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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여행기 작성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체 게바라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처참한 시기에 쿠바에 다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옵니다.
누군가는 독재자로 기억되고
누군가는 롤모델의 상징이 됐습니다.
바티스타 대통령의 횡포는
쿠바를 49년간 통치할 지도자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불안정한 쿠바 정치를 정리하러 온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는 별명이 많은데요.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카스트로를 쿠바의 독재자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그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The Lion of Havana, 즉 아바나의 사자라고도 부르죠.
이것 말고도 별명이 참 많은 남자입니다. 쿠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된 그가 왜 독재자이자 사자가 됐을까요?
I 아바나대학교 피델 카스트로가 공부했던 대학교다.
피델 카스트로는 1926년 8월 13일, 쿠바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스페인 출신의 부유한 사탕수수 농장주였고, 어머니는 그 농장에서 일하던 가정부였죠. 카스트로는 꽤 풍족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부터 권력과 불평등에 민감했다고 합니다. 성격은 고집이 세고 말도 많았다고 하네요. 그는 아바나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졌고, 부패한 쿠바 정권을 비판하기 시작했죠.
1952년, 카스트로는 정식으로 쿠바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합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의로운 청년”이라며 응원했죠. 하지만 선거가 열리기 직전, 바티스타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며 권력을 잡습니다.
카스트로의 정치 입문은 그렇게 허무하게 막혀버립니다.
그 순간부터 카스트로는 생각을 바꿉니다.
I 아바나혁명박물관 대통령의 집무실로 사용됐었던 아바나혁명박물관, 박물관에서는 그때 부패한 권력의 사치를 느낄 수 있는 방도 볼 수 있다.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의 해방을 위해서 무력 사용 외 다른 대안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1953년 7월 26일, 피델 카스트로는 젊은 청년 약 160명과 함께 쿠바 동부 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에 있는 몬카다 병영을 기습 공격합니다. 이곳은 바티스타 독재 정권의 상징 같은 군사기지였다고 합니다. 카스트로의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몬카다를 점령해서 무기를 확보하고, 쿠바 전역에 혁명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작전은 시작부터 꼬였습니다.
지도 부족, 통신 오류, 예상보다 강한 군사 저항.
결국, 작전은 실패합니다.
I 아바나 혁명광장 세계에서 매우 큰 도시 광장 중 하나로, 1959년에 일어난 쿠바혁명 이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법정에서 그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역사가 나를 사면할 것이다.”
그의 최후 변론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라, 쿠바 혁명의 선언문 같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을 조목조목 비판했다고 하니, 배포 하나는 정말 끝내주네요.
다행히? 징역 15년을 선고받습니다.
I 옛 국회의사당 거리 바티스타의 쿠바는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척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개 재판 후 사형은 국제 여론에 큰 부담이었다고 한다.
필자는 참 이 부분이 의아한데요.
본인에게 반기를 든 지도자에게 나름 15년이라는 선처?를 한 것이 신기합니다.
알아보니 바티스타 대통령은 카스트로를 사형시키는데 상당히 부담을 가진 것 같습니다.
카스트로는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었고 공개 재판에서 카스트로는 바티스타 정권의 부패와 불의를 조목조목 비판한 내용이 유출되어 쿠바에 퍼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카스트로를 죽이면 순교자 이미지가 생길 수 있고 사형은 국제 여론에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바티스타는 당시 스스로를 ‘질서를 지키는 합리적인 지도자’로 포장하고 싶어 했습니다. 카스트로를 공개 처형하면, 야만적인 독재자라는 이미지가 강해질 것을 우려했다고 해요. 그리고 바티스타는 카스트로를 그렇게 위험한 인물로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나름의 선처?는 곧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이자 비극의 시작이 됩니다.
I 시몬 볼리바르 동상 남아메리카의 독립운동지도자로 지금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를 독립시켰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영향을 준 인물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몬카다 기지를 공격했다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1955년에 바티스타 정권이 정치범을 사면하면서 그는 2년도 채 되지 않아 감옥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감옥 안에서도 그의 생각은 오직 혁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 혁명 동지들과 전략을 짜고, 외부로 편지를 보내며 여론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정치범 사면 이후 카스트로는 동생 라울과 함께 멕시코로 망명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인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체 게바라.
그는 의사였지만, 단순한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I 혁명광장의 체 게바라 내무부 건물 전면에는 체 게바라의 얼굴과 그의 표어인 "Hasta la Victoria Siempre(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체 게바라, 많이 들어보셨죠?
긴 머리, 베레모, 눈을 치켜뜬 강렬한 얼굴.
그는 혁명의 상징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의 전사, 또 어떤 사람에게는 위험한 반체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카스트로를 만나기 전 일생을 알아 보겠습니다.
I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혁명광장 수많은 혁명 시위, 퍼레이드, 투쟁 등이 열렸던 이곳은 지금 많은 관광객이 올드카를 타고 필수로 들리는 곳이 됐다.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체 게바라는 중산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는데, 특히 철학과 정치, 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철학과 정치라니... 남다르네요.
