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특별자치도 지역의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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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설악산 종주,한계령에서 출발해 설악동까지. 첫날은 한계령에서 올라 안개 속을 하염없이 걸은 서북능선 길이다. 9.8km 한계령휴게소->서북능선->끝청->희운각대피소
비가 왔는 데도 출발했다. 구름속을 걷는 듯 안개에 휩싸인 서북능선을 걸었다. 설악에서만 피는 꽃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고 신비로움이 가득한 산길이 내내 이어졌다. 힘겨우나 신비로웠다. 잠깐 열린 하늘에 구름이 폭포처럼 설악 능선을 타고 쏟아지는, 꿈에도 잊지 못할 풍경을 마주했다. 설악을 올라야만 볼 수 있으니 고됨을 달게 즐길 수 있다.
혼자였으면 가지 못했을 길, 5명의 산 벗과 떠난 1박 2일의 설악산 종주다. 10년 만에 설악을 넘겠다고 버스를 탔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속초(한계령) 버스에 탑승한 시간은 7시 반. 동서울터미널은 리모델링 중이라 어수선한 분위기다.
동서울에서 첫차는 06:30분, 그다음 차가 07:30분이다. 7시 반에 출발하기에 조금 일찍 만나 아침을 먹었다. 터미널 앞의 포장마차에서 김밥 한 줄과 너무나 오랜만의 설악산 산행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국수 한 그릇에 말아 후루룩 들이켰다. 여기에서 산행 중에 먹을 김밥을 사서 각자의 배낭에 넣었다.
버스 안은 금요일인데도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로 만석이다. 동서울에서 출발한 버스는 인제를 지나 한계령에 우리를 내려주고 흘림골, 오색을 들렀다 속초까지 간다. 설악산은 어디를 올라도 가벼운 산행이 아니므로 자동차 운전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동서울터미널에서 한계령까지, 2시간 10분이 소요된다.
강원도로 향하는 도로에서 본 하늘은 흐리긴 하지만 그래도 비는 오지 않으니 다행이라 여겼는데, 웬걸! 설악산 즈음부터 버스 앞 유리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버스에서 내리자 으스스 춥고, 안개가 자욱해 비가 많이 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엄청 많이 내리는 비는 아니었지만, 심리적 압박감이 컸던 탓이다. 1박 2일을 설악산에서 보내려는 야심 찬 계획에 들떠있던 우리는 실망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매점에서 5천 원에 우의를 샀다. 최근 날씨가 더워서 옷을 얇게 입은 편이라 감기에 걸리진 않을까 싶어 얼른 우비를 걸쳤다. 버스 승객의 2/3이상이 내렸는데, 함께 내린 이들은 벌써 계단을 올라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궂은 날씨에 바로 출발하는 것에 의욕이 떨어진 상태, 막걸리 한 병으로 몸을 데우고 마음을 추스르기로 한다. 매점 식당에서 메밀전, 황태해장국을 시켰다. 황태해장국이 진하고 반찬으로 나온 콩나물무침이 아삭한 게 뜻밖에 맛집이다. 9시에 문을 연다고 하니 새벽에 나오느라 아침밥을 못 먹었다면 이 식당을 이용해도 좋을 듯하다.
비가 잦아진 듯해 한계령 입구에 올라섰다. 가파름이 심하다. 10년 전에는 새벽 3시에 출발하였고 그때는 어둠에 싸여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어 이렇게 계단이 높은지 몰랐다.
숲은 안개가 자욱해 신비로웠다. 신선들이 살만한 선경으로 들어가는 길이 이 길과 같을까? 설악산 종주는 분명히 고될 것이다. ‘이 힘든 여정에 끼어든 나! 스스로를 칭찬해야 할까, 무모하다 탓해야 할까?’ 이런 갈등은 산행 내내 이어졌다.
고산에서 피는 금강애기나리가 안개에 젖어 촉촉하다. 배낭을 메고 키가 작은 야생화 사진을 찍는 것은 생각보다 체력을 요한다. 산행 중이기 때문에 배낭을 내려놓지 못하고 자세를 낮춰 사진을 찍기 마련, 허리에 부담이 크다.
작은 두루미꽃이 지천이다. 거의 오체투지의 자세를 반복적으로 만들어가며 산행을 이어갔다. 사진을 찍는 이의 산행은 단순히 산만 타는 이에 비해 부담의 정도가 훨씬 클 수밖에 없다. 아무리 버거워도 꽃을 찍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니 아직은 할만한 듯하다.
