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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들이 많은 시간을 보냈던 '창덕궁'과 '창경궁'
창덕궁에서 만나는 왕과 왕족들의 휴식공간, '후원' 탐방기
조선시대 세워진 궁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경복궁'을 먼저 떠올린다. 축조된지 오래된 궁전인데다가 광화문과 더불어 가장 많이 알려진 궁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히 왕이 오래 머문 곳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근본 없는 고정관념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조선시대의 왕들이 더 많이 시간을 보낸 곳은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 역사 공부를 꽤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아는 것이 없다.
창덕궁은 태종 5년인 1405년에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지어졌다. 이궁은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잠시 머물던 별궁으로, 행궁, 행재소라고도 불리며 휴양지에서의 임시 거처 또는 전란 시에는 피난처로 사용된다.
창덕궁 또한 처음에는 잠시 머물기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지만 임진왜란으로 크게 훼손된 경복궁이 오랫동안 복구되지 못하면서 실질적으로 조선의 법궁으로 사용되게 된다. 이런 역사적 흐름을 대조전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경복궁에 비하면 규모는 다소 작았지만, 경복궁의 대조전과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일상 업무를 보던 편전(사무공간)인 선정전 역시 궁궐 내 주요 공간 중 하나였다. 조정 회의, 업무보고, 현재로 치면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과 같은 다양한 회의가 열렸던 이곳은 신주를 모시는 역할도 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내부에는 대조전과 마찬가지로 임금이 앉는 어좌와 왕위를 느낄 수 있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함께 있어 눈길을 끌었다.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창덕궁의 많은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얹은 건물인 점도 인상 깊었다.
270여 년 동안 조선 왕조 제1 정궁이었으며 마지막 임금인 순종까지 사용한 궁이다 보니 수많은 사건사고가 이곳에서 일어났다. 1910년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곳이 바로 대조전 부속 건물인 흥복헌이었다. 낙선재 권역은 광복 이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이 생활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근대에 이르러서도 왕족들이 머문 곳이기에, 궁 곳곳에 현대적인 시설도 엿볼 수 있다.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 지은 희정당은 자동차를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현관이 마련되어 있으며 내부에 유리창과 전등, 카펫과 더불어 유럽풍의 가구들이 갖추어져 있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엿볼 수 있는,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덕의 근본을 밝혀 창성하게 되어라'라는 뜻을 가진 이 궁은 다른 궁궐과 다르게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의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변화하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변모해온 궁은 왕실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함을 주는 구성을 갖췄고, 경희궁, 덕수궁 등과 같은 궁전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특성들로 인해 창덕궁은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조선시대 5대궁 중 유일하게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런 점을 알고 봐서 그런지 몰라도, 산책하는 내내 자연 지형과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창덕궁 동쪽에 위치한 창경궁 역시 한국다움을 느낄 수 있는 궁이었다. 원래 이곳에는 왕실의 작은 별궁이었던 수강궁이 있었으나, 1483년(성종 14년)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해 궁을 크게 중건하고 창경궁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창덕궁과 더불어 하나의 궁궐을 이루었고, 동궐(東闕)이라 불리며 후원의 정원도 함께 이용하는 등의 역사를 이어온 곳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일부가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이 설치되며 창경원으로 격하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복원 사업을 통해 과거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게 된 점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창덕궁을 구경하면서 창경궁을 들르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하여 들렀는데, 예상과 달리 이곳의 호젓한 분위기가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다. 이런 분위기가 느껴지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창경궁 역시 창덕궁과 마찬가지로 자연 지형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왕실의 생활에 편리하도록 궁궐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왕족의 일상생활공간이었던 통명전에서 자연스러움과 실용성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높다란 월대와 시원하게 트인 대청마루, 온돌방이 조화를 이룬 이곳은 다른 궁궐의 전각과 달리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독특하게 다가오는 이 공간에서 왕과 왕비가 실제로 생활했다는 생각을 하니, 문득 기분이 묘해졌다.
창덕궁과 창경궁에 이어 찾은 곳은 궁의 북쪽에 자리 잡은 정원인 '후원'이었다. 왕실 가족들의 휴식공간이자 연회를 베푸는 곳으로 활용되었던 이곳은 1406년(태종 6년)에 처음 조성되었고, 이후 인조, 숙종, 정조, 순조 등 여러 왕들이 개수하고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곳 또한 임진왜란 때 대부분이 소실된 아픈 역사가 있지만, 복원과 증축 작업을 통해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지는 공간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건물들과 조경 덕분에 이곳 또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어릴 적부터 학교 현장학습이나 가족 나들이로 자주 찾았던 터라, 후원의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후원’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 않게 느껴졌다. 이 낯섦이 마음에 걸려 검색해 보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비원’이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 시절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원', 또는 '후원',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어서 '금원'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창덕궁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머리가 띵했다. 그리고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후원의 아름다움은 골짜기마다 아늑하게 자리 잡은 아름다운 정자에 있다. 네 개의 골짜기에는 각각 부용지(芙蓉池), 애련지(愛蓮池), 관람지(觀纜池), 옥류천(玉流川) 정원이 자리 잡고 있다.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부용지를 시작으로 효명세자가 아버지를 위해 당시 양반가옥을 본떠 만든 연경당, 한적한 정취가 깃든 관람정 등, 후원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은 개방된 곳에서 은밀한 곳으로, 인공적인 정원에서 자연 그대로의 풍경으로 변화한다. 그 흐름은 뒷산인 매봉과 맞닿으며, 마치 자연 속 깊은 산책로를 걷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러한 점이 후원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이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 있는 궁궐 정원은 그저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사용되는데 반해, 후원은 훨씬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공간이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곳에서는 자연 속에서 풍경을 즐기며 학문을 논하거나 시를 짓는 지적인 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연못에서 낚시를 하거나 배를 띄우며 자연이 주는 여유를 누리는 체험도 진행되었다. 왕이 참관한 가운데 군사훈련이 행해지기도 했으며 화약을 이용한 불꽃놀이가 펼쳐지기도 했다. 왕과 왕비가 백성들의 생업이었던 농사를 체험하고 누에를 치기도 했던, 실용과 상징이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정원은 단순한 조경 공간을 넘어, 다양한 삶의 풍경을 담아낸 작은 우주처럼 느껴졌다.
조선 시대 궁궐을 직접 보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시작된 하루는, 창덕궁에서 창경궁, 그리고 후원까지 이어지며 예상치 못한 감동과 깊은 울림을 안겨주었다. 특히 내가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이 실제와 달랐다는 점은 적잖은 충격이었고, 동시에 그만큼 역사를 제대로 다시 배워야겠다는 다짐을 남겼다. 선조들이 남긴 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유산을, 단지 과거의 흔적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주 찾고 느껴야겠다는 생각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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