체 게바라는 천식을 앓고 있었는데 이게 계기였는지 의대에 진학합니다. 평범한 의사가 되려고 했겠지요. 하지만 그가 24살 때, 한 여행은 그의 삶을 통째로 바꿔놓습니다.
체 게바라는 친구와 함께 낡은 오토바이 한 대에 몸을 싣고 남미 대륙을 횡단했다고 합니다. 칠레,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를 여행했다고 합니다. 남미를 잠깐 다녀온 필자 입장에서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 당시 오토바이로 여행을 하다니 말이죠. 멋진 풍경을 보고 감탄 했던 필자와 달리 체 게바라는 여행 중에 본 것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가난, 착취, 불의였습니다. 광산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 병원도 못 가는 아이들, 농지를 빼앗긴 농부들이었죠.
그는 약만으론 이 사람들을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때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혁명’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여행을 마친 체 게바라는 의사 면허를 따지만, 병원에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카스트로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출처: Doopidea>
두 사람은 처음 만난 날 밤새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제국주의, 라틴아메리카의 현실, 무장투쟁의 가능성 등등 말이죠.
체 게바라는
“나는 이 혁명에 내 생명을 걸 준비가 돼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 체 게바라는 단순한 동지가 아니라
피델의 오른팔이 됩니다.
I 그란마 기념관 쿠바 혁명 영웅들이 멕시코에서부터 타고 온 배를 전시하고 있다.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그란마호’라는 작은 배를 구입합니다. 작고 낡은 요트였죠. 둘은 82명의 혁명 동지들과 함께 쿠바로 돌아갈 계획을 세웁니다.
이 82명은 단순한 무장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학생, 농민, 노동자, 의사, 심지어 교사까지. 모두가 쿠바를 바꾸겠다는 열망 하나로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멕시코에서 게릴라 전투 훈련을 받았습니다.
1956년 11월 25일, 그란마호는 멕시코 베라크루스 해안을 떠납니다. 82명이 탈 만한 배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지금 그 배는 그란마 기념관에서도 볼 수 있는데, 아무리 봐도 82명이 탈 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좁고 습하고, 물과 식량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예정보다 2일 늦은 12월 2일, 결국 쿠바 남부 해안에 도착합니다.
도착한 곳은 정글과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었습니다. 혁명가들이 진입한 그 산의 이름, 바로 그란마 산입니다. 하지만 도착 직후부터 고난이 시작됩니다. 군사기지 습격 계획은 이미 틀어졌고, 바티스타 군은 이들의 상륙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기다리고 있었죠. 정글은 습하고 험난했고, 도착한 지 며칠 만에 정부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82명 중 60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체포당합니다.
실제로 살아남은 건 겨우 20명 남짓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20명이 쿠바 역사를 완전히 바꾸게 됩니다.
I 그란마 기념관 그란마호뿐만 아니라 쿠바의 역사를 보여주는 다양한 군장비들이 전시되어 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그란마 산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게릴라 전쟁의 본거지를 마련합니다. 무기도 부족했고, 인원도 적었지만, 그들에게는 뚜렷한 목표와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혁명군은 낮에는 숨어 있고, 밤이면 기습 공격을 감행하는 게릴라전을 전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적을 만나면 정면 승부가 아닌, 치고 빠지는 전술로 혼란을 유도했죠. 놀랍게도 무기는 적군을 습격해 노획한 총과 탄약이 새로운 무기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군수물자는 주변 농민들이 몰래 제공해주었다고 하네요.
I 산카를로스 요새 혁명군이 성을 장악한 후 체 게바라가 이곳을 본부로 몇 달 간 사용했다.
바티스타 정부는 이 게릴라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산 속에서 점점 세력을 키워가는 혁명군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티스타 정권의 부패와 폭력에 신물이 난 국민들은 점점 혁명군 쪽으로 마음을 돌렸습니다. 혁명군이 지나가는 마을마다 지지자와 자원병이 생겼고, 심지어 정부군 일부도 반기를 들고 넘어왔습니다. 1958년 말, 혁명군은 산을 넘어 도시로 진격합니다.
그리고 1959년 1월 1일, 피델 카스트로는 동생 라울, 체 게바라 등과 함께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합니다.
그날 새벽, 바티스타는 몰래 비행기를 타고 망명길에 오릅니다.
수많은 국민이 거리로 나와 환호를 보냈고 쿠바는 또 다시 새로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20명으로 시작한 게릴라전은 지금도 많이 회자된다고 합니다.
I 쿠바 국기
기적 같은 혁명의 성공으로 쿠바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다만, 상대는 미국이었습니다.
세계 최강국이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만들어낸 국가였죠.
쿠바는 독립에 성공했지만 또 다른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위기는 지금의 쿠바를 만들었죠.
혁명 이후의 쿠바에 대해서 다음 여행기에 써내려가 보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