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天水)는 란저우, 가욕관 등과 함께 감숙성의 대표적인 실크로드 도시다. 허난성 낙양(洛阳), 산시성 서안(西安, 옛 장안)에서 출발한 실크로드는 천수, 란저우, 장액, 돈황 등 감숙성을 거쳐 신장 자치구 투르판과 우루무치로 이어진다.
서안에서 고속철로 1시간 반 거리인 천수는 진(秦)나라 발상지다. 주나라 효왕은 말을 키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시종 비자(非子)에게 천수 땅을 영지로 하사했다. 진나라는 변방에서 시작됐지만 개혁 정책으로 힘을 키워 진시황에 이르러 중국 첫 통일 왕조를 연다.
삼국지 시기 천수는 제갈량이 강유 장군을 얻은 곳이자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성어를 낳은 가정전투가 벌어진 장소다.
천수는 시인의 도시이기도 하다. 안사의 난 이후 두보는 먹고살 길을 찾아 47세에 천수에 와서 반년을 지냈다. 천수에서 지은 두보의 시에는 처량하고 절절한 감성이 가득하다.
천수박물관에 전시된 제갈량의 북벌장면
천수고성에 있는 북벌 조각상
또한 천수는 중국의 시조라 불리는 복희씨(伏羲氏)의 고향이다.
복희씨는 중국 삼황오제 중 한 명이다. 기원전 2800년 경에 살았고 팔괘를 만들고 목축을 가르치고 결혼 제도를 만들었다. 우리가 단군왕검을 뿌리라 여기는 것처럼 중국은 복희씨를 자신들의 뿌리라 여긴다. 복희는 여와를 부인으로 맞는다. 하지만 여와는 복희의 친동생이다. 여화는 복희의 구혼을 계속 거절했지만, 더이상 구혼을 거절하기 어렵자 자신을 잡으면 혼인을 하겠다고 했다. 여와는 나무 둘레를 돌며 복희를 피했지만 복희는 뒤로 돌아 여와를 안게 되고 둘은 부부가 된다.
복희묘
복희씨
복희와 여와의 하반신이 서로 꼬여있는 모습
천수에는 복희묘가 있다. 사실 복희는 신화속 인물이기에 실제 묘라기 보다는 복희를 기리는 사당이다. 복희묘는 원나라 때 처음 세워지고 명나라때 재건된 것으로 해마다 정월이면 이곳에서 제사가 열린다. 복희묘 뒷쪽에는 천수 박물관이 있는데 복희에 관한 자료 뿐만 아니라 제갈량의 북벌 도시 답게 삼국지 유물도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아찔한 암벽 잔도의 맥적산 석굴
복희묘를 본 뒤 맥적산(麥積山) 석굴로 향했다. 맥적산 석굴은 보릿단을 쌓아놓은 것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문석굴, 막고굴,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 4대 석굴에 꼽힌다.
맥적산 석굴은 천수 시내에서 45km 가량 떨어진 맥적산 봉우리에 있다. 복희묘 앞에서 두번 버스를 갈아타고 2시간 만에 맥적산 석굴에 도착했다. 입장료는 셔틀 버스표를 합쳐 우리 돈 4만원 가량이다. 중국 유적지는 철저하게 등급(A)으로 관리된다. 5A는 가장 높은 등급의 유적지로 입장료도 비싸다. 맥적산 석굴은 5A 유적지다.
버스에서 내려 석굴까지는 다시 완만한 오르막길을 10여분 가야한다. 중국은 문화재 관리를 위해 유적지 입구를 매표소에서 멀게 해놓는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불편하지만 문화재 보호 관점에서 보면 꽤 본받을 만한 시스템이다. 길 양 옆으로는 우리나라 등산로처럼 약재와 각종 기념품을 팔고 있다. '치마(骑马)?'(말 탈래요?)라고 말을 건네는 마부들도 보인다. 굳이 말을 타고 갈 정도의 거리는 아니지만 호기심에 이끌린 아이들 몇 명은 말 위에 올라타며 즐거워한다.
저 멀리 맥적산 석굴이 보였다.
