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새 여행기 작성
새 여행기 작성
중국 내 주요 도시의 박물관, 기념관을 돌아보는 뮤지엄 투어
#36. 북경노신박물관
지금의 베이징 루쉰박물관(北京鲁迅博物馆)은 옛 베이징 루쉰박물관과 베이징 신문화운동기념관(北京新文化运动纪念馆)이 2014년 7월 통합되어 설립된 결과이다. 베이징루쉰박물관구와 신문화운동기념관구를 포함한 국가문물국 직속 기관으로 1차로 국가 1급 박물관으로 선정되었다. 중국의 대표적인 현대 문학가인 루쉰과 관련된 신문화 운동기의 주요 인물, 주요 사건 관련 실물, 자료, 관련 홍보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 면적 규모는 1000㎡ 수준이며, 7만점의 유물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북경노신박물관 입구. 2024 Ⓒ 김동하
북경노신박물관 내 루쉰 동상. 2024 Ⓒ 김동하
아그네스 스메들리 동상.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아그네스 스메들리(Agnes Smedley. 1892-1950)는 루쉰과 교류한 미국 작가이다. 공산당 혁명에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어 1951년에 베이징 혁명가 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지노 겐구로 동상.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후지노 겐구로(藤野严九郎. 1874-1945)는 루쉰의 일본 유학시절 센다이 의과전문학교 교수였다. 루쉰은 1926년에 그와의 사제간 인연을 기리는 ‘藤野先生’이라는 산문을 발표했고, 이는 1950년대까지 중학교 필독서로 지정된 바 있다.
베이징 루쉰박물관은 베이징시 시청구 복성문내대가 궁문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박물관 내부에는 루신 생가가 위치하고 있다. 생가는 1923년에 루신 본인이 매입한 6칸 규모의 고택이다. 1936년 10월 19일, 그가 상하이 홍커우구 다루신촌에서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자 당시 국민당 정부는 그의 베이징 고택을 보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949년 10월 19일, 노신 서거 13주년이 되는 해에 베이징 노신 고택(鲁迅故居)은 정식 대외 개방되었으며, 1954년에는 문화부 결정으로 노신박물관이 베이징에 설치되고, 노신 고택 옆에 진열실을 건축하였다. 1955년 12월에 노신박물관(鲁迅博物馆)이 정식으로 착공되었으며, 1956년 10월 19일에 노신 서거 20주년을 맞이하여 완공된 북경노신박물관(北京鲁迅博物馆)이 정식으로 대외개방 되었다.
루쉰 가계도 전시물.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루쉰 서당 시절 사용하던 책상.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루쉰이 다니던 서원 삼미서옥(三味书屋) 모습.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절강성 사오싱에 위치한 이곳은 루쉰이 12-17세까지 학업을 하던 서원(사립 교육기관)이다.
루쉰의 광무철로학당 졸업증서(1902년 1월. 루쉰 21세).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루쉰은 1881년 저장성 사오싱(紹興)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주수인(周树人)이었고, 루쉰(鲁迅)은 필명이다. 그는 유복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가 하옥(下獄)되고, 아버지가 병사(病死) 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1898년 그는 난징의 강남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에 입학하였고, 이후 광무철로학당(礦務鐵路學堂)에서 공부하며 당시의 계몽적 신학문의 영향을 받았다. 강남수사학당은 청나라 양무운동의 영향으로 강소성 남경에 1890년에 설립된 군사학교이다. 중화민국 시기에는 해군군관학교로 개편된 바 있다. 광무철로학당의 원래 명칭은 강남육사학당 부설 광무철로학당이다. 광산자원, 교통운수 방면에 인재를 배양하기 위해 청나라 정부가 1898년에 강소성 남경시에 설립한 교육기관이었다.
루쉰의 청소년 모습.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1926년에 쓴 ‘藤野先生’ 육필 원고.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센다이 의학전문학교 시절 루쉰의 필기장.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오른쪽 빨간 글자는 스승인 후지노 겐구로(藤野严九郎)가 수정해준 부분(서체)이다.
