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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여행기 작성

누군가에게는 축복 또 누군가에게는 비극
퀴즈 하나 내겠습니다.
참고로 필자의 친구들은 이걸 매우 좋아합니다.
아주 달고 살아요.
근데 필자는 이 살아있는 풀들을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습니다.
[출처 : DOOPIDEA]
혹시 이 식물이 뭔지 아시는지요?
쿠바섬에서
볼 수 있는 이 식물은
담배와 사탕수수입니다.
담배의 잎은 담배의 원료입니다.
사탕수수는 설탕의 원료입니다.
물론 기호 식품입니다만,
담배와 설탕은 현대인들의 삶과 절대 분리시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 둘을 금지한다면,
이민률이 급격하게 올라갈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쿠바의 축복이자 비극인 이 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통으로 만들어진 쿠바의 명품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무려 1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저번 편에서 필자는 벨라스케스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총독으로 있던 시기에는 아프리카 노예 유입이 본격화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통치 말기인 1520년대부터 소규모로 아프리카 노예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금 채굴이 목적이었지만, 쿠바에서는 새로운 금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대규모 노예 무역이 이뤄지게 됩니다.
쿠바에서 금보다 더 금같았던 대표적인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I 시가를 물고 계시는 쿠바 어머님 어머님께서 턱 힘이 좋으시다.
첫 번째로 시가입니다.
담배죠.
아마 쿠바 얘기가 나오면 시가가 빠질 수 없을 겁니다.
시가는 담배 잎을 말아서 만든 일종의 담배 제품입니다.
아마 한국에서 시가를 보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편의점에서 파는 담배가 더 익숙하지요. 편의점에서 파는 담배와 시가의 제일 큰 차이점은 필터입니다. 편의점 담배와 달리 시가에는 필터가 없고 전체가 담배 잎으로 되어 있습니다.
필자는 담배를 태우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만,
사용하는 방법도 다르다고? 지인이 얘기해 줬습니다.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에게 익숙한 담배는 속 담배고 시가는 입 담배라고 들었습니다.
시가는 처음에 누가 시작했을까요?
I 시가가 흔하게 보이는 아바나의 길거리
시가는 원래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이 종교 의식이나 휴식용으로 피우던 데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콜럼버스가 1492년 쿠바에 도착했을 때 타이노족이 담배 잎을 말아 피우는 걸 접했고 유럽에 전파됐다고 합니다. 이후 스페인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시가는 전 세계로 퍼졌다고 하네요.
쿠바의 시가가 유명한 이유는 여러 요소가 있습니다.
일단, 쿠바는 담배 재배에 가장 이상적인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비냐레스와 피나르 델 리오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담배 잎을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붉은 점토 토양과 적절한 습도, 온화한 기후가 담배 잎이 최상의 풍미를 갖도록 만든다고 하네요.
<시가 제조 과정 출처: DOOPEDIA>
그리고 쿠바 시가는 기계가 아닌 100% 수작업으로 제작된다고 합니다.
숙련된 장인들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잎을 말고 다듬어 품질을 유지합니다. 신기하게도 기계로 만든 시가보다 연소 속도, 풍미, 구조적 완성도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기계가 따라올 수 없다니, 명품과 같은 맥락이네요.
I 쿠바의 명품 시가 브랜드 COHIBA 피델 카스트로가 개인적으로 즐기던 시가로, 혁명 이후 국영 브랜드가 되면서 시가의 대표적인 브랜드가 됐다.
이 쿠바의 시가가 유명해진 대표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쿠바 혁명 이후 피델 카스트로가 미국과 대립하면서, 당시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쿠바 제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경제제재를 가합니다. 이에 따라 쿠바 시가는 미국에서 불법 제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시가를 참을 수 없었고 밀수입된 쿠바 시가는 미국에서 비싼 값에 거래되며 '금단의 사치'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재밌는 사실은
시가를 즐기던 케네디 대통령도 금지 조치를 발표하기 전날 밤에 쿠바 시가 1,200개 사오도록 지시했다고 전해집니다.
어지간하네요.
I 쿠바의 다양한 시가 브랜드 Montecristo No. 4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쿠바 시가로, 스페인 같은 주요 시장에서 "기본 시가"로 여겨질 만큼 대중적이다.
17~18세기에는 담배가 스페인과 유럽에서 인기를 끌면서 쿠바에서 담배 재배가 본격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앞 서, 쿠바 시가가 왜 유명한지 말씀드렸습니다.
쿠바 시가는 기계가 아닌 100% 사람의 손을 탄생합니다.
시가의 수요가 올라가면 그만큼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이 쿠바로 오게 된 계기 중에 하나가 됐습니다.
