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훈자에서 할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빨리' 깨닫는 일이다.
난 불행히도 훈자 여행이 끝난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훈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저 '훈자표 햇살'과 '훈자표 공기'를 온 몸 깊숙히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온전하게 훈자를 즐기는 방법이다. 일찍 알았다면 난 훈자에서 조급해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았을텐데.
여행이 숙제가 될 때가 있다. 그 지역에서 유명한 장소와 맛집은 다 가봐야 숙제를 끝낸 듯하다. 하루종일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래야 여행인 것같다. 하지만 숙제가 필요없는 여행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훈자는 바로 그런 곳이다.
그러나 나는 몸이 안 좋았고 불안했다. 사춘기 소녀처럼 모든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나는 여전히 미생(未生)의 여행자임을.
그래서 나의 훈자여행은 고해성사처럼 부끄럽고 부족하다.
여행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면 훈자 여행은 나란 실체에 조금 더 가까이 가게 해준 여행이었다.
파수 빙하
훈자는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나와 맞지 않았다.
먼저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타슈쿠르간에서부터 몸 상태가 안좋았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훈자에 오면 좋아질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훈자는 화타(삼국지에 등장하는 전설의 명의)처럼 나의 병을 씻은 듯이 낫게 해 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훈자에 온 뒤로 몸은 더 안좋아졌다. 매일 현기증과 구토, 오한에 시달렸다. 밤새 잠 못이루는 날이 많았다.
야심차게 예약한 훈자 숙소 또한 맞지 않았다. 숙소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넓은 정원이 있는 숙소는 깨끗했다. 친절한 스태프가 늘 여행자들을 챙겨줬다. 무엇보다 큼지막한 방 창문으로 7,788m의 라카포시 설산이 하루종일 보였다. 햇살에 따라 달라지는 라카포시 풍경은 그림이 따로없었다. 이런 멋진 풍경을 매일 2만원에 볼 수 있다니 5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다.
훈자 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라카포시 설산
하지만 위치가 문제였다.
훈자는 훈자밸리로 둘러싸인 지역 전체를 부르는 말이다. 보통 알리아바드와 카리마바드가 해당된다.
알리아바드는 현지인 동네다. 교통의 중심지라 이슬라마바드, 소스트 등 다른 지역으로 가는 버스가 출발한다. 반면 카리마바드는 여행자거리에 가깝다. 옛날 훈자 미르왕이 살던 궁전이 발틱포트를 비롯해 분위기있는 카페, 게스트하우스, 기념품 숍 등이 많다. 그래서 배낭 여행자들은 대부분 카리마바드에 머문다.
나는 좀 더 현지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 알리아바드에 숙소를 잡았다. 하지만 알리아바드는 생각보다 여행 인프라가 부족했다. 깨끗한 식당이나 카페가 없었다. 더욱이 숙소는 산 중턱에 있어 700m 가량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보통 때라면 문제없지만 몸상태가 좋지 않다보니 이 언덕은 만리장성보다 길게 느껴졌다. 숙소에서는 조식만 가능하기 때문에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매일 한번씩은 무조건 이 길을 걸었는데, 그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어린 소녀들조차 씩씩하게 걸어가는 길이지만 당시 나에게는 만리장성보다 긴 길이었다
음식을 포장해오다
알리아바드에서 구입한 유심은 3일 만에 개통이 됐고, 숙소 전기는 하루에도 수시로 예고없이 꺼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녁에 한두시간 뿐이지만 온수를 사용할 수 있는 점이다. 사실 인도, 네팔 등 인프라가 열악한 지역을 여행할 때 흔히 겪는 일이다. 새로울 것도 없다. 하지만 극도로 예민한 상태에서는 사소한 일에도 불만스럽고 짜증이 났다. 자연히 라카포시 설산도 눈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설산을 배경으로 하는 운동장
알리아바드 풍경
카리마바드 풍경
카리마바드 카페에서는 훈자밸리를 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알리아바드에서 카리마바드까지 운행하는 차량. 움직이는 자체가 놀랍다
훈자는 배낭여행 3대 블랙홀이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마성의 매력을 가졌다는 의미다. 이집트 다합, 태국 카오산로드가 해당된다. 특히 해마다 4~5월이 되면 훈자에는 살구나무가 지천에 열려 살구꽃 향이 가득하다. 여행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기다. 말만 들어도 당장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여행지인데, 나는 이곳에서 불만이 가득한 여행자였다.
반면 훈자에서 만난 여행자들은 하나같이 '훈자어천가'를 부를 정도로 훈자 매력에 빠져있었다.
제주도에서 1년을 살았다는 네덜란드 청년은 한달 동안 훈자를 여행 중이다. 그는 처음에는 카리마바드에 있다가 더 깊숙하고 조용한 훈자 시골 마을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돌아갈 비행기 조차 예약하지 않았다. 60대 독일 여성도 마찬가지다.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는 다리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이슬라마바드에서 훈자까지 자전거로 왔기 때문이다. 오는 길에 몇 번을 넘어졌지만 그녀는 훈자 여행을 멈출 생각이 없다. 벌써 3개월째 여행 중이다. 이쯤되면 훈자 매직(magic)이라 불러도 될 것 같다.
그럴 수록 훈자에 동화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더욱 화가 났다.
하지만 내가 마음을 내려놔야 훈자 매직이 온다는 걸 그때는 결코 알지 못했다. 미생의 여행자에게 훈자는 가르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