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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여행기 작성

현재 부산 사람들이 즐겨 찾는 복합문화공간 탐방기
그속에서 만날 수 있는 독일의 현대 미술
이번 부산 여행은 지금까지 우리가 즐기던 여행 스타일과 퍽 달랐다. 자주 가서 익숙해진 곳을 들르기 보다, 보다 새롭고 '현지스러운' 곳에서 탐방을 즐겼다. 그와 더불어 시간에 딱 맞춘 계획에 따르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기분이 내키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 우리의 눈에 우연히 전시회를 홍보하는 현수막이 들어온 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즐거운 저녁 시간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알록달록한 그림이 있는 현수막이 자연스럽게 눈길을 끌었다. 이 현수막에서 앞으로 우리가 묵을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복합문화공간에서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어차피 상세한 여행 계획은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되면 찾아가 보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대로 전시를 보러 갈 수 있었다.
현수막 정보를 따라갔더니,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한 블록 안쪽으로 들어온 곳에 '포디움다이브'라는 전시 복합 문화 공간이 있었다. 여러 번 이곳을 지나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아서 놀라웠다. 심지어 이곳은 맛집을 찾으면서 자주 걸었던 거리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사실에 깜짝 놀랐다. 역시 자주 봐야 그곳의 진가를 알게 된다.
우리의 흥미를 끌었던 작품은 포디움다이브의 지하 2층에 있는 아트갤러리에서 진행되는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독일 현대미술 거장 展-크리스토프 루크헤베를레'라는 전시에서는 현재 전 세계가 주목하는 독일 화가, 크리스토프 루크헤베를레의 작품 전반을 둘러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1972년 독일 오퍼파펜호펜에서 태어난 크리스토프 루크헤베를레는 현재 독일의 라이프치히를 무대로 하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현대미술 작가이다. 미국의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기금을 수여한 작가는 순수 회화를 공부하기 위해 1997년 라이프치히 예술대학(Academy of Visual Arts Leipzig)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라이프치히 화파의 거장 아르노 링크(Arno Rink) 교수에게 사사하며 석사 연구를 마쳤다.
이후 네오 라우흐(Neo Rauch), 로사 로이(Rosa Loy)와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과 함께 신 라이프치히 화파(New Leipzig School)의 일원으로 현대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화파는 라이프치히 예술대학 출신 작가들로 구성된 화파로, 화파에 속한 작가들은 구동독에 포함되어 있던 라이프치히에서 통일된 독일의 상황을 경험하며 독특한 독자적 작업 스타일을 구축했다. 새로운 매체와 신기술이 적용되는 현대 미술계에서 회화의 정통성을 이어나가는 화파로 인정받고 있다.
전시에서는 순수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크리스토프 루크헤베를레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기까지 여정을 보여주는 작품 12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광범위하고 과감한 재료의 사용을 통해 캔버스의 틀을 넘어선 영역으로 작품을 확장한 작가는 기존의 형식적인 미술 표현방식의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것과 동시에 본인의 시각언어를 확고히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다채로운 색감, 반복되는 패턴과 움직임, 직선적인 추상, 캔버스와 그 밖 조형물을 통해 현대미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울림을 선사하는 작가의 작품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벼운 충격을 선사했다. 특색 있는 작품과 더불어 작가의 말을 함께 배치해 두어 작품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한 장치들도 인상적이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는 관람객들이 그림 속 일부가 될 수 있도록 그림 안의 패턴을 그림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와 "나는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 사람들이 보는 것이 저마다 달라 모순이 생길수록 더 좋다."란 말이었다. 보통 예술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 치부하는 사람들을 설득해버리겠다는 의욕이 느껴지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도가 담겨 있어서인지 작가의 그림은 왠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가까이에서, 오래오래 작품을 감상하고 싶어졌다.
그의 그림을 현실적으로 평가하면 모순적인 것투성이다. 화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부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람의 몸에서 나온 듯한 무언가는 서로 더해지고 곱해지며 복잡하게 얽혀들어간다. 이런 그림의 요소들은 그저 우연히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의도에 따라 정교하게 만들어진 응축되고 단순화된 이미지들이라고 한다.
작가 본인의 시각 언어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흔적은 실크스크린과 목판화 등 전통적인 인쇄 방법을 활용하여 만든 작품에서 두드러졌다. 작품을 만들고 난 후 다시 작품을 분해해 배치하고 설계하는 과정을 가감 없이 느낄 수 있었고,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시각 언어들은 다시 새로운 작품의 재료로 쓰이고 있었다.
작품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거대한 규모의 인물화들이었다. 신라이프치히 화파의 화가로 주목받기 시작한 2000년 대 초반 작업한 초기 인물화와 더불어 2023년 신작 시리즈가 한 공간에 어우러져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압도적인 규모뿐만 아니라, 작품이 뿜어내는 강렬한 아우라 덕분에 경이로움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불편함이 느껴졌다. 이는 작가가 의도한 개념으로, ‘고장난 연극의 한 장면처럼 – 인물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절대적 낯섦’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작가는 작품의 예술성 자체보다 작품과 관객이 소통하며 새롭게 만들어가는 이야기와 경험에 집중했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고 보았고, 이를 통해 관객이 다양한 생각을 하도록 유도했다. 요즘 미술계에서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소통’을 이미 몇십 년 전부터 고민하며 작업해 온 그의 통찰력이 놀랍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밖에도 작가가 작업한 출판물과 조각 작품 등을 보며 그의 왕성한 창작 활동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작가의 다채로운 작품들은 아트 갤러리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3개 층 어디에서나 감상할 수 있어 더욱 인상적이었다. 자연스럽게 관람객이 전시에 흥미를 가지고 방문할 수 있도록 구성된 듯했다. 개방감 있는 공간 활용과 작가의 독창적인 작품 덕분에 전시와 공간이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끄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전시를 보고 난 후에도 여전히 여운이 남았던 우리는 전시장 옆에 마련된 아트숍을 구경하고, 인증 사진도 열심히 남겼다. 이어 아래층에도 들러보기로 했다. 갤러리나 공간의 맨 위층에서 작품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각도 또한 색다른 매력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래층에 도착해 사진을 찍으며, 이 공간 역시 전시만큼이나 매력적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여기에 서점 겸 라이프스타일 숍 '아크앤북'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책을 좋아해 서점 방문을 즐기는데, 아크앤북은 책뿐만 아니라 책과 연관된 다양한 상품도 함께 만나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시를 구경하고 마주한 곳이 평소에도 좋아하는 복합문화공간이라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전시를 관람했던 만큼 이곳 또한 열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관심 있던 책을 읽고, 다양한 제품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공간 곳곳에는 처음 보는 독특한 디자인의 제품과 흥미로운 주제를 담은 책들이 어우러져 있어 즐거움을 선사했다. 아트갤러리의 전시는 색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면, 이 복합문화공간은 친근한 분위기 속에서 일상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머무르다 보니, 그동안 여러 번 부산을 방문했음에도 이렇게 흥미로운 공간이 있다는 걸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더 자주 찾아와 이런 즐거움을 만끽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