맥적산 석굴은 194개의 석굴을 포함해 석상, 천불 등 총 7200여 구의 불상이 있다. 석굴안에 새겨진 글에서 5호 16국 시대 중 요진(384~417)에 축조됐다는 내용이 나와 건축 시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
중국에서 석굴을 많이 봤지만 맥적산 석굴 모습에 또 다시 감동스럽다. 사실 가장 놀랐던 건 암벽 표면에 지그재그로 만들어놓은 잔도다. 잔도는 중국 특유의 건축방식이다. 절벽에 인공적으로 만들어놓은 길로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잔도를 사용했다. 지금의 잔도는 콘크리트로 보강해 1984년부터 공개된 것이고, 그 이전은 목재로 만들어졌다. 맥적산 절벽 곳곳에 작고 네모난 구멍들이 숭숭 뚫려있는데 바로 옛날 나무 잔도의 흔적이다.
맥적산 석굴. 수직절벽에 만들어놓은 잔도가 압권이다
옛날 잔도의 흔적
그런데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수직으로 된 절벽에 무려 14층에 이르는 잔도를 올라가야 한다니 쉽게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겉에서만 석굴을 본 뒤 그대로 내려가는 여행자들도 많다.(내부 입장을 안하는 티켓도 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래도 역시 올라가기로 한다.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수는 없는 일이다.
그나마 오르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구분되어 있어 다행이다. 막상 계단에 오르니 발 아래 보이는 천길 낭떠러지 풍경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심호흡을 크게 하며 한발짝 한발짝 신중하게 내딛는다. 암벽에는 한 사람이 겨우 웅크리고 들어갈 만한 좁은 석굴이 벌집처럼 나있다. 창살 틈으로 석굴안을 들여다보면 작고 우아한 불상들이 가득 보인다. 불상을 바라볼 수록 두렵던 나의 마음도 조금씩 평온해지는 듯했다. 아마도 실크로드를 걷던 지친 이들도 이곳에서 나처럼 평온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비공개 석굴안에 보이는 불상
조금씩 평정심을 찾으며 올라가다보니 어느새 13호 석굴인 동애대불(東崖大佛)이 가까이 보였다. 무려 157m의 아미타 부처님,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새겨져있다. 사실 송나라때 보수되면서 원형적인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불상으로 남게 되어 아쉬움을 준다. 이는 서애대불(西崖大佛)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장쾌한 진령산맥을 마주한 불상은 거대함 만으로도 충분히 웅장하다. 그리고 불상에는 수많은 석공들의 땀과 눈물이 남아있다. 이름없는 수많은 석공들은 아슬아슬하게 줄에 매달려 돌을 다듬으며 부처님의 미소를 조각했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생계 수단으로 한 일이었지만 단순히 돈벌이로만 해석할수는 없다. 순수한 불심(佛心)이 없었다면 아마도 버틸 수 없었을 고된 삶이었을 것이다.
동애대불
동애대불을 지나면 9호 석굴 회랑이 나온다. 북주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7개의 감실마다 독특한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신기한 건 윗부분에 검게 그을린 자국이 있다는 것인데, 당나라때 지진과 전쟁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이곳에 숨어 불을 뗀 흔적이다. 둔황 막고굴 처럼 맥적산 석굴또한 평범한 이들이 삶을 이어나간 희망의 장소였다고 생각하니 감동이 느껴진다. 실크로드를 여행할 수록 확신이 든다. 실크로드는 단순한 길이 아니었음을. 실크로드는 희망이자, 삶의 공간이었다.
석굴회랑
제4호굴
석굴에서 바라보는 진령산맥줄기
천불회랑을 지나면 맥적산 석굴에서 가장 크고 높은 곳에 있는 제4굴에 다다른다. 맥적산의 높이가 142m인데 제4굴은 84m 지점에 있다. 제4굴의 감실 양옆에는 눈이 부리부리한 금강역사상이 지키고 있다. 드디어 맥적산 꼭대기에 올라왔다는 홀가분함에 이제서야 눈앞에 첩첩산중으로 펼쳐진 진령산맥의 장관에 시선을 뺏긴다.
제 5굴을 지나면 이제부터는 서쪽 편으로 내려가야 한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때가 오히려 더 아찔하고 무서웠지만 석굴의 감흥 덕분인지 낭떠러지 절벽길이 더이상 무섭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알수 없는 큰 용기가 생겨나고 있다.
내려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