분홍색 철쭉이 지금 한창이다. 서북능선에서 가장 많이 본 꽃이 철쭉이다. 안개 속에서 연분홍 치마를 입은 다소곳한 자태의 여인에게 그마마 힘을 얻는다.
그다음으로 많이 본 꽃이 큰앵초, 진한 꽃분홍 저고리가 드문드문 거친 산행을 곱게 만든다. 이런 안개는 전망을 감춘다.
시야가 훤히 보일법한 곳이라도 기대를 내려 놓아야 한다. 안개가 자욱하여 바위투성이 가파른 발밑만 보일 뿐 먼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나에겐 이를 아쉬워할 만한 여유가 없다. 간혹 하늘이 열릴 때에야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지 자각할 뿐, 앞으로 내딛는 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서북능선이 이런 데 내일 공룡능선을 넘을 수 있을까?’
안개 무리 사이에 나도옥잠화가 보인다. 오랜만이다. 함백산에서 나도옥잠화를 빗속에서 찍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나도옥잠화는 그때가 최고였는데. 설악산에서 만난 나도옥잠화도 그 분위기가 만만치 않은데 시간이 없어 제대로 찍을 수가 없다. 그래도 고됨을 덜어주는 나도옥잠화에 마음이 차오른다.
희운각대피소 산장을 예약하였기에 중청대피소가 보이는 곳에서 소청봉으로 방향을 튼다. 둘레길인듯 하더니 갑자기 엄청난 난코스가 나온다. 바위투성이 길에 경사도가 큰 하행 길에 다리에 무리가 간다. 난 올라가는 건 힘들어해도 내려가는 건 어렵지 않다고 여겼는데, 이 코스는 아니다.
특히 소청봉 즈음에서 희운각대피소까지 내려가는 매우 가파른 산길은 체력적인 소모가 엄청나다. 다리는 무겁고 오늘 잠을 청할 희운각대피소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마음이 바빴지만, 설악 공룡능선으로 쏟아져 내리는 구름폭포에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구름이 이처럼 흘러내리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다. 안개와 비가 만들어낸 신비로움이다. 공룡능선을 넘나드는 운해와 구름폭포에 지금까지의 고통이 말끔히 씻긴다.
마주 오는 청년은 공룡능선을 넘었단다. 산행하는 7시간 내내 비가 왔다니 그나마 안개비였던 서북능선 산행은 거의 축복에 가깝지 않은가.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희운각대피소 소등시간이 저녁 9시다. 최소한 7시쯤에는 도착해야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지친 걸음으로 대피소에 도착해 신분증을 제출해서 방(?)을 배정받았다. 방이라기보다는 전체가 트여있는 공간에 칸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나무로 되어 있는 방은 복도와 양옆의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새롭게 지어져 쾌적하다. 이곳 깊은 산중에 수세식 화장실이라니? 하지만 휴지는 없으니 자신이 가져온 것을 사용해야 한다.
다들 저녁을 먹느라 정신이 없다. 다행히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계곡물을 끌어온 호스가 있어 손을 씻었다. 이 물로 양치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식수로 부적합하다는 안내 문구가 있으니 먹지는 말도록. 대피소 매점이 저녁 8시면 문들 닫기 때문에 그전에 필요한 물품을 사 두어야 한다. 내일 필요한 물을 샀다. 500mL 한 병에 1,500원이고 햇반은 3,000원이다.
먹어야 힘이 날 터, 삼겹살을 지글지글 구웠다. 일행이 집에서 키운 상추를 씻어왔고 여기에 삼겹살을 싸서 먹었다. ‘게 눈 감춘다’라는 말이 무슨 일인지 알았다. 너무 맛있어서 말을 잃었다. 아니 말할 시간이 없었다. 고기를 다 먹고 난 후 남은 김치에 밥을 볶아 먹었다. 최고의 진수성찬이다.
이제 방으로 들어가 잘 시간이다. 완전 오픈된 공간이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가 스테레오로 들린다. 이렇게 다양한 코골이 소리라니. 한참을 뒤척였다. 내일 새벽 4시에 출발해야 한다. 양을 몇 마리를 세었는지, 제발 잠 좀 들어라! 귀마개를 가져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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