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박물관섬(Museumsinsel)'은 베를린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꼭 가야 하는 관광지로 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는 베를린을 대표하는 박물관 다섯 개가 모여있기 때문이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흐르는 슈프레 강 북쪽 끝에 자리 잡은 이 섬에는 베를리너 돔(베를린 대성당)을 중심으로 구 박물관(Altes Museum), 신 박물관(Neues Museum), 구 국립미술관(Alte Nationalgalerie), 보데 박물관(Bode-Museum),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 Museum)이 있다.
계획성 있는 독일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박물관이 한 섬에 모여있을까? 이런 궁금증에 박물관섬에 대해 알아보니, 이곳이 만들어지기까지 독일 제국 수립의 주역이었던 프로이센 왕국의 노력이 있었다. 16세기부터 개발된 섬은 '왕좌의 낭만주의자'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노력으로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세운 구 박물관에 이어 구 국립 미술관과 신 박물관 등을 지으며 박물관섬의 기틀을 다졌다. 덕분에 평범한 주거지였던 섬이 예술과 문화가 꽃 피는 자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왕가의 소장품이 1918년 이후 프로이센 문화유산 재단에 위탁되면서 박물관섬은 세계적인 문화 예술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베를린의 여느 유적과 마찬가지로 박물관섬의 건물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이후 독일이 통일되면서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고, 199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사실 이곳에 있는 박물관들 모두 대단한 소장품들을 소유하고 있기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다.
그리스 로마 시대 유물들과 고 예술품이 보관되어 있는 구 박물관, 네페르티티(Nefertiti)의 흉상을 비롯한 고대 이집트 유물과 선사시대 유적이 있는 신 박물관, 고전주의·낭만주의·인상주의·초기 모더니즘 등 다양한 시대의 미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구 국립미술관, 비잔틴 시대의 조각 작품을 포함한 다양한 작품 및 16세기 이후의 주화 컬렉션으로 유명한 보데 박물관, 페르가몬 신전과 밀레투스 시장의 문 등 거대한 유적들을 한 눈에 관람할 수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박물관섬은 물론이고 그 주변으로도 다양한 박물관과 미술관이 이어지기에, 이곳을 완벽하게 구경하려면 일주일도 모자를 듯 싶다. 섬 내에는 베를린 왕궁(Berliner Schloss)을 복원하여 세계민속박물관 겸 문화 행사·예술 전시 등이 이루어지는 공연장인 훔볼트포룸(Humboldtforum)이 있으며, 슈프레 강 건너편에는 동독 시절의 생활상을 담은 동독 박물관(DDR Museum)과 베를린의 역사 속 예술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에프라임 궁 박물관(Museum Ephraim-Palais) 등이 있다. 그 반대편에는 독일 역사박물관과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도 있어 다채로운 문화 예술을 즐길 수 있다.
우리가 찾았던 2024년 6월 초에는 아쉽게도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이 휴관 중이었다. 대신 박물관의 모습을 담은 미디어 아트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실제 박물관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다른 곳을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일정과 체력상 우리가 박물관섬 내에서 둘러볼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섬에 있는 박물관 전부를 보고 싶었지만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맞았다. 그래서 제일 가고 싶은 두 곳을 골랐고, 하루 종일 예술 작품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갈 곳을 정해두고 움직였기에 즐겁게 관람을 즐겼던 듯하다.
19세기 및 독일 미술을 만날 수 있는
구 국립미술관
매월 첫째 주 일요일은 '뮤지엄 선데이(Museum Sunday)'로 모든 박물관이 무료로 문을 열고 있다. 우리가 찾은 때가 바로 이 뮤지엄 선데이로, 모든 박물관마다 줄이 길게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박물관이 아닌 유적은 유료였지만, 그곳에도 줄이 길게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물관 두 곳을 보는 계획은 그나마 최선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박물관이 문을 열기 전부터 길게 선 줄은 시간이 지날 수록 길어졌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밝았다. 사람들에게서 세계적인 박물관에 가는 설렘이 느껴졌다.
구 국립미술관에서는 마네, 모네, 세잔, 빈센트 반 고흐 등과 같은 인상파 화가의 작품들과 더불어 독일의 사실주의 화가 아돌프 멘첼(Adolf von Menzel), 상징주의 대표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마침 우리가 방문했을 때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풍경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특별전이 이루어져 볼 거리가 풍성했다.
이 미술관이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미술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들의 작품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수많은 작품 속에서 신기하게도 우리가 아는 인상파 화가의 작품이나 로댕 같은 거물의 작품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이곳에서는 유명 화가의 그림에서 한 번, 그리고 작품들의 규모에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대관식이나 전쟁의 순간을 담은 대작들이 벽을 가득 채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진으로 담았을 때 이런 규모가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런 작품들 앞에서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꼼꼼히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모습도 흥미로웠다. 다들 조용하게 관람하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예술에 대한 열정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작품과 조화를 이루는 공간의 모습은 관람을 더욱 즐겁게 했다. 차분한 벽에 걸린 그림은 그림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고, 붉은 벽과 화려한 타일이 있는 공간에 있는 작품들은 풍경 자체로 예술인 듯 했다. 벽에 칠해진 금박 패턴마저 작품을 위해 존재하는 듯 보였다. 이처럼 작품과 공간 모두에 감탄했던 곳은 이곳이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감성을 충만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만약에 베를린을 다시 가더라도, 다시 찾아가고 싶은 곳이다.
과거와 현재의 조화가 돋보이는
신 박물관
구 국립미술관 바로 옆은 네페르티티의 흉상으로 유명한 신 박물관이 있다. 이곳도 미술관 못지 않은 줄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우리도 줄에 합류했다. 햇볕이 뜨거워질 무렵 줄을 서는 것은 그다지 기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유물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햇볕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문득, 무료가 아닌 날에도 이렇게 줄이 길까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줄이 짧아졌고, 드디어 박물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박물관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며 70여 년 동안 방치되었다. 1997년 국제현상설계를 통해 복원 계획이 진행되었고, 세계적인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참여하게 된다. 복원 작업 동안 원형 그대로 복원을 원하는 사람들과 기념비적으로 새롭게 복원을 원하는 사람 간의 논쟁이 뜨거웠다.
건축가는 이런 논쟁 사이에서 과거 전쟁의 상흔을 유지한 채 현재와 조화를 꾀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이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묘한 분위기는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재개관 행사에서 메르켈 총리는 '유럽 문화사에 길이 남을 건축물'이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긴 시간 동안 논란은 있었지만, 박물관은 성공적인 복원을 이끌어낸 셈이다.
박물관 내부에는 로마 시대의 고고학 자료,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수집품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박물관을 유명하게 만든 흉상은 아쉽게도 사진으로 남길 순 없었지만, 흉상이 가진 고고한 우아함은 눈과 마음에 깊게 새겨진 느낌이었다. 몇 천 년 전의 이집트인들이 섬세하게 만든 조각상은 현재의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이곳에 와서야 왜 이 흉상이 박물관을 대표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다양한 고대 시대의 유물들이 곳곳에 있어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인지, 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들만 봐도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역시 건축가의 손길이 닿은 건물의 모습이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으로 하여금 건물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한 설계가 마음을 울렸기 때문이다. 구 국립 미술관에 이어, 신 박물관에서도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