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새 여행기 작성
새 여행기 작성

그 사회주의 얘기하는 건가요?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혁명으로
쿠바는 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혁명 이후의 쿠바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체게바라의 생애에 대해 마무리하고 넘어가는게 맞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독립 이후에 그리 오래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체게바라는 죽을 때도 체게바라였다.
쿠바 혁명 이후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진짜 체게바라의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체게바라는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편히 쉬지 않았습니다.
그는 쿠바 정부에서 여러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외교무대에서도 활약했죠. 소련, 중국, 아프리카, 아시아… 그야말로 전 세계를 누비며 제3세계 연대를 강조했습니다. 1964년, 유엔 총회 연설에서는 미국 제국주의를 거침없이 비판했는데, 이 연설 덕분에 그의 국제적 명성은 더 높아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점점 달라지는 게 있었습니다.
카스트로가 쿠바 내부의 안정과 소련과의 관계를 중요시했다면, 체게바라는 마음이 달랐습니다.
그는 쿠바 혁명을 모델 삼아 다른 나라에서도 기적을 이루고 싶어했습니다.
결국 1965년, 체게바라는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쿠바를 떠납니다.
첫 목적지는 아프리카 콩고였습니다.
그곳에서 게릴라전을 도우려 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죠. 조직도, 주민의 지지도 부족했습니다. 말 그대로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볼리비아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도 체게바라는 게릴라전을 시도했지만,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농민들은 혁명보다는 생존에 더 집중했다고 합니다.
결국 1967년 10월 8일, 체게바라는 볼리비아 군에 체포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CIA 요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총살당합니다.
마지막 순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쏴라, 겁쟁이야. 너는 단지 한 사람을 죽이는 거다.”
이 말은 전설이 됩니다. 죽음조차 상징이 된 거죠.
체게바라의 죽음은 전 세계를 뒤흔듭니다. 그의 얼굴은 전 세계 젊은이들의 방 벽에 붙고, 반항과 이상주의의 아이콘이 됩니다.
쿠바 국민들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같이 죽을뻔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긴 피델 카스트로는 어땠을까요?
두 사람은 동지이자 형제 같은 사이였지만, 혁명 이후 우선순위가 갈리며 점점 멀어졌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카스트로는 체가 떠난 뒤에도 줄곧 그를 지지했고,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고 합니다.
아바나 혁명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추모 집회에서 카스트로는 체게바라를 “혁명의 영웅”이자 “영감의 원천”이라 칭하며, 그의 죽음이 오히려 세계 혁명을 더 강하게 만들 것이라 말했다고 합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는 나중에 뜻이 달라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추측도 나온다고 합니다.
필자 입장에서는 처음 만난 날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멕시코에서 쿠바에 도착해 절망적인 상황을 겪고 결국 혁명을 성공적으로 같이 이뤘던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고 들으면, 결과를 떠나 너무 가슴이 아플 것 같습니다.
진실은 그 둘만이 알고 있겠죠.
미국과 적이되다.
1959년 1월 1일, 쿠바가 뒤집힌 날입니다.
피델 카스트로가 마침내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린 날이죠.
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쿠바 전역은 환호성으로 뒤덮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환호성이 달갑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티스타 정권과 연결된 인사들은 당연하고 미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상류층과 기업가들이었죠. 그리고 대규모 농장을 소유한 지주들이었습니다.
혁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진짜 시험은 지금 부터였거든요.
카스트로는 곧바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2월엔 총리로 취임합니다.
국민들의 기대는 굉장히 컸다고 합니다. 하지만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고 해요. 쿠바는 여전히 설탕 산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고, 그 설탕은 대부분 미국에 팔아야 했죠. 정치적으로도 복잡했습니다. 혁명은 성공했지만, 경제와 사회는 여전히 불안정했거든요.
쉽게 말해, 꿈은 이뤘는데 현실이 발목을 잡은 셈입니다.
I 아바나를 떠나고 있는 크루즈 현재 많은 미국인들이 쿠바로 여행을 온다.
처음엔 미국과 잘 지내보려 했다고 합니다. 카스트로가 워낙 현실주의자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곧 분위기는 싸늘해졌습니다.
1959년, 쿠바 정부가 미국 기업의 설탕 농장과 공장을 국유화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발끈합니다. 건들이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들인 거죠.
결국 1960년, 미국은 제재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쿠바 설탕 수입 쿼터를 확 줄여버렸던 거죠.
쿠바 경제는 타격을 입었고, 쿠바 국민들의 반미 감정은 더욱 커졌습니다.
여기서 쿠바가 택한 길은 의외였지만,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선택은 지금까지 쿠바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카스트로는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지자, 카스트로는 곧장 소련과 손을 잡습니다.
I 아바나의 차아나타운 쿠바와 소련이 손을 잡으면서 중국도 자연스럽게 쿠바와 친해졌다.