일본에서 귀국한 시기 전시물.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소흥부중학당, 절강양급사범학당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02년 졸업 후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고분학원(弘文學院)을 거쳐, 1904년 센다이의학전문학교(仙臺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학교에서 강의 중 중국인이 처형되는 영상을 보고 자퇴하였다. 그는 의학 공부를 단념하고, 도쿄에 머물면서 외국 소설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 이때 그는 중국 국민성 개조를 위한 문학을 지향하였다. 그 무렵 동생 저우쭤런(周作人)과 《역외(域外) 소설집》을 공동으로 번역하여 출간하는 한편, 망명 중인 중국의 혁명운동가이자 유학자인 장빙린(章炳麟)과 교류 하였다.
루쉰의 중화민국 교육부 관원 임명장(1912.8.21).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그는 교육부 사회교육과 과장까지 역임했다.
루쉰이 착용했던 장삼 머플러 신발.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북경대 총장 채원배의 요청으로 루쉰이 만든 베이징대 엠블럼(배지)과 현재 베이징대학교 엠블럼.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신청년’과 ‘공을기’ 전시물.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신청년’은 1915년 9월 상하이에서 진독수가 창간한 공산당 기관지로 루쉰이 편집인으로 참여했다. 주요 기고자로는 마오쩌둥도 있다. 루쉰의 소설 ‘공을기’는 1919년 4월 ‘신청년(6권 4호)’에 발표되었다.
1909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그만두고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중화민국 신정부의 교육부원이 되었다. 1918년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하여 중국 가족제도와 예교(禮敎)의 폐해를 폭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루쉰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어 《공을기·孔乙己》, 《고향》, 《축복》 등 단편을 발표하여 중국 근대문학을 확립하였다. 특히 이 무렵에 발표한 《아큐정전·阿Q正傳》은 그의 대표작이자 세계적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1920년 이후에는 베이징대학, 베이징여자사범대학 등 교단에 섰다. 특히 그는 현 베이징대학의 엠블럼을 만들기도 하였다.
‘광인일기’가 발표된 ‘신청년(1918년 5월. 4권 5호)’.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일본 지인에게 선물한 소설집 ‘방황(1928년 8월 발행)’에 써준 시문(1933년 3월).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1927년 1월에 발표한 단편 역사소설 분월(奔月)의 육필 원고.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루쉰의 하문대학 근무 시절 사진(1926.11.17).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루쉰의 친구이자 현대작가인 임어당(린위탕·林语堂)은 당시 복건성 하문대학 문과주임(국학원 비서)이었는데, 그의 소개로 루쉰은 1926년 8월에 하문대학 국문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1924년 저우쭤런과 신문학 단체인 어사사(語絲社)를 조직하고, 1925년 청년문학자와 미명사(未名社)를 조직하였다. 이후 베이양군벌(北洋軍閥)의 문화 탄압과 3·18사건(1926.3.18)으로 베이징을 탈출하여 복건성 하문대학(厦門大學)·광동성 광둥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7년 가을에는 상하이의 조계(租界)에 숨어 제자인 쉬광핑(許廣平)과 동거하며 문필 생활에 몰두했다.
그의 저작은 《루쉰전집[魯迅全集]》(20권, 1938), 《루쉰 30년집》(10권, 1941)으로 출판되었고, 중국에서도 상세한 주석을 가한 또 다른 《루쉰 전집》(10권, 1956~1958)이 간행된 바 있다. 1986년부터는 중국에서 루쉰문학상(鲁迅文学奖)이 만들어져 매년 중편·단편 소설, 보고문학, 시가, 에세이(산문·잡문), 문학이론, 평론, 번역문 등에 대한 평가후 시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별세 몇 달전에 복민의원에서 찍은 루쉰의 X-ray 사진.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루쉰의 별세 직후 모습(1936.10.19).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민족혼(民族魂)’이라고 쓰인 루쉰 장례식 만장(挽幛).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만장은 죽은 이의 덕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추모하는 글을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로 만든 것이다.
