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치앙마이와 함께 가장 '핫'한 태국 북부 여행지는 빠이다. 빠이는 치앙마이에서 762개의 커브길을 지나야 도착하는 도시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그대로의 풍경을 간직한 빠이는 몇년 전부터 배낭여행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더니 지금은 치앙마이와 함께 가장 유명한 도시가 됐다. 우연히 빠이에 왔다가 이곳에 눌러앉았다는 여행자들도 한 둘이 아니다. 마치 천국과 같다 해서 '유토빠이'라는 별명도 생겨났다.
빠이가 다시 궁금하긴 했다. 10여년 전 한적했던 도시의 모습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지만 난 빠이를 지나 한적한 시골 매홍손을 찾았다. 여행자들의 북적임이 없는 조용한 장소에서 완전하게 쉴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매홍손은 태국 최북단에 있는 매홍손 주(州)의 주도다.
빠이 또한 매홍손 주의 한 도시다. 방콕에서 920km 가량 떨어져있으며, 대부분 산악지대다. 치앙마이에서 빠이까지 커브길이 762개인데, 매홍손까지는 1102개가 더 있어 무려 1,864개의 커브길이 있다. 그만큼 가는 길이 험하다.
미얀마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미얀마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목이 긴 카렌족, 몽족 등이 살고 있다.
매홍손 행 버스는 치앙마이 2터미널에서 출발한다. 치앙마이는 태국 북부 교통의 기점이다. 태국 북부 많은 도시들이 치앙마이와 꼼꼼히 연결되어 있다. 매홍손에도 공항이 있지만 항공편은 극히 드물어 방콕이나 치앙마이에서 버스로 가는 게 일반적이다.
치앙마이에서 매홍손행 버스
이런 평탄한 길도 가지만 매홍손까지는 1864개의 커브길을 지나야 한다
아침 9시에 출발한 버스는 6시간만에 매홍손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가는 길은 쉽지 않다.
빠이까지도 쉽진 않지만, 본격적인 커브길은 빠이를 지나면서부터 시작됐다. 라면가닥보다 더 꼬불거리는 커브길이 계속됐다. 버스는 산악지대의 깍아지른 능선과 아찔한 커브길을 절묘하게 넘나 들었다. 그럴수록 태국 북부 산악지대의 엄청난 비경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마냥 감탄만 할 수는 없었다. '기사가 오늘 처음 이곳을 운전한 사람이 아닐까? 잠깐 피곤해서 졸면 어떡하지?'
내 옆에 앉은 태국 여성은 빠이를 지나면서부터 비닐봉지를 껴안고 차 멀미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의 신경은 오로지 운전기사의 핸들에만 쏠려있었다.
매홍손 터미널에 당도하자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하지만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그림같은 풍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이제서야 풍경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겹겹이 펼쳐진 거대한 산맥줄기와 산 위에 걸쳐있는 뭉게 구름, 탁트인 파란하늘은 1,864 커브길의 악몽을 단번에 사라지게 해줬다. 이 작은 시골동네에 난 첫 눈에 사랑에 빠졌다.
매홍손은 작은 동네다. 맘잡고 시내 한바퀴를 돌아도 2~3시간이면 충분할 정도다. 시내 중심은 쫑캄(Chong Kham)호수다. 쫑캄호수를 중심으로 사원이 있고 식당과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호수 앞에는 매일 야시장도 열린다.
매홍손의 풍경은 화폭에 박제된 것처럼 매일 그자리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평화로움으로 가득했다.
쫑캄호수
쫑캄호수 앞 사원
쫑캄호수를 걷는 일은 매홍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매홍손에 머무는 동안 매일 호수 주변을 걸었다. 딱히 할일이 없기도 했지만, 하늘이 그대로 투영된 조용한 호수 풍경을 보는 것이 행복했다.
