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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U
SEONGEUP
가을이 왔다고 하기에 다시금 더워진 제주. 하지만, 이곳 성읍 나무엔 감이 열리며 가을이 맞다고 말한다. 오랜만에 만난 감. 제주하면 주황색은 보통 귤이 많아 감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힘든데 이렇게 마주하니 어린 시절 감을 따먹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싱그럽게 열린 주황빛의 감. 제주는 정말로 가을이 온듯하다.
어서와 제주는 처음이지?
성읍민속마을
우리는 제주하면 아름다운 자연과 바다를 여행하기 바쁘다. 제주에서 4년 이상을 살아온 나조차도 보통은 자연을 따라다녔으니까. 특히, 성읍민속마을 주변에 있는 영주산은 그렇게 많이 방문했으면서도 성읍민속마을은 여행한 적이 없다. 이번 여행에도 이곳 성읍마을은 계획에 없다. 다랑쉬 오름을 오르기 위해 향한 걸음 위에 이곳 성읍 마을이 있었고, 우연히 찾게 되었다.
그렇게 찾은 성읍민속마을. 이곳엔 제주가 처음인 외국인이 곳곳에서 체험하고, 즐기고, 여행하고 있었다. 제주를 찾는 외국인에게 사랑받는 성읍. 어쩌면 나는 전통을 배척하고 살았는지 모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곳을 찾이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번에 여행을 하고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곳 성읍민속마을은 흥미롭고도 재미난 것으로 가득한 곳이라는걸.
성읍민속마을은
조선조 태종 10년성산읍 고성리에 설치되었던 읍치가 조선조 세종 5년 이곳으로 옮겨진 이래 500여 년간 정의현의 중심이 되었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정의현은 태종 16년 안무사 오식의 건의에 따라 성산읍 고성리에 정의성을 축성 하였었으나, 읍치가 너무 동쪽에 치우쳐 행정상 불편할 뿐만 아니라 태풍의 피해가 잦고 또한 우도가 가까이 있어 외적으로 부터의 침입이 빈번하였으므로 안무사 전관이 건의하여 세종 5년, 당시 진사리, 현재의 표선면 성읍리로 현치를 옮기게 되었다 한다. 따라서 일명 진사성이라고도 불리었던 정의성은 축성을 시작한지 5일 만인 세종 5년 정월 13일에 총 둘레 2,986척, 높이 13척의 규모로 완공되었는데 성에는 동서남으로 세 개의 문을 두었고 성안에는 두 곳의 우물이 있었다.
숙종 28년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 의하면 정의현의 당시 민가 호수가 1,436호, 전답이 140결, 성수비군이 664명, 말 1,178필, 흑우 228수를 보유할 정도의 상당히 번성하였던 읍성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1423년 이후부터는 약 5세기 동안 정의현의 읍치로 번성하였던 성읍은 1915년 5월 1일부로 제주도제가 시행되면서 표선면 면소재지로 격하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읍마을은 그 역사적 중요성이 부각되어 국가유산적 차원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주도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이어 1984년 6월 총 1,425필지 3,191,711㎡의 면적이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승격되었으며, 1987년 9월에는 보호구역이 935필지로 축소 조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주에 이런 곳이 있었어?
제주에 살면서 왜 성읍민속마을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지 몰랐을까 싶다. 제주의 예스러움을 찾고자 할 때면, 관덕정과 삼성혈이 전부였는데, 이곳 성읍민속마을은 앞의 두 곳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예스럽고 아름답다. 특히, 가을을 맞이하는 하얀색의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반기는 성문은 제주가 아닌 서울 어느 민속촌을 연상케 한다. 양쪽으로 서있는 돌하르방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장한 성읍민속마을. 그 안에는 옛 조선시대의 건물 모습 그대로 서 있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성읍민속마을 안에는 옛 것 그대로의 물건들이 존재했다. 가장 먼저 눈에 담긴 것은 말방아였다. 농촌지역에서 곡식을 찧거나 빻을 때 사용한 생활 도구로, 육지부의 연자방아와 같은 형태이나 주로 말의 힘을 이용했으므로 말방라고 한다. 둥글고 판판하나 커다란 석판이 바닥을 이루며 마닥의 중앙에 박힌 중수리들을 중심으로 윗 돌이 맴돈다. 옛 조선 시대에 사용했던 방아의 모습은 특별하진 않으나 말을 이용한다는 것에서 특별함이 느껴졌다.
성읍 마을 고평오 고택
고평오 고택은 18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당을 중심으로 안거리(안 체)와 밖거리(바깥 체)가 마주하여 서 있고, 마당 동쪽엔 모커리(안거리와 밖거리 사이, 가로로 놓인 집체)가 있다. 마당 서쪽에도 모커리가 있어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나, 1970년대 헐렸다. 이러한 고평오 고택은 제주도 남부 일부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가옥 형태였다. 그렇기에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현재는 보존되고 있었다.
고평오 고택을 나와 안쪽의 정의현으로 걸었다. 그러다 만난 노다리 방죽. 이곳은 관청에 원정, 소지 등을 들인 사람들이 거간과 만나 의논하던 곳이라 했다. 사각형의 물통으로 예전엔 창포를 심어 길렀으며 여자들이나 기생들이 머리를 감을 때 사용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연못으로 자리 잡아 성읍민속마을을 아름답게 채웠다.
정의현 객사
연못을 지나 정의현 객사에 다다랐다. 지방관이 임금에게 정기적으로 초하루와 보름에 배려를 올리는 이곳은 중앙 관리가 내려왔을 때 머물게 하는 숙소로도 사용된 장소라 했다. 연회를 베푸는 이곳 정의현 객사. 성읍민속마을의 중심에 서서 초가집의 마을에 기와집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이곳 성읍민속마을은 제주를 여행하는 외국인들에겐 흥미롭고 새로운 장소임에 분명했다. 여러 가이드가 다양한 언어로 성읍을 소개하는 모습. 어쩌면 이곳은 제주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 중 하나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 유지되며 가장 제주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던 성읍민속마을. 이곳은 성산을 여행한다면, 한 번쯤 찾기에 좋은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