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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여행기 작성

느긋하게 걸어봐야 볼 수 있는 풍경들
: 제주 올레길 10코스, 최남단해안로
모슬포항에서 해안가를 따라 목적지인 ‘송악산’을 향해 느긋하게 걸어갔다. 도보로 1시간 30분(약 5~6km)가량 소요되는 거리다. 인적 드물고 차들만 쌩쌩 달리던 낯선 곳이었지만 쾌청한 날씨 덕분에 이곳의 모든 풍경들이 친숙하게 느껴졌고, 혼자 걸어도 두렵지가 않았다. 또한, 가는 곳마다 다채로운 풍경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서귀포의 해안가 풍경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보적인 풍경을 지녔기 때문에 제주도 여행 시, 하루 이틀쯤 서귀포 해안가를 걷는 일정을 포함시키곤 했다. 성산읍이나 중문, 안덕면 등 매번 그 장소를 달리 했지만, 한 번도 실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이처럼 서귀포는 독특한 지형과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예술, 문화를 품고 있는 곳이다. 천천히 걷다 보면 이러한 장소들을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될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면 마치 보석같은 공간을 찾아낸 듯한 기분이 든다.
이날 걸은 곳은 제주올레 10코스의 일부 구간이자, 근대의 아픈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의도치 않았지만, 발 가는대로 걷다 보니 이러한 장소들을 종종 마주하게 되었고, 안내문 등을 통해 이곳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알아갈 수 있었다. 이러한 여행을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고 하는데 ‘다크 투어리즘’은 전쟁, 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큰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평화와 인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교훈을 얻기 위한 여행을 일컫는 말이다. 이 일대에는 알뜨르 비행장 활주로, 제주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 일제 지하 벙커 · 알뜨르 비행기 격납고, 제주 셋알(섯알)오름 일제 동굴진지 · 제주 셋알(섯알)오름 일제 고사포 진지, 제주 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 진지 등 일제치하의 아픈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무수연대 터
모슬포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무수물'이라 불린 장소를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은 암반으로 뒤덮인 갯가로 밀물 때 바닷물이 들이치면 마치 어린 아이들이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조 세종 때 이 일대에 무수(茂首)연대가 있었다 한다. '연대'는 구릉이나 해안에 위치한 통신수단을 말하며, 산 정상에 설치된 봉수대와 그 성격이 유사하다. 별장 1인, 직군 2인이 하루 24시간을 6번으로 나누어 해안선을 지키며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통신하며, 날씨가 나쁠 때는 봉군들이 달려가 차례로 연락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산방산 인근에는 '산방연대'가 있는데 이곳은 꼭 한 번 방문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운진항 개척자 허창현 기념 소공원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가파도·마라도 정기여객선 선착장이 보이는 곳에 '운진항'이 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바다를 바라보며 걸어왔지만, 광활하고 푸른 바다를 더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어서 운진항 방파제를 따라 쭉 걸어가 보았다.
이 일대에는 '운진항 개척자 허창현 기념 소공원'이 있다. 커다란 노래비에는 '해녀의 뱃노래' 가사가 새겨져 있고, 그 왼쪽엔 허창현 선생(1989∼1974 · 대정읍 상모리)의 공적 약사가 적혀 있다. 허창현 선생은 제주도에 최초 현대연극 도입과 자립금융체제 토대를 다지고, 대정지역에 종자와 농산물 장기 보관 저장 기술 보급, 대정원예 화훼 농업기반 구축, 전 재산을 쾌척해 이곳 운진항 개발에 힘쓰는 등 대정읍 발전에 크게 공헌하셨다고 한다.
▼ 해녀의 뱃노래 노래비 (2014년 12월 16일 /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주민들이 세움)
'해녀의 뱃노래'는 대정지역 해녀들이 배를 저어 바릇잡이(얕은 바닷가에서 보말, 게, 소라 등을 잡는 활동) 일터를 오갈 때 당시 유행하던 형석기 작곡 “대한팔경”에 허창현 선생이 가사를 붙여 부르게 한 노래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녀의 뱃노래
운진항 추진 위원회장 허창현
1
삼천리 금수강산 평화의 탁원이요
한라산 높아높아 이강산 정기로다
(후렴) 이어도사 이어도사 이어 이어 어어 이여도사나2
태평양 넓은바다 황해를 끼어있고
한라산 밑바다엔 무진의 보화로다3
모슬포 운진항은 한국의 중보로다
우리의 운진항은 자랑의 항구로다4
만경창파 저먼바다로 배떠나간다
날물에 출렁 들물에 출렁 출렁 출렁 배떠나간다5
어제밤에 오신임을 한배싣고 배떠나간다
선창가에 부딪히는 파도물새들이 잠을깬다6
삼사월의 긴긴날도 석달열흘 백일이요
동지섯달 긴긴밤도 석달열흘 백일이라7
저먼바다 섬사이로 구름만끼여도 요내간장 타는가슴
어느제란 돈벌어다가 우리자녀 중학 대학 시켜줄까8
운진항 만들어서 해양발전 이룩하자
어서어서 만들어서 우리향토 부흥하자
▼ 해녀의 뱃노래 원본
▼ 허창현 선생 내외 사진
▼ 장래의 운진항 설계도
▼ 가파도·마라도 정기여객선 대합실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최남단해안로 120 (하모리 646-20)
하모 해수욕장
운진항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자그마한 규모의 ‘하모해수욕장’이 나온다. 마치 비밀 해변처럼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으며. 인근에 잔디밭과 숲도 있어서 독특한 느낌을 자아낸다. 한편에는 너른 초원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제주마 가족을 표현한 청동상이 있다.
▼ 가족, 2014, 김상현 작가
하모해수욕장에서 송악산까지는 혼자 걷기엔 조금 외로운 길이 쭉 이어진다. 양쪽으로 너른 밭이 펼쳐져 있으며, 중간중간 산책로가 끊기는 부분에서는 갓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그러다가 눈처럼 새하얀 꽃들이 가득 핀 모습을 보고 궁금한 마음에 다가갔다. 땅 위로 드러난 열매(정확히는 뿌리)를 보고 깜짝 놀랐는데 이건 ‘무’가 아닌가? 평소 즐겨 먹는 무가 이런 모습으로 자라나고, 또 이렇게 예쁜 꽃이 필 줄은 몰랐다.
대정읍 특산물 ‘마늘’
어느 지점부터 바람에 향긋한 마늘 냄새가 실려 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광활한 마늘밭이 나타났다. 이곳 서귀포시 대정읍은 전국 마늘 생산량의 10% 이상을 차지할 만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마늘 주산지라고 한다. 이때가 5월 초~중순이었는데 마늘 수확이 한창이었다. 아직 기계화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작물이라 20여 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수확부터 건조까지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곧 장마 소식이 있어 더욱 분주한 모습이었다.
모든 농사가 고되고 어렵지만, 마늘 농사 또한 무척 손이 많이 가고 힘든 작업이라 한다. 게다가 농촌 고령화로 점점 일손이 부족해지고 인건비까지 크게 올라 농민분들의 시름이 크다고 한다. 이 시기에 서귀포시 공무원 등이 파견돼 마늘 수확을 돕기도 했다. 매년 6월 초~중순에 ‘대정 암반수 마농 박람회’와 '대정 마늘 직거래 장터'가 열리니 이 시기에 제주 여행을 한다면 한 번 방문해서 신선한 햇마늘을 구입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쯤에 지도앱을 켜서 위치를 확인했지만, 여전히 송악산까지 1시간가량 걸어가야 했다. 이 다음엔 어떤 풍경이 나타날가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