1960년, 소련과 무역 협정을 맺고 설탕을 소련에 팔기 시작합니다.
대신 석유, 기계, 무기 같은 걸 받았죠. 체게바라도 이 시기에 소련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소련은 쿠바를 냉전의 전초기지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지원합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왜 하필 사회주의였을까요?"
카스트로가 원래부터 사회주의자였을까요?
재밌게도 다른 몇몇 나라와 다르게 쿠바는 그 상황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정치적인 사상은 그렇게 중요한게 아니었죠.사회주의 선택은 쿠바에게 굉장히 큰 메리트가 있었습니다.
미국이 경제 제재를 가하자 카스트로는 당장 다른 시장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이 부딪히던 냉전시대였고 새로운 시장은 미국과 반대 쪽에 서 있던 소련과 소련의 우방국들이 제일 현실적인 대안이었던거죠. 그들과 잘 어울리려면 같은 체제를 택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유화, 중앙 계획 경제 같은 사회주의 모델은 당시 쿠바의 재건 방향과도 맞아떨어졌습니다.
I 카리브해의 말레콘 이 바다는 그동안 수많은 박해의 통로였다.
그동안 쿠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이후에 오랫동안 미국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미국의 영향안에서 벌어졌던 다양한 일들로 인해 쿠바 국민들은 반미 감정이 쌓여있었고 그 분노를 이용해 카스트로는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묶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1961년, 카스트로는 드디어 선언합니다.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다.”
I 말레콘에서 낚시하는 쿠바 사람들
필자는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 선택이 정말로 '이상'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필요' 때문이었을까요?
현실과 신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카스트로의 그 마음속은 어땠을지,
지금 와선 아무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있습니다.
그날 이후 쿠바는,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거죠.
I 말레콘에서 마시는 술 노을 질 때면, 사람들은 말레콘에 나와 술을 마시곤 한다.
사회주의 선택은 쿠바에 큰 변화를 일으킵니다.
사회주의로 인해 실제로 쿠바를 떠난 유명한 브랜드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브랜드이기도 합니다.
바로 바카디입니다.
I 아바나에 있는 바카디 빌딩 우리가 알고 있는 바카디는 쿠바에서 탄생한 브랜드다.
바카디가 쿠바에서 탄생한 브랜드였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잠깐 설명드리면,
1862년 쿠바 산티아고의 조그만 양조장이 바로 바카디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양조장을 인수한 사람은 스페인에서 온 이민자, 돈 파쿤도 바카디 마소.
그는 럼을 만들었는데, 당시만 해도 럼은 싸고 거친 술이었습니다. 우리로 치면 막걸리? 정도겠네요?
하지만 파쿤도는 달랐습니다. 숯으로 걸러내고, 떡갈나무 통에서 숙성시키며 부드럽고 향긋한 화이트 럼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습니다.
이건 거의 럼계의 혁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럼은 천한 술에서, 상류층도 즐기는 세련된 술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바카디의 상징인 박쥐 로고도 이때 등장합니다.
양조장 지붕에 사는 박쥐들을 보고, 파쿤도의 아내가 제안한 거였죠.
쿠바 타이노 원주민과 스페인 전통에서 박쥐는 부와 행운의 상징이었거든요.
이후 박쥐는 바카디 그 자체가 됩니다.
바카디는 점점 성장합니다.
쿠바 전역으로 퍼지고, 다이키리, 모히토, 쿠바리브레 같은 칵테일을 통해 쿠바의 맛과 정체성을 세계에 알리죠.
그야말로 ‘쿠바를 마신다’는 느낌이었죠.
그런데 바카디는 단순한 술 회사가 아니었습니다.
정치적이기도 했어요. 1950년대, 바카디 회장은 바티스타 독재에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혁명이 성공하고 나자, 상황이 반전됩니다.
I 국유화된 바카디 빌딩 갑자기 내 회사가 국유화가 됐다면 무슨 느낌일까?
1959년 카스트로가 권력을 잡고 사회주의로 방향을 튼 뒤,
1960년, 바카디의 쿠바 내 자산은 몽땅 국유화됩니다.
그냥 국가가 가져간 겁니다.
그때 당시, 쿠바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고 합니다.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었고,
반대로 “저게 진짜 혁명이지”라는 주장도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바카디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혁명 전부터 제조법과 상표권, 자산 일부를 바하마와 푸에르토리코, 멕시코로 옮겨둔 상태였거든요.
결국 가문은 마이애미로 망명했고, 쿠바에서의 바카디는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대신 푸에르토리코에서 부활하죠.
세계 최대 규모의 럼 양조장을 세우고, 다른 유명한 주류 브랜드들을 인수하면서, 지금은 200개가 넘는 브랜드를 가진 세계 최대 가족 운영 주류 회사가 됐습니다.
지금 쿠바에서는 바카디를 거의 볼 수 없습니다.
