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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만나는 다채로운 사진 작품의 매력
다양한 고대 유물과 근대 회화 작품들을 볼 수 있었던 박물관이 모여있는 박물관섬, 20세기 대표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물이 인상적이었던 신국립미술관,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의 정수를 맛볼 수 있었던 국립 회화관, 아르누보·유켄트스틸 시대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브뢰한 뮤지엄까지, 베를린에 있으면서 다양한 박물관에 들러 다채로운 분야의 작품들을 마음껏 관람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문화 예술이 꽃피우는 도시다운 관광이었다.
이어 우리의 발길은 '사진 박물관(Museum für Fotografie)'으로 이어졌다. 베를린 문화 포럼(Kulturforum)이 있는 티어가르텐(Tiergarten)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 박물관은 19세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사진 작품들을 만날 수 있으며 사진 역사와 예술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곳으로 전 세계 사진 애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다. 또한 '관음과 욕망의 빛의 연금술사'로 불리는 사진작가 헬무트 뉴튼(Helmut Newton)의 재단이 설립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헬무트 뉴튼은 생전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했고, 이어 프로이센 문화 유산 재단으로부터 란트베어 카지노(Landwehr Casino)를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1909년에 지어져 고전주의 건축미를 간직한 2,000제곱미터(약 605평) 규모의 건물은 헬무트 뉴튼 재단이 인수한 이후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뉴튼이 사망한 해인 2004년에 사진 박물관으로서 문을 열었다. 그 해 가을부터 사진작가의 '개인 재산(Private Property)'이 1층에 상설 전시되었으며, 2층에는 박물관이 소장한 다양한 사진 예술 작품을 활용한 전시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헬무트 뉴튼은 자신이 이 세상에 없어도 고향 베를린에 있는 그의 재단이 '죽은 박물관'이 아니라 '살아있는 기관'으로서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작가의 유언을 반영하여 그의 혁신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이 가진 다채로운 매력이 지난 20년 동안 사람들에게 색다른 영감을 선사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사진 작가들과의 다양한 교류 프로그램 및 전시가 진행되며 현대 사진 예술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관음과 욕망의 빛의 연금술사
헬무트 뉴튼의 모든 것
박물관으로 들어가면 바로 헬무트 뉴튼의 개인 재산을 관람할 수 있는 전시실이 바로 나타난다. 뉴튼은 자신의 사진 작품 중 상당수를 자신의 재단으로 이전했기에, 이 전시실이 탄생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개인 재산이라고 명명된 만큼 전시물에서는 작가의 사적인 면이 드러나있다. 그가 사용했던 카메라 도구는 물론이고 작품을 위해 사용했던 여러 장치들, 결혼 사진, 평소에 그가 입었던 옷들, 책, 드로잉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자연스럽게 눈을 사로잡는다.
그를 설명할 때 '관음과 욕망'이 항상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의 작품 대부분이 관능적인 에로티시즘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에 입장할 때부터 커다란 누드 사진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던 우리는 전시실에서 다채로운 포즈를 취하는 누드 모델 사진이 꽤 많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하지만 사진에서 누드 그 이상이 느껴졌기에,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관람하기로 했다.
헬무트 뉴튼은 1920년 베를린에서 버튼 공장을 운영하던 유대인 가족 아래에서 태어났다. 12세 때부터 사진에 관심을 갖고 첫 카메라를 구매한 그는 1936년부터 독일 사진작가 이바(Yva) 밑에서 일하며 실무를 다졌다. 뉘른베르크 법에 따라 유대인에게 가해진 억압적인 제한으로 인해 그의 가족은 독일에서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뉴튼은 18세가 되던 해에 나치의 눈을 피해 독일을 떠났고, 우여곡절 끝에 싱가포르에 머물렀다. 싱가포르에서 스트레이츠 타임스의 사진 작가로 잠시 일하던 그는 이어 초상화 사진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 영국 당국에 의해 억류되었고, 1940년에 호주로 보내졌다. 호주에서도 갖은 고생이 이어졌지만, 1945년이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영국 국적을 획득하게 되었고 이름을 뉴튼으로 바꾼다. 호주에서 다양한 방면의 사진 작가로 활동하던 뉴튼은 호주 보그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패션 사진 작가로서 활동했다.
1950년 대부터 유럽에서 활동하던 그는 1961년 파리에 정착했고, 파리 보그와 하퍼스 바자 등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국립 사진 대상을 수상하는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며 수십 년 동안 명성과 영향력을 이어간 그는 2004년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전시장에서는 모델들과 함께 즐겁게 사진 작업을 이어가는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일상과 밀접한 공간, 자동차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생전의 그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가 입었던 옷과 그의 착장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보면서, 패션계와 깊은 연관이 있던 사진작가의 뛰어난 패션 감각도 느낄 수 있었다. 천부적인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여 아름다운 작품들을 남긴 그의 모든 것을 둘러볼 수 있어 깊은 여운이 남았다.
초장시간 노출 기법으로 탄생한 명작
마이클 웨슬리가 본 도시의 모습
1층에서 헬무트 뉴튼의 작품을 본 우리는 이어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층에서는 마이클 웨슬리(Michael Wesely)의 개인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뮌헨 출신의 사진 작가는 현재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 중이며, 초장시간 노출 기법으로 촬영한 도시, 건물, 풍경 및 꽃 정물 사진 작품으로 유명하다.
작가는 1990년대 후반 베를린 장벽 붕괴 후 포츠담 광장 재건과 같은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자체 제작한 특수 핀홀 카메라를 사용했다. 이런 기법은 한 장의 사진에 오랜 시간의 흐름을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를 통해 '눈에 띄게 활기차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한' 베를린의 변화를 표현하고자 했다.
작가는 시간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라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 극도로 긴 노출 시간을 선택했다. 그 결과 움직이는 요소는 투명해지거나 새로 세워진 건물 등의 윤곽에 겹쳐지게 되고, 반대로 움직임이 적은 요소는 명확하게 남게 된다. 이를 통해 새로운 건물의 부상, 사라지는 건물의 흔적, 변화하는 스카이라인 등이 정지되어 있는 사진에 남게 된다. 사진 한 장이지만, 그 속에는 다양한 흐름을 볼 수 있게 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는 베를린에서 일어난 데모의 모습도 장노출을 통해 촬영했다. 그 결과 데모를 일으키는 자와 경찰의 대치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작품이 탄생했다. 분명 정적인 사진인데, 희한하게도 그 당시의 사람들의 숨결과 목소리, 체온이 느껴지는 듯했다. 거리 시위를 담은 작품에서는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반투명하게 드러나 더더욱 묘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한 자리를 지키던 차량이나 경찰들의 모습만 남아 당시의 거리에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사진이 보여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작품을 보며, 사진이라는 예술 분야가 무궁무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헬무트 뉴튼의 작품도 특별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지만, 마이클 웨슬리의 작품 또한 묘한 매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분명 같은 매체지만 다른 방식으로 작품이 만들어지고 각자 다른 매력을 가진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진에 열광하게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