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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미티 산맥의 최고봉 마르몰라다와 그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비엘 달 판을 걸었다.
파란 하늘이 다시 반겨주는 코르바라에서의 두 번째 날. 우리는 마르몰라다에 가기로 했다. 마르몰라다는 돌로미티의 최고봉으로, 무려 3,343m라는 거대한 높이를 자랑한다. 가장 높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마르몰라다는 돌로미티에서 큰 상징성을 가진 존재다. 정상에 오르면 빙하도 볼 수 있어 색다른 볼거리가 있는 곳이다. 특징만 보면 돌로미티 여행 코스에 고민 없이 올려야 하는 곳이지만, 이번에도 대중교통편에 발목을 잡혔다. 돌로미티 산맥이 세 지역에 걸쳐 있는데, 세 곳의 대중교통 체계가 모두 다르다. 코르바라와 말가 치아펠라(마르몰라다 행 케이블카가 이곳에서 출발한다)는 서로 다른 행정 구역에 있어 환승이 필수인 데다가, 말가 치아펠라를 오가는 버스도 한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마르몰라다를 포기하기엔 아쉬운 상황에, 택시를 타고 말가 치아펠라까지 향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마르몰라다를 오른 후 시간 맞춰 버스를 타고 이동해 비엘 달 판 코스를 따라 트레킹한 후, 막차를 타고 코르바라로 돌아가는 일정이다. 숙소 호스트가 택시를 불러준 덕분에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요금 걱정은 뒷전에 두고, 편안한 시트에 앉아 바깥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두눈에 열심히 담았다.
차분했던 마음은 케이블카 탑승장에 도착하며 초조해졌다. 카드로 택시비 결제를 시도했는데, 깊은 산골짜기라 그런지 카드 단말기의 통신이 되지 않아 번번히 결제에 실패했다. 근처 ATM기도 꺼져 있어 혼란에 빠졌다. 결국 약 10분 정도를 거슬러 내려가 마을에서 결제를 하고 다시 케이블카 정류장으로 올라왔다. 예상치 못하게 부딪힌 난관에 서둘러 케이블카에 올랐다. 마르몰라다 정상까지는무려 2,000m에 가까운 높이를 상승하다 보니 긴 시간이 걸렸다. 정상에 다다를수록 짙은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정상에는 돌로미티의 최고봉의 위엄을 알리는 문구가 바닥에 새겨져 있다. 최고봉은 호락호락하게 풍경을 보여주지 않았다. 짙은 구름으로 인해 정상 아래 빙하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만 간신히 보일 뿐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빙하로 내려갔다. 사람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게 눈 위에 포가 깔려 있고, 양 옆으로 산비탈과 협곡을 따라 빙하가 가득했다. 마르몰라다는 여름에도 기온이 영하권을 유지하므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지만, 우리가 다녀간 후 약 한 달 후에 이상 기온으로 빙하가 붕괴되어 수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충격이었다.
짙게 깔린 구름은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가려졌던 풍경도 모습을 드러냈다. 최고봉에 서 있는 만큼 풍경을 우러러 보는 게 아닌, 내려다 보는 구도가 만들어지다 보니 전경이 한눈에 담겼고 산들이 아담하게 느껴졌다.
풍경을 구경하다 보니 이미 대중교통 시간이 훌쩍 지났다. 비엘 달 판 코스로 이동해야 하기에 우선 내려가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기로 했다. 대부분 그냥 지나치는 와중에 멈춰선 차들이 있었지만 언어 소통에 번번히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히치하이킹에 실패하고, 몇 시간 후에 다시 있는 버스를 마냥 기다릴 바엔 마르몰라다에 한번 더 올라가 풍경을 한 번 더 보고, 꼭대기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까지 먹기로 했다. 케이블카 패스가 있어서 가능한 결정이었다.
그렇게 예상과 달리 오랜 시간을 마르몰라다에서 보낸 후, 오후 세시 경에 버스를 타고 페다이아 호수로 이동했다. 정류장에 내리면 도로 옆으로 비엘 달 판 코스로 올라가는 가파른 오르막이 나온다. 길 폭도 좁아 조심해서 올라야 한다. 하지만 경사가 급한 만큼 먼 거리를 오르지 않았는 데도 근경은 곧 원경으로 바뀌었다. 페다이아 호수는 작은 보석처럼 보이고, 푸른 빙하들이 군데군데 박힌 마르몰라다가 눈에 들어왔다. 난구간을 헤치고 올라가니 훨씬 완만하고 걷기 좋은 길이 나타났다. 비엘 달 판 코스에 완전히 접어들었다.
돌로미티의 최고봉 마르몰라다를 곁에 두고 초록빛 초원의 복판을 걷는 기분은 마치 하늘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대한 공룡의 뼈마디처럼 군데군데 굴곡진 구간은 그 지형이 신비하게 느껴졌다. 코스의 한중간에는 하늘과 맞닿은 것 같은 산장이 있다. 그 산장에서 챙겨온 빵을 먹으며 잠시 쉬었다 간다. 다시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흐려졌지만, 매혹적인 전경은 감출 수 없었다. 한쪽은 빙하가 가득한 마르몰라다, 한쪽은 초록빛 풀로 뒤덮인 비엘 달 판, 그 가운데 절묘한 페다이아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풍경은 이 산장에서 당장 하루를 보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산장 이후로 남은 구간을 걸으며 파쏘 포르도이로 향한다. 마치 서킷처럼 산골짜기에 굽이친 도로가 예술이다. 파쏘 포르도이에 내려왔을 땐 벌써 저녁 7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파쏘 포르도이는 숙소와 레스토랑 등 여행자 시설로 쓰이는 건물 몇 채가 모여 있는 곳이다.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숙소를 코르바라로 바꾸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시간에 버스도, 지나가는 차들도 없어 결국 숙소 호스트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을에서 택시가 넘어오는 동안 카페에서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몸을 녹인다. 메뉴판을 보다 눈에 들어온 야거테Jagertee)가 차 종류인 줄 알고 주문했다. 그런데 한 모금을 마시니 보드카처럼 강력한 알코올이 온 몸에 퍼진다. 알고 보니 독일 상남자들이 마시는 차란다. 강력하게 훅 들어오는 알코올의 펀치에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차가운 몸이 조금씩 녹았다. 그렇게 추위를 피해 있다 보니 택시가 왔다. 마르몰라다에 갈 때 탔던 그 기사님, 그 택시였다. 비록 돈은 많이 깨졌지만 그 순간에는 구세주를 만난 것 같이 반가웠다. 우리를 도와준 숙소 호스트와 택시 덕분에 잊지 못할 트레킹을 하며 계획했던 일정을 무사히 소화했으니 결코 아까운 지출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