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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느낄 수 있는 분단의 역사
허물어진 장벽은 현재 어떻게 쓰이고 있을까?
독일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분단의 역사가 있다. 1990년 통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수도인 베를린 곳곳에는 분단의 흔적을 느낄 수 있어 흥미로웠다. 어릴 적 TV 뉴스를 통해 장벽이 무너지는 모습을 봤던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흘러 내가 베를린을 여행하고 있다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베를린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을 보며 만역 우리나라가 통일이 된다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우연히 지나칠 수 있는 곳에도 역사가 숨어있다
여행을 온 관광객인 만큼, 여행지에서 유명한 곳을 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베를린을 대표하는 관광지 중 하나로 꼽히는 브란덴부르크 문을 갔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서독과 동독의 총리가 만나 화합을 시작했던 자리는 평화의 상징으로 남아 지금까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명소가 되었다. 문의 모습은 상상만큼 규모가 있지 않았지만, 총리들이 만났을 당시를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묘해졌다.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자주 들렀던 프리드리히스트라세 역 또한 분단의 역사를 담은 역으로 유명했다. 동서독 정부가 일부러 장벽까지 세워가며 이념 대립에 날을 세우고, 두 지역의 교류를 막았던 것을 생각하면 독특한 상황에 놓였던 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동서독 정부와 관할 군정 당국이 특별 협정을 맺어 양측의 열차가 정차할 수 있는 곳을 지정했고, 그 역이 프리드리히스트라세 역이었다. 홀로코스트의 중심이었던 곳이 분단의 역사의 중심도 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동독에서 서독으로 월경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를 막기 위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지역 주민은 각기 다른 구역을 사용해야 했으며 구역 사이에 국경경비대와 검문소를 두어 통제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기차역은 '눈물의 궁전(Tränenpalast)'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이는 분단이 되었지만 우리와 달리 어느 정도 교류가 가능했던 독일의 상황 때문에 생겨났다. 자신들의 의지와 달리 동독과 서독으로 찢어져 살게 된 이산가족이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이 역에 슬픈 별명을 지어준 것이다. 이 역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TV 프로그램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냉전 시대를 느끼다, 체크포인트 찰리
이어 우리의 발길은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로 이어졌다. 베를린 장벽이 생긴 이후 동·서독 사람들이 교류했던 출입구 중 하나인 이곳은 군인, 외국인, 연합국 측 고위 인사들이 지나다니는 유일한 검문소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현재까지 남은 표지판에는 영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가 적혀있었다.
냉전 시대가 끝난지 오래였지만 검문소 건물 자체와 팻말, 그리고 동독 군인의 사진 등 그 당시를 느낄 수 있는 모두 요소들이 남아있어 인상적이었다. 검문소의 총알 자국까지 남아있어서 꼭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1989년에 다른 검문소들이 철거되었지만 이 검문소만 2000년에 따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전 세계에 가장 잘 알려진 검문소다 보니, 이곳에서의 사건 사고도 많이 알려졌다. 베를린 장벽이 지어진지 얼마 안될 때에는 소련과 미국의 탱크가 교착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초반에는 검문소 주변에 구조물이 별로 없다 보니 서독으로 탈주하려는 사람들이 밀려들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나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장벽이 설치된 지 1년이 되었던 1962년, 페터 페흐터(Peter Fechter)란 청년이 친구와 함께 장벽을 넘다가 총에 맞게 된다. 치료하면 살 수도 있던 상황이었지만 동독, 서독 사람들과 군인들 모두 두려움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결국 페흐터는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보도되었으며, 분단의 슬픔과 더불어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향하던 사람들을 재조명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를 기리는 기념비에는 "그는 단지 자유를 원했다(er wollte nur die Freiheit)"라는 문구가 쓰여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슬픈 역사를 생각하게 한다.
슬픈 역사가 가득한 곳이지만, 이제는 관광 명소로 전 세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주변에는 검문소의 역사와 더불어 이곳에서 월경을 하려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도 있어 독일의 역사를 알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홀로코스트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기록하고, 이를 후대에 전하려는 의지가 강한 독일 사람들의 성향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검문소 때문인지, 아니면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풍경은 여전히 서독과 동독으로 나누어지는 느낌이었다. 동독이었던 부분은 어떻게 보면 고풍스럽다고 이야기해야 할까. 네모 반듯한 건물이 주를 이루던 베를린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곳에서는 옛 건물들이 많이 보였다. 확연하게, 동독이었던 곳의 발전이 더딘 느낌이었다. 냉전 시대의 분위기가 없어지려면 앞으로 더 시간이 필요할 듯 싶었다.
과거의 아픈 흔적은 남아있지만, 밝은 표정으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역사가 쓰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놀랐던 점은 벽에 베를린 장벽의 일부를 걸어둔 건물이 흔치 않게 보였다는 것과 더불어 아예 무너진 장벽 조각을 활용한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알록달록한 색을 띠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돌조각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역사의 흔적이 담겨 있는 벽인데 팔아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색을 칠할 거면 그냥 아무 돌덩이나 주워서 파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 돌조각을 사면 진품 보증서를 첨부해 준다고 한다. 가벼운 농담 따윈 통하지 않는 독일 사람들의 성향이 느껴지는 기념품이었다.
베를린 장벽에서 느끼는 시간의 흐름
베를린 장벽은 시내에서도 볼 수 있다. 포츠담 역 앞에 있는 '포츠다머 플라츠(Potsdamer Platz)'에는 베를린 장벽 일부가 놓여 있어 관광객은 물론이고 현지인들의 눈길을 자연스럽게 사로잡는다. 베를린 장벽 붕괴를 기념하며, 118명의 예술가가 벽 일부를 그라피티로 뒤덮은 프로젝트가 보존되어 있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도 관광명소로 꼽힌다.
일정에 여유가 나지 않아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포츠다머 플라츠에서 본 장벽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장벽의 역할을 할 때에는 그저 회색 콘크리트 벽이었을 것 같은 벽들이(물론 낙서는 많았겠지만) 이곳에서는 화려한 그라피티로 뒤덮여 있었다. 기념품 가게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자유분방함에 또 한 번 놀라게 되었다.
평화의 상징인 CND 심벌이 크게 그려진 작품을 보면서, 아픈 역사의 흔적이 예술의 또 다른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다. 역사에서 저질렀던 실수와 아픔은 모두 인정하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발전하려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