조용한 쫑캄호수도 오후 5시가 되면 북적거린다. 야시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기념품이 하나둘씩 진열되고, 호수 주변에는 앉은뱅이 테이블이 차곡차곡 놓여졌다. 태국 어디나 흔한게 야시장이지만, 매홍손의 야시장은 지극히 소박했다. 물건들은 놀라울 정도로 저렴했고, 음식들은 평범하지만 정겨웠다.
야시장에서 파는 옷들은 대부분 중고가 많다. 예전에 우리나라 의류수거함 옷들이 해외로 수출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이곳 매홍손에도 흘러들어왔나보다. 옷 구경을 하러 가면 상인은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말해도 '한국에서 가져온 옷이라 좋다'며 꼭 한벌 사라고 부추긴다.
매홍손 기념품 중 유독 내 눈에 띄는 건 1864가 찍힌 물건이다. 1864는 치앙마이에서 매홍손까지 이어진 커브길 갯수로, 매홍손을 상징하는 숫자다. 한 두개 기념품을 샀다. 매홍손이 그리워질 때 쯤 꺼내보면 좋을 듯하다.
야시장에서 음식을 사와서 이곳에서 먹을 수 있다. 이 또한 매홍손의 낭만이었다.
호수 앞에는 황금색 지붕의 총캄, 총클랑 사원이 있다. 하루종일 사람들로 북적대는 매홍손의 대표 사원이다.
하지만 난 매홍손에서 도이꽁무 사원이 가장 좋았다. 해발 200m 정도의 아담한 산에 있는 사원으로 2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태국은 보통 황금사원이 많은데, 도이꽁무는 화이트 템플이다. 순수하고 맑은 백색 사원은 매홍손의 파란 하늘과 무척 잘 어울렸다. 도이꽁무에 올라가는 이유 중 하나는 매홍손 시내를 한 눈에 보기 위함인데, 그 중 명당은 사원 안에 있는 카페다. 사원안에 카페가 있는 것 자체가 조금 신선한데, 카페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유토피아가 부럽지 않다.
도이꽁무사원
도이꽁무 사원 카페에서 바라보는 풍경
매홍손의 아침 풍경이 좋아, 이곳에서는 늦잠을 잘 수 없었다.
아침에 호텔 창문을 열면 수묵화처럼 옅어지는 산봉우리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눈 앞에 펼쳐진다. 산봉우리에 걸쳐있는 안개는 화룡정점이다. 몽환적이고 신비로웠다. 오직 자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 걸작품을 매일 볼 수 있는 매홍손의 하루는 너무나 평온해서 비현실적일 정도였다.
새벽시장으로 향했다. 매홍손 새벽시장 주변에는 탁발이 열린다.
탁발은 석가모니 부처님때부터 시작됐다. 무소유의 원칙으로 다른 이의 자비에 의존하여 삶을 이어나가는 불교의 오랜 수행방식이다. 우리나라는 스님들이 무료로 음식을 얻는 행위를 부정적으로 봐서 1964년부터 금지해오고 있다. 보통 탁발하면 라오스 루앙프라방을 떠올리지만, 탁발은 지금도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루앙프라방에서는 스님들이 함께 움직이는데 반해, 매홍손은 대부분 승려 혼자 탁발에 나선다. 마치 무초의 뿔처럼 가라는 부처님의 말씀과 같다. 주황색 가사를 걸치고 맨발로 길을 걷는 스님의 모습은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와 어우러져 진한 감동을 불러온다.
탁발을 하기 위해 걸어가는 승려의 뒷모습
치앙마이가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고 싶은 도시였다면 매홍손은 혼자가 더 잘 어울리는 여행지였다.
이른 새벽 산중턱에 걸친 안개를 바라보는 평온함, 새벽 시장의 분주함 속에서 홀로 탁발을 하는 승려들, 어둠이 내려앉을 때쯤 쫑캄호수 주변에 하나둘씩 켜지는 야시장 풍경.
매홍손은 잠깐의 화려함으로 금새 사라지는 불꽃이 아니라 불씨를 조용히 안고 있는 장작처럼 투박하지만 은은함이 오래도록 남아있는 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