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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수원 화성

1796년 정조가 그의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성.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축성 당시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원 화성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뒤주 속에서 불운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풍수지리학상 명당 자리인 화산으로 이전하고 그 부근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 현재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또한 화성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그 필요를 절감한 수도 서울의 남쪽 방어기지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당쟁이 극심했던 정세를 쇄신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정조 자신의 원대한 구상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계획적 신도시로 건설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극진한 효심을 기반으로 군사, 정치, 행정적 목적까지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화성의 건설에 당대 동서양의 과학과 기술의 성과가 총결집되었고, 단원 김홍도를 비롯한 예술가들, 번암 채제공과 실학의 거두 정약용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그 결과 화성은 근대 초기 성곽건축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성벽의 외측을 쌓되 내측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화강석과 벽돌을 함께 축성의 재료로 사용한 전석교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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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쿠싸이무

싸쿠싸이무

타피오카로 만든 반죽 안에 돼지고기와 각종 향신료로 만든 속을 채워 찜기에 쪄낸 만두로, 타이의 인기 있는 간식이다. 타피오카로 만든 반죽에 돼지고기 혼합물로 속을 채워 쪄낸 만두이다. 타이의 인기 있는 간식이자 애피타이저로 노점상과 시장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크기는 호두만 하며 식감이 매우 쫄깃하다. 타이어로 ‘싸쿠(สาคู)’는 사고야자를 의미하며, ‘싸이(ไส้)’는 속을, ‘무(หมู)’는 돼지를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사고야자전분을 활용하여 만들었으나, 오늘날에는 타피오카를 활용하여 싸쿠싸이무를 만든다. 가족 모임이나 칵테일 파티 등에 활용하기에 좋으며, 상추, 실란트로, 신선한 타이 칠리고추, 으깬 땅콩 등을 곁들여 먹는다.  조리법 상추, 실란트로, 실란트로 뿌리, 마늘, 양파는 잘게 다져 준비한다. 땅콩은 팬에 볶은 뒤 갈아 놓는다. 또 다른 팬에 다진 마늘, 실란트로, 양파를 볶는다. 여기에 다진 돼지고기를 넣고 볶다가 고기가 익으면, 간 땅콩, 설탕, 피시 소스를 추가하여 잘 섞으며 볶는다.  작은 크기의 타피오카 펄을 물에 충분히 불린 뒤 체에 받쳐둔다. 앞서 볶아둔 재료가 조금 식으면 작고 둥근 완자 형태로 만들어 놓는다. 불려둔 타피오카 펄로 완자를 감싸준다. 찜기 위에 바나나 잎을 올리고 그 위에 마늘 오일을 발라 타피

알칼라 데 에나레스대학 및 역사지구

알칼라 데 에나레스대학 및 역사지구

스페인 마드리드자치구 알칼라데에라네스에 있는 역사도시 유적.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중세 대학도시 건축물이 보존되어 있어 1998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알칼라 데 에나레스는 프란시스코 히메네즈 데 시스네로스(Francisco Jiménez de Cisneros) 추기경이 16세기에 설립하였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계획된 대학도시로서 나중에 에스파냐인들이 아메리카대륙에 세운 도시 공동체의 전형이 되었다. ‘에스파냐 문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중세식의 구불구불한 자갈길로 이루어진 도시 중심부에는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알칼라데에나레스대학교는 1516~1520년에 건축하였다. 플라테레스코 양식으로 지어 총장의 거처로 사용된 콜레히오 마요르(Colegio Mayor)를 중심으로 하여 산타 카탈리나(Santa Catalina), 산 에우헤니오(San Eugenio), 산타 발비나(Santa Balbina), 산 이시도로(San Isidoro), 마드레 데 디오스(Madre de Dios) 등의 5개 단과대학으로 설립하였으며 나중에는 총 33개의 단과대학이 들어섰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쇠퇴하였으나 1977년부터 다시 개교하였다. 해마다 4월 23일이면 대학의 대강당 파라닌포(Paraninfo)에서 에스파냐 최고의 문학상인 세르반테스문학상의 수상식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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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폰 비스마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독일의 정치가. 프로이센 총리로 ‘철혈정책’으로 독일을 통일했다. 보호관세정책으로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을 도왔으나 전제적 제도를 그대로 남겨놓았다. 통일 후 유럽의 평화 유지에 진력하였으며 여러 동맹과 협상 관계를 체결했다. 독일 제국의 초대 총리로 독일 통일과 국가 발전에 큰 공적이 있다. 프로이센의 쇤하우젠에서 융커(지방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괴팅겐과 베를린 두 대학에서 공부한 후 프로이센의 관리가 되었다(1836∼1839). 호전적인 기질로 대학 시절 친구들과 싸움이 잦았으며, 처음 맡은 베를린 법원 견습 서기직도 성격에 맞지 않아 자주 자리를 이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847년 독실한 신자였던 여성과 결혼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독실한 신도가 되었으며 내면의 변화가 시작되었고 이후 프로이센 연방의회 의원이 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베를린의 3월혁명(1848) 때는 반혁명파로 활약했고 보수당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었다. 혁명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1851∼1859)로 임명되어 프랑크푸르트에 부임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와의 협조를 통한 독일의 통일을 주장하였지만 결국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 후에는 오스트리아와 자주 대립하였다. 1848년 전후에 보수적인 정치가에 불과하였던 그는 러시아 주재대사(1859), 프랑스 주재대사(1862)가 되면서 안목을 넓혔고, 1862년 국왕 빌헬름 1세가 군비 확장 문제로 의회와 충돌하던 시기에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취임 첫 연설에서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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