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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친숙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며느리(양귀비)와 당나라 현종의 러브스토리다. 1,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당나라 수도였던 시안(과거 장안)에는 이들과 연관된 유적지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화청지(华清池)다. 화청지는 목욕을 좋아하는 양귀비를 위해 현종이 지은 온천 휴양지다. 화청지에 남겨진 재밌는 이야기를 따라가봤다.
첫번째, 현종과 양귀비 이야기
현종은 당나라 6대 황제다. 712년에 왕위에 올라 45년간이나 당나라를 통치했다. 당나라 최대의 태평천하를 구사했지만 재위 후반에는 며느리 양귀비를 후궁으로 삼고 도교에 빠지는 등 정사를 소홀히 하여 결국 반란(안록산의 난)으로 쓸쓸하게 노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이 이야기는 때로는 아름다운 로맨스로, 때로는 추악한 불륜으로 묘사되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이들의 사랑을 명시 <장한가>로 남겼다. <장한가>는 중국 대표 공연 중 하나로 지금도 <화청지>에 가면 볼 수 있다. 입장료는 꽤 비싸지만 표를 구하기 힘들 정도로 유명하다.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
天長地久有時盡
此恨綿綿無絶期
"하늘에서 만난다면 비익조가 되기를 원했고
땅에서 만난다면 연리지가 되기를 바랐지
하늘과 땅이 장구해도 끝이 있건만
이 한은 끝없이 이어져 다함이 없네'
- <장한가> 중에서-
현종은 황후 무혜비가 죽은 뒤 한 여인에게 눈길을 준다. 바로 자신의 13번째 아들인 수왕의 부인, 양귀비(본명 양옥환)였다. 특히 음악을 사랑한 현종은 그녀의 음악적 재능에 매력을 느꼈다. 양귀비도 야망이 넘치는 여인이었다. 황제 계승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남편보다 능력있는 남자를 선택한 것이다. 현종은 처음에는 며느리를 취한다는 죄책감을 느꼈던지 그녀를 일단 려산의 도교사원으로 보냈고, 몇 년 뒤 정식 후궁으로 들였다. 현종의 나이 61세, 양귀비의 나이 27세였다.
인생의 말년에 찾아온 젊은 여인과의 사랑에 현종은 정사도 잊었다. 양귀비는 현종을 등에 엎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양귀비의 가족들은 그녀를 등에 엎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특히 사촌오빠 양국충의 전횡은 극심했다. 그러나 이미 양귀비에 눈이 먼 현종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절도사 안록산이 장안에 왔다. 양귀비가 그를 수양아들로 삼으며 총애하자 양국충과 안록산의 권력다툼이 생겼다. 안록산은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유명한 '안록산의 난'이다. 반란군은 양귀비를 죽였고 현종은 눈물로 이를 허락했다. 38세의 양귀비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이후 현종은 아들에게 왕위를 넘겼고 양귀비를 그리워하다 5년뒤 쓸쓸하게 죽음을 맞는다.
화청지는 그들이 사랑하던 장소였다. 현종은 목욕을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화청지를 만들었다. 화청지는 지금도 따뜻한 온천물이 나오는 곳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양귀비가 목욕을 좋아한 이유는 그녀의 심한 겨드랑이 냄새 때문이다. 궁녀들은 그녀를 목욕시킬때면 코를 막았는데 그럴 때마다 양귀비는 가차없이 궁녀들을 학대했다. 다만 현종만은 다행인지 지독한 비염으로 그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들의 사랑은 정말 천생연분이 아니었을까. 특히 화청지는 꽃이 피는 계절에 가면 중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화청지 앞 광장에 설치된 현종과 양귀비의 동상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해당탕
두번째, 장제스와 서안사변 이야기
장제스는 중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중화민국의 1대부터 5대까지 총통을 역임했으며 모택동과는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화청지 뒷편에는 중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서안사변'이 일어난 '오간청'이 있다.
