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걷는 이 곳이 여름에는 전부 바다라는 사실이,
내가 딛고 있는 이 바다의 저 밑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해양 생물들이 숨쉬며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머릿속에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새삼스레 기분이 이상해진다.
나는 이제 '눈 덮힌 바다 위로 걸어본 경험'에 대한 소중한 이야깃거리를 하나 가지고 있는 셈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서 주인공 엘사가 맨 땅에 발을 내딛자
땅이 전부 얼음으로 변하고 그 자리에 얼음으로 된 왕국이 세워지는 장면이 생각난다.
또 한 가지 재밌는 것은
바다가 도대체 어디까지 얼어있는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수평선을 향해(!) 마음껏 달려가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내가 갔을 때 바다의 저 쪽 끝, 아주 먼 곳까지 간 사람들도 많았다.
움직이는 조그만 점처럼 보이는 것들이 뭔가 했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람들이었다.
멀리서 보니 먼 곳에서 걷고 있는 사람들이 수평선 위에 떠있는 작은 마침표들처럼 보였다.
바다에 왔으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점프샷이다.
인증샷도 찍고 친구와 둘이서 <겨울왕국>을 패러디한 영상들도 서로 찍어주고
한참을 웃고 떠들다보니 아까보다 부쩍 어두워진 것 같다.
안 그래도 추운데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기온이 더욱 급격하게 떨어지니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들도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당시에 얼마나 바람이 거셌는지는 아래의 영상에서 녹음된 바람 소리를 들어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해양공원에서 인생 노을을 보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바다는 점점 어두워져갔지만,
나와 친구는 아름다운 노을빛을 보기 위해 꿋꿋하게 추위와 맞서 싸웠다.
추위와 '싸웠다'는 표현이 딱 알맞다.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뼛속까지 시린 바닷바람이 강하게 불어와도 끄떡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왠지 모를 전우애를 느끼며 그렇게 일몰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이 조금씩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직 완전한 노을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무엇이든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인고와 희생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건물들도 조금씩 태양빛을 받아 붉게 변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그토록 기다렸던 붉은 태양과 마주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얼어붙은 바다 위로 붉은 빛을 띠며 지는 태양이라니.
이 순간만큼은 블라디보스톡이 아닌, 완전히 다른 행성에 온 느낌이다.
달걀의 노른자처럼 샛노란 태양이 온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멍하게 해가 지는 것을 바라봤다.
사실 아무런 말도 필요 없었다.
누군가는 친구와, 누군가는 아이들과, 그리고 또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소중한 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는 태양과
태양 주변으로 온통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파랗게 얼어있는 바다와
바다 위에 형성된 파도 모양의 얼음 물결들,
그리고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이 순간을 공유하고 있는 나의 오랜 친구.
완벽하다는 말은 이런 순간에 쓰라고 존재하는 단어다.
아무리 많은 곳을 여행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긴 시간동안 여행을 했다 하더라도,
돌이켜보면 머릿 속에 진하게 남는 순간은 몇 되지 않는다.
열 두 나라를 여행했어도 막상 기억에 남는 나라는 한 두 군데밖에 없을 수 있고
일주일 동안 여행했어도 7일 내내 모든 순간순간들이 마음 속에 저장되는 것은 아니다.
아주 특별한 몇 장면만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추억으로 기억된다.
돌이켜보면 2018년 1월 블라디보스톡 해양공원에서 노을을 봤던 이 순간이
나에겐 지금까지 깊은 여운을 주는 잊지 못할 '그 순간'이었다.
[훠궈 먹다 떠난 한겨울의 러시아] 여행기는
3편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