담배 농장에서 일할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했고, 아프리카 노예가 쿠바로 끌려와 담배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전체 노예 노동력의 약 10~15%를 차지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담배 잎을 말아 시가를 수작업으로 제작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장인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세대를 이어 시가 장인의 명맥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노예 해방 이후에도 흑인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얀 가루가 금가루처럼 보였을 것이다.
쿠바에 100만 명의 대규모 흑인 노예가 수입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설탕입니다.
쿠바는 한때 '설탕 공화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세계에서 설탕을 가장 많이 생산한 나라였습니다.
어쩌다가 쿠바가 설탕을 제일 많이 생산하는 나라가 됐을까요?
I Terminal Sierra Maestra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이곳에 도착해서 경매로 팔려나갔다.
일단 쿠바는 사탕수수 재배에 최적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완벽한 열대 기후와 비옥한 토양 덕분에 고품질의 사탕수수가 아주 잘 자랐다고 합니다.
자연조건이 완벽해도 수요가 없으면 그냥 풀이 많구나 하겠죠?
17~19세기에 유럽에서는 설탕이 매우 인기 있는 사치품이었다고 합니다. 차, 커피, 케이크 등에 설탕을 넣는 문화가 발달하면서 설탕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건 당연했습니다. 설탕이 매우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마침 쿠바가 유럽 시장에 설탕을 수출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섬이기에 항구가 발달해 있어 수출이 쉬웠다네요.
폭발적인 수요를 맞춘 쿠바는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국이 됩니다. 19세기 중반에 쿠바는 전 세계 설탕 생산량의 약 삼 분의 일을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설탕은 쿠바 경제의 약 80%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거의 모든 경제 활동이 설탕과 관련이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한국으로 치면 삼성전자가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컸다고 보면 됩니다. 설탕이 쿠바였고 쿠바가 설탕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설탕공화국이라고 불렸습니다.
I 터미널 앞 바다 아프리카에서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은 무슨 기분이었을까?
이 크지 않은 섬에는 약 1,400개의 설탕 농장이 있었고 엄청난 양의 설탕이 생산됐습니다. 그래서 많은 노예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이런 설탕 산업의 부귀영화는 수많은 아프리카 노예들의 고통 위에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설탕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사탕수수를 낫으로 베어 수확해, 롤러 밀을 이용하여 사탕수수즙을 짜냅니다. 그리고 즙을 끓여 수분을 증발시키고 불순물을 제거해 맑은 설탕액으로 만듭니다. 설탕액을 식혀 건조하면 바로 우리가 아는 설탕이 됩니다.
I 시에라 터미널 앞 광장 이제는 관광객을 기다리는 올드카 택시가 있다. 18~19세기 근처에 흑인 노예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단순해 보일 수도 있으나 설탕 생산은 매우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사탕수수를 심고, 재배하고, 수확하는 과정부터 설탕을 추출하는 과정까지 기계가 없기 때문에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살인적인 작업 조건은 노예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사탕수수 재배는 더운 기후에서 이루어졌으며, 수확 시즌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0시나 12시까지 쉬지 않고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사탕수수는 수확 후 빠르게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수확기에는 거의 쉬지 않고 일해야 했다네요.
그렇다고 근무 여건이 좋았던 것도 아닙니다.
노예들은 허름한 오두막에서 20~30명이 함께 살았고 화장실과 목욕 시설이 거의 없어 위생 상태가 매우 나빴습니다. 그래서 말라리아, 황열병 같은 전염병이 자주 발생했다고 합니다. 또한, 식사가 매우 부족했기에 영양실조로 면역력이 약해져 작은 상처에도 감염되어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I 시에라 터미널 옆에 있는 페리 터미널 이제는 노동이 아닌 관광을 목적으로 이방인이 이곳에 내린다.
이 하얀 가루로 인해서 수 많은 사람의 인권이 처참히 밟혔습니다. 1840년대에는 약 400,000명, 쿠바 인구의 약 삼 분의 일이 노예였다고 합니다. 노예가 죽으면 다른 노예가 들어오게 되는 것이죠. 쿠바의 설탕은 달콤하지만 씁쓸하네요.
이래서 하얀 가루들은 다 조심해야 합니다.
스페인과 영국이 스페인 식민지에서 노예무역의 종식을 합의한 1820년 이후에도 쿠바는 6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했습니다.
농장주들은 막대한 이윤을 만들어주는 이 설탕 산업의 큰 핵심인 노예제 폐지에 매우 반대했습니다.
I 노을 지는 말레콘
이런 비참한 환경 속에서 흑인 노예들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슬픔과 고통을 노래로 풀기도 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쿠바 내에 있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더 알아보려 합니다.
이 시기에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