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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충청북도 충주시 단월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당. 사적 제189호이다.   1969년 11월 21일 사적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1978년에 중수하였다. 1679년(숙종 23), 억울하게 죽은 인조 때의 명장 임경업(林慶業)을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다. 측면 3칸 중 뒷면 2칸에 우물마루를 깔고 장군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앞면 1칸은 참배공간으로 꾸몄다. 2층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과 배흘림 형식의 둥근 기둥을 세우고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었다. 1727년(영조 3) 충렬사(忠烈祠)의 사액(賜額)을 받았다. 1747년(영조 23)에는 부인 전주이씨의 정렬비를 세웠으며 1791년(정조 15)에는 달천 충렬사비를 건립하였다. 임경업(1594∼1646)은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1594년(선조 27) 이곳 충주 대림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출중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하여, 1620년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을 거쳐 1622년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서훈되었다. 정묘(丁卯),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국란을 당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백마산성(白馬山城), 의주성(義州城) 등을 수축하여 국방강화에 전력하는 한편, 일관되게 반청친명(反淸親明)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청

아빌라 옛 시가지와 대성당

아빌라 옛 시가지와 대성당

스페인 카스티야레온(Castile-Leon) 자치지역 아빌라주에 있는 역사도시 유적. 이슬람세력을 막기 위한 성채도시로서 중세의 성벽과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198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성녀 테레사(Saint Teresa of Ávila, 1515~1582)와 성자 존(Saint John of the Cross, 1542~1591)이 태어난 곳이다. 해발 1,117m의 높은 지점, 바위언덕의 평평한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11세기에 무어인들로부터 에스파냐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특히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6세(Alfonso VI)의 사위인 레몽 드 부르고뉴가 1090년에 갈색 화강암으로 건축한 중세의 성벽이 유명하다. 직사각 모양의 기본 구조에 전체 길이 2.5㎢, 최대 너비 3m, 평균 높이 12m의 규모로서,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성벽은 사람 가슴 높이만한 흉장을 덧씌워 만들었으며 88기의 탑과 성문 9개를 설치해 놓았다. 성벽 동쪽에는 시토회 양식의 대성당을 지었는데, 방어를 위하여 장식을 최소화하였으며 창도 작게 만들었다. 성벽 안에는 여러 채의 귀족저택들과 엘살바도르대성당 등의 역사 건축물들을 세웠다. 아빌라는 옛시가지의 면적이 제한되어 있어 건축물 대부분을 성벽 밖에 지었다. 주교좌가 설치되어 흥미로운 교회 건축물이 많이 건설되었는데, 이중 12~14세기에 세운 대성당은 로마네스크양식에서 고딕양식으로 이행해가는 시기의 건축물이다. 흉장이 딸린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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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옹정제

청(淸)나라 제5대 황제(재위 1722∼1735). 군기처대신(軍機處大臣)을 두고 지방대관에게 주접(奏摺)이라는 친전장(親展狀)에 의해 정치의 실정을 보고하게 하였다. 토착민에게는 개토귀류(開土歸流)의 정책을 펴서 내지화(內地化)를 꾀하는 등 청나라의 지배체제를 확립하였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이름은 윤진(胤)이고,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제(憲帝)이다. 재위 때 사용한 연호에 따라 보통 옹정제라고 부른다.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이다. 강희제 말기에 이르러 황족과 조정의 신하 사이에 붕당의 싸움이 심하였으므로, 즉위 후 동생인 윤사(允祀) ·윤당(允禟) 등을 물리쳐 서민으로 삼고, 권신인 연갱요(年羹堯)·융과다(隆科多) 등을 숙청하여 독재권력을 확립하였다. 중앙관제상 종래의 내각은 형식을 중히 여겨 정무가 막혀 잘 처리되지 못하였으므로, 별도로 황제 측근의 군기처대신(軍機處大臣)을 두고, 군기처가 내각을 대신하여 6부를 지배하게 하였다. 지방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도 마음을 써서, 지방대관에게 주접(奏摺)이라는 친전장(親展狀)에 의해 정치의 실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황제 스스로 뜯어 보고 주필(朱筆)로 주비(硃批;비평)를 써서, 발신인에게 반송하여 지시·훈계를 내렸다. 뒤에 이것을 편찬한 것이 《옹정주비유지(雍正硃批諭旨)》이다. 지방관리의 봉급이 지나치게 적었으므로 그들에게 양렴전(養廉錢)을 지급하였다. 또 학교에 《성유광훈(聖諭廣訓)》이라는 교육칙어를 배포하여 시험 때에 베끼도록 하고, 지방에 남은 천민의 호적을 제거하여 양민으로 만들었다. 윈난[雲南]·구이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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