국공내전이 한창인 1936년 장제스는 오간청에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공산당 토벌작전에 몰두하고 있었다. 당시 열세에 있던 공산당을 박멸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을 계획했다. 하지만 그의 부하 장쉐량은 의견이 달랐다. 그는 공산당 토벌보다 만주사변으로 영향력이 커진 일본을 막는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그는 공산당과 손을 잡고 일본을 함께 몰아내길 바랬다. 장쉐량은 반란을 일으켜 장제스를 연금시켰다. 1936년 12월 12일 서안사변이다. 12.12사태라고도 불린다. 서안사변으로 인해 장제스는 제2차 국공합작에 사인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에게는 행운이었다. 공산당은 당시 전력이 약했는데, 서안사변으로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공산당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 만약 서안사변이 없었다면 장제스는 그때 공산당을 토벌했을 지 모른다. 그러면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또한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도.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서안사변이 중국 현대사를 바꿔놓은 건 분명하다.
장쉐량의 최후는 어땠을까.
10년간 공들였던 공산당 토발작전이 서안사변으로 끝나자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가택연금 시킨다. 장제스는 1949년 국부천대할 때도 대만으로 장쉐량을 데리고 갔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옆에 두고 죽을 때까지 괴롭히고자 한 것이다. 장쉐량은 1993년이 되어서야 연금에서 풀려났다. 그 사이에 그는 반 실명이 되는 등 몸이 망가졌다. 그 뒤 하와이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다 2001년 사망한다.
재밌는 일화가 있다. 장쉐량은 대만에서 연금 생활 중 장제스의 생일날 시계를 선물한다.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 연금을 풀어달라는 의미였다. 장제스는 답례로 낚싯대를 선물했다. 아직 멀었으니 세월이나 낚고 계시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서안사변은 장제스에게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사건인 것이다.
화청지 좌측에 있는 오간청 입구
시안사변의 무대, 오간청
장제스가 묵었던 침실
세번째, 웃지 않는 미녀 포사 이야기
패망에 여인이 등장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중국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상나라 모두 미녀에 의해 나라가 멸망했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모두다 믿기는 어렵겠지만.
주나라가 동주와 서주시대로 구분되게 된 데에도 한 여인이 등장한다. 바로 주나라 유왕의 후궁, 포사다.
포사는 좀처럼 웃지 않는 미녀였다. 어느 날 궁녀들이 실수로 비단을 찢게 되는데 포사는 비단 찢는 소리에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유왕은 궁궐의 비단을 모두 찢게 하며 포사를 웃게 했다. 비단 찢기에도 싫증난 포사는 봉화에 불길이 솟자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또 한번 박장대소한다. 그러자 유왕은 그녀의 미소를 보고 싶어서 수시로 거짓 봉화를 울렸다. 거짓봉화에 지친 병사들과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포사와 유왕은 반란군에 목숨을 잃는다. 천금매소(천금을 주고 웃음을 산다)가 여기서 유래됐다.
평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천자의 권위는 약해졌다. 수도를 서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이를 기점으로 동주시대가 끝나고 서주시대, 즉 춘추시대가 열렸다.
화청지를 마주하고 려산(2,437m)이 있다. 려산은 도교성지이자,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내려다 본 산이다. 현종이 양귀비를 보낸 도교사원이 있기도 하다. 려산 봉우리에는 포사의 봉화대가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 중턱까지 간 뒤 600여미터의 계단을 오르면 좀 더 수월하다. 하지만 케이블카에 내려 봉화대까지 오르는 600미터도 쉽지 않다. 거짓 봉화에 속아 이 높은 산까지 수차례 뛰어 올라 왔을 병사들을 생각하니 어찌보면 반란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2,700년전 봉화대의 모습은 아니지만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돌아보고, 더불어 서안 도시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보기 좋은 장소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리면 사원이 보인다. 봉화대는 여기서 600미터를 걸어올라가야 한다.
산 속의 호수
포사의 봉화대가 보인다
봉화대에서 내려다본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