루쉰의 상하이 체류 시기(1927-1936) 발표한 작품들.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2013년 기준으로 중국 내 루쉰을 기념하는 각종 기념관, 박물관이 모두 11개가 있다. 이중 규모가 큰 곳은 베이징 루쉰박물관 외에도 루쉰의 출생지인 저장성 사오싱에 있는 사오싱 기념관과 말년에 10년간 생활하며 작품 활동을 한 상하이에 있다. 샤오싱루쉰기념관(绍兴鲁迅纪念馆)은 1953년에 만들어졌으며, 루쉰 출생 고택(鲁迅故居)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1933년 9월, 루쉰의 53세 생일 때 찍은 가족 사진(동거인 쉬광핑 35세, 아들 4세).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루쉰의 원래 부인은 주안(1878-1947)이다. 그녀는 양가 집안의 결정으로 혼인을 약조하였고, 루쉰은 25세 때인 1906년 7월 6일 일본에서 귀국 후 처음 본 주안과 혼례를 치루게 된다. 그러나 다음날 루쉰은 다시 일본으로 출국해 버려 주안은 평생 독수공방으로 지내야 했다. 반면 루쉰은 1923년에 북경여자고등사범대학 교사 시절 제자였던 쉬광핑(许广平. 1898-1968. 여류작가)과 비서로 함께하였고, 광동중산대학 교수 시절인 1927년 1월부터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상하이로 이주한 후 1929년 9월 27일에 둘 사이에는 유일한 아들인 저우하잉(周海婴. 1929-2011)이 태어나게 된다. 루쉰의 본명이 주수인(周树人)이어서 아들의 성이 저우이다.
1927년 10월 3일에 상하이에서 지인들과 찍은 사진.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사진에서는 동거인 쉬광핑과 친구 린위탕(위 중간)이 보인다.
베이징에서 개최된 루쉰 서거 20주년 대회 전시물.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홍커우공원으로 이장된 후, 1956년 마오쩌둥이 쓴 루쉰 묘비석 노신선생지묘(鲁迅 先生之墓) 서체.
여러 작품에 등장했던 루쉰 초상화.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46세 때인 1927년 10월 3일, 루쉰은 상하이에 도착하여 병사할 때 까지 10년간 상하이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를 기념하여 1950년에 상하이 루쉰기념관(上海鲁迅纪念馆·상하이 홍커우구 톈아이루)을 설립했으며, 이는 신중국 성립 이후 첫 번째로 만든 개인기념관이다. 또한 홍커우구 쓰촨베이루에는 루쉰묘(鲁迅墓)가 조성되어 있다가, 1956년에 루쉰공원(옛 홍커우 공원)으로 이전했다. 루쉰묘에는 루쉰 좌상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박물관 내 루쉰서점.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노신고택 입구.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노신고택 내부.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루쉰이 1925년에 심은 백정향 나무.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신청년과 루쉰 캐리커쳐. 북경노신박물관. 2024 Ⓒ 김동하
북경노신박물관 홈페이지(www.luxunmuseum.com.cn). 2024 Ⓒ 김동하
김동하 작가의 두피디아 여행기 시리즈
차이나 뮤지엄 투어: 중국 내 주요 도시의 박물관, 기념관을 돌아보는 뮤지엄 투어
차이나 시티 투어: 중국의 31개 성, 직할시, 자치구의 수도인 성회(省會)와 주요 도시를 돌아보는 시티 투어
샤오핑 로드: 차이나 머천트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경제지리 여행기
화교 역사·문화답사기: 전 세계에 분포한 5000만명 화교 발생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특징을 알기 위해 떠나는 답사기
한자로드 : 3300년 전에 만들어져 아직도 살아 있는 한자. 그 생존의 원인과 배경을 알아보기 위해 떠나는 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