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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헨조다로 고고유적

모헨조다로 고고유적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한 곳인 인더스 문명의 주요 유적지로서, 현재 파키스탄의 인더스강 서안 신드 지방의 라카르나 지구에 있다. ‘죽음의 언덕’이라는 의미의 모헨조다로 유적은 하라파(Harappa) 유적과 함께 인더스 문명권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유적으로, 인더스 강 유역의 카라치(Karachi)에서 380km 북쪽에 있다. B.C. 2500년 무렵에 건설된 것으로 보이며, 1922년 영국인 고고학자 존 마샬(John Marshall)과 인도인 고고학자 라칼다스 바너지(Rakhaldas Banerjee) 등의 지휘로 발굴이 시작되었다. 사막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므로 보존 상태는 양호하지만, 현재는 일부분만이 발굴된 상태이다. 유적의 크기는 2.5㎢이나, 당시에는 약 5㎢에 달했을 것으로 보이며, 7차례에 걸쳐 붕괴와 재건을 거듭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러스트]인더스 문명의 주요 도시 유적(일러스트) (항목 편집 시, 수정·삭제 금지) 모헨조다로는 철저한 도시 계획에 따라 건설된 도시로서, 다른 인더스 문명권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부분은 공공 구역으로 성채, 광장, 공회당, 제단 등이 들어서 있는 고지대이며, 그 밑으로는 일반 시민들의 주거 지역이 형성되어 있었다. 주거 지역은 바둑판 형태로 건설되어 있었으며, 각 구획의 크기는 대개 100ⅹ200m이며, 도로의 폭이 넓

알칼라 데 에나레스대학 및 역사지구

알칼라 데 에나레스대학 및 역사지구

스페인 마드리드자치구 알칼라데에라네스에 있는 역사도시 유적.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중세 대학도시 건축물이 보존되어 있어 1998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알칼라 데 에나레스는 프란시스코 히메네즈 데 시스네로스(Francisco Jiménez de Cisneros) 추기경이 16세기에 설립하였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계획된 대학도시로서 나중에 에스파냐인들이 아메리카대륙에 세운 도시 공동체의 전형이 되었다. ‘에스파냐 문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중세식의 구불구불한 자갈길로 이루어진 도시 중심부에는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알칼라데에나레스대학교는 1516~1520년에 건축하였다. 플라테레스코 양식으로 지어 총장의 거처로 사용된 콜레히오 마요르(Colegio Mayor)를 중심으로 하여 산타 카탈리나(Santa Catalina), 산 에우헤니오(San Eugenio), 산타 발비나(Santa Balbina), 산 이시도로(San Isidoro), 마드레 데 디오스(Madre de Dios) 등의 5개 단과대학으로 설립하였으며 나중에는 총 33개의 단과대학이 들어섰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쇠퇴하였으나 1977년부터 다시 개교하였다. 해마다 4월 23일이면 대학의 대강당 파라닌포(Paraninfo)에서 에스파냐 최고의 문학상인 세르반테스문학상의 수상식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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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정도전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문신 겸 학자.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였으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방원과 정치투쟁에서 살해되었다.  저서에《삼봉집》,《경제문감》등이 있다. 출생 1342년 고려 충혜왕 3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출생한 곳은 충청도 단양이다. 장성하여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당시 동문으로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이 있었다. 벼슬과 정치적 입장 1362년(공민왕 11)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듬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부친 상(喪)으로 사직하였다. 13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成均司藝)·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고 권신(權愼),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파 권문세족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정도전은 친명(親明)정책을 주장하였다가 친원파에게 공격을 받아 회진현(會津縣, 현 전라남도 나주)에 유배되었다. 1377년 유형을 마치고 고향 영주(榮州)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이성계와 만남 1383년 함경도 함주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가 그의 막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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