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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이회영

한말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여섯형제와 일가족 전체가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서전서숙' '신민회' '헤이그 특사' '신흥무관학교' '고종의 국외망명' '의열단' 등 국외 항일운동의 전반에 관여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하였으며 신채호, 이을규 등과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운동을 전개하였다. 출생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우당(友堂)이다. 1867년 서울 중구 저동에서 이조판서 이유승(李裕承)의 여섯아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의넷째 형이다. 이회영의 집안은 백사 이항복(李姮福)이 10대조 선조이며 여섯 명의 정승과 두 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로, 숙종 이후 노론의 견제 세력인 소론 출신을 배경으로하는 개혁 성향이 강한 가문이었다. 항일운동 1896년 항일의병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풍덕에 인삼농장을 운영하였으나 일본인의 계획적 약탈로 실패하였고 이상설, 이시영과 함께 을사오적(乙巳五賊) 암살을 모의하기도 하였다. 만주 용정촌 서전서숙 설립에도 참여하였으며 서울 상동교회 내 상동청년학원 학감으로 근무하면서 1907년 4월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발족하였으며,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파견을 주도하였다. 만주로 망명 헤이그 특사 실패 후 국외에 독립기지마련을 위해1910년 12월여섯형제와 가족, 노비 40여명의 일가족 전체가만주로 망명하였으며 이 때 여섯형제가 전재산(약 600억 원으로 추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으로 운용했다.이후 가족들은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鄒家街:중국 추씨 집성촌)에 정착하였으며 1911년4월 이주동포들의정착과 농업지도를 위한 '경학사'를 조직하는 한편, 1911년 5월 광복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

쏘이

쏘이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지은 베트남식 찹쌀밥.
쏘이는 고기, 생선, 채소, 과일, 콩과 같은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지은 베트남식 찹쌀밥이다. 베트남 북부 산악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던 음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지금은 베트남 전역의 식당이나 길거리 노점에서 아침식사나 후식으로 먹을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다.만드는 방법은 찹쌀을 4시간 정도 물에 담가 충분히 불렸다가 물기를 빼고 은근한 불에 수분이 마를 때까지 찐다. 이렇게 하면 쌀알이 뭉개지지 않고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부드럽고 찰기 있는 맛있는 찹쌀밥이 완성된다. 기호에 따라서 다양한 재료를 넣어 먹는다. 쏘이 찌엔 퐁(Xôi chiên phồng)은 코코넛 워터와 녹두, 설탕을 넣어 찹쌀밥을 지은 후에 으깨어 둥글게 만들어 기름에 튀긴 것으로 겉은 바삭하며 속은 부드럽고 찰기가 있다. 추운 겨울날에 먹는 별미로, 닭고기 구이와 함께 먹는다. 이 외에도 땅콩을 넣은 쏘이 락(Xôi lạc), 녹두를 넣은 쏘이 도 쌍(Xôi đậu xanh), 옥수수를 넣은 쏘이 응오(Xôi ngô), 검은 렌틸콩을 넣은 쏘이 더우 댄(Xôi đậu đen), 두리안을 넣은 쏘이 서우 리엥(Xôi sầu riêng), 닭고기를 넣은 쏘이 가(Xôi gà), 튀긴 생선을 넣은 쏘이 까(Xôi cá), 달걀을 넣은 쏘이 쯩(Xoi trung, Xôi trưng) 등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서 다양한 쏘이가 있다. 베트남 사람들은

사막 한가운데 있는 바위왕국, 페트라

사막 한가운데 있는 바위왕국, 페트라

요르단 남부에 있는 대상 도시유적.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산악도시이다. 나바테아인은 BC 7세기부터 BC 2세기경까지 시리아와 아라비아반도 등지에서 활약한 아랍계 유목민으로,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붉은 사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에 도시를 건설한 후 생활하였다. 이집트, 아라비아, 페니키아 등의 교차지점에 위치하여 선사시대부터 사막의 대상로를 지배하여 번영을 누렸다.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서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않은 도시가 있다. 협소한 통로와 협곡으로 둘러싸인 바위산을 깎아 조성된 페트라의 건물들은 대부분 암벽을 파서 만들어졌다. 이곳은 BC 1400~1200년 경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에 자리했으며, 구약에서는 '에돔의 셀라'라고 지칭하고 있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를 의미하고, 셀라도 히브리어로 '바위'를 뜻하니 페트라는 바위의 도시인 셈이다. 또한 이곳은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던 모세와 그 추종자들에게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BC 7세기 무렵 유목생활을 하던 나바테아인이 페트라를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나바테 문명이 세워졌다. 106년에는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땅을 빼앗겼다가, 하드리아누스가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하드리아누스의 페트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후 6세기경 발생한 지진에 의해 도시 전체가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812년 탐험가 부르크하르트가 잊혀진 페트라 도시를 발견하였고, 이후 그의 여행기를 통해 페트라가 유럽에 알려졌다.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가 되었으며,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영국의 시인 존 윌리엄 버건이 페트라를 '영원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라고 노래한 바 있으며,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마지막 성배"(1989)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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