병 라벨에도 “Puerto Rican Rum”이라 써 있고, 쿠바란 단어는 찾기 어렵죠.
그 시절, 혁명 전 쿠바의 향기는 박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죠.
쿠바의 바카디가 떠난 자리는
또 다른 럼이 자리를 차지 하고 있습니다.
I 아바나클럽 이름부터 쿠바를 대표하는 술이다.
바카디를 얘기하니 이 럼을 얘기 안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쿠바의 아바나클럽입니다.
아바나클럽
필자도 참 좋아하는데요.
쿠바를 돌아다니면 지나칠 수가 없는 럼입니다.
쿠바를 대표하는 럼이죠.
사회주의 얘기하다가 바카디에서 아바나클럽으로 넘어오다니,
이거 술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안할 수가 없습니다.
I 쿠바에서 아바나클럽 쿠바에서 식비보다 술값이 더 많이 나왔다.
아바나클럽도 바카디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창업주인 호세 아레차발라는 스페인에서 온 이민자였지만, 쿠바의 사탕수수 향에 빠져 양조장을 열었습니다.
그가 만든 럼은 시간이 지나 1934년 ‘아바나 클럽(Havana Club)’이라는 이름을 달게 됩니다.
미래를 본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름 잘 지었습니다.
아바나 클럽은 그렇게 단순한 술이 아니라, 쿠바의 라이프스타일을 병에 담아냈습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아바나 클럽은 쿠바에서 가장 잘나가는 럼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칵테일 바에서는 기본이고, 외국 손님들이 “쿠바에 왔으면 이거 마셔야지” 하며 찾던 술.
그만큼 쿠바의 정체성을 품고 있었죠.
하지만 카스트로의 혁명 이후, 1960년에 쿠바 정부는 아레차발라 가문의 양조장을 국유화합니다. 바카디와 똑같은 수순을 밟게 된거죠.
바카디처럼 재벌이 만든 럼 브랜드를 ‘국민의 술’로 만들었습니다.
이건 단순한 술 이야기가 아니라, 체제를 바꾸는 선택이었어요.
아레차발라 일가는 미국으로 떠났고, 아바나 클럽은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게 됩니다.
I 아바나클럽의 다양한 럼들 아바나클럽의 종류로는 '아네호 블랑코', '아네호 에스페시알', '아네호 레제르바', '아네호7아노스' 등이 있다.
1993년, 쿠바 정부는 프랑스의 페르노 리카와 손잡고 ‘아바나 클럽 인터내셔널’을 설립합니다. 한쪽은 공산국가, 다른 한쪽은 세계적인 주류 기업.
이 조합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아바나 클럽은 쿠바 전통 레시피를 지키면서도 글로벌 유통망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갑니다.
재밌는 점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럽의 바, 캐나다의 마트, 라틴아메리카의 해변 리조트에서는 아바나 클럽이 팔리고 있죠. 미국만 빼고요. 미국에서는 여전히 금지된 술입니다.
이 브랜드 하나가 쿠바-미국 외교 갈등의 상징처럼 되어버렸거든요.
그렇다고 아바나 클럽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잊힌 건 아닙니다.
미국 여행객들이 쿠바에 와서 제일 먼저 찾는 게 바로 아바나클럽이라고 합니다.
I 면세점에서 아바나 클럽을 만나면 벌어지는 일 공항의 면세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검은색 라벨로 되어 있는 7년산을 가장 좋아한다.(숙취 좀 있음)
지금 쿠바의 바에 가면,
아바나 클럽은 당연하다는 듯 칵테일 잔에 들어가 있습니다.
모히토든 쿠바 리브레든, 결국 그 맛의 중심엔 이 럼이 있습니다
바카디가 쿠바를 떠나 ‘망명한 럼’이 됐다면,
아바나 클럽은 쿠바에 남아 ‘체제의 럼’이 됐습니다.
I 노을지는 말레콘에서 마시는 아바나클럽
필자는 개인적으로
7년산을 좋아합니다.
가끔, 해외에 가서 면세점에 들려 사오곤 합니다.
가격도 다른 양주나 고량주에 비해 비싸지 않습니다.
그렇게 가져온 아바나클럽을 쿠바를 같이 여행했던 친구와 마시곤 합니다.
그럴 때면, 아바나의 노을지는 말레콘에서 아바나클럽을 마셨던 그 기억을 불러옵니다.
좋았던 기억들과 아쉬웠던 기억들 그리고 지금과 미래를 안주 삼아 마시고 토합니다.
도수가 쎈데 추억 보정으로 둘이 한 병 비우다가 골로 갑니다.
이제는 몸이 못 버티는 것 같습니다.
카스트로가 쿠바에 사회주의를 채택하면서
쿠바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 중 하나인 국유화를 얘기하다가
술 얘기로 너무 빠져 버렸네요.
사회주의로 인해 미국과 앙숙이 된 쿠바 이야기
다음 편에 계속 이어서 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