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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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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치가. 항일전이 발발한 후에는 공산당의 대표로서 국민 정부의 국방 위원회등 요직에 있으면서 국공관계의 처리를 맡아 탁월한 정치적·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문화 대혁명을 거쳐 최후까지 공산당에서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면서 국내외의 중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였다. 장쑤성[江蘇省] 화이안[淮安]에서 출생하였다. 지주·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1913년 톈진[天津]의 난카이[南開]중학에 입학하였으며 졸업한 뒤에도 계속 공부하기 위하여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등에서 청강하기도 하였다. 톈진의 난카이대학 재학 중 5·4운동에 참가하여 투옥, 퇴학당하였고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22년 중국공산당 파리지부(支部)를 창설하였고, 런던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귀국하였다. 1924년 황푸[黃織]군관학교 정치부 대리에 발탁되었고, 1927년 북벌군에 호응하는 상하이[上海] 봉기를 지도하였다. 그 후 장제스[蔣介石]의 반공 쿠데타를 피하여 우한[武漢]으로 가서 노동자의 무장규찰대(武裝糾察隊)를 조직, 난창[南昌]폭동을 지도하고, 광저우[廣州] 코뮌을 조직하였다. 1931년 말 광시성[廣西省]의 소비에트구(區)에 들어가 군사부장·제1방면군 정치위원으로서 정보공작과 국민당군의 포위에 대한 전략을 지도하였다. 1936년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서 장정(長征)에 참가하였고, 시안[西安] 사건 때에는 국공(國共)내전의 정지와 항일연합전선의 결성에 힘썼다. 항일전이 발발한 후에는 우한·충칭[重慶]에서 공산당의 대표로서 중화민국 정부의 국방위원회·군사위원회 위원 등 요직에 있으면서 국공관계의 처리를 맡아 탁월한 정치적·외교적 수완

키지 포고스트

키지 포고스트

러시아 북서부 카렐리아(Karelia) 공화국 오네가(Onega) 호수에 있는 작은 섬. 18세기에 만들어진 교회를 비롯하여 정교하고 과학적인 목조건축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목조 건축물들을 볼 수 있다. 199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키지 포고스트는 길이 7km, 넓이 0.5km의 섬이며, 야트막한 초원으로 뒤덮여 있다. 섬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예수변모교회와 포크로프스카야 교회(Pokrovskaya , 마리아 보호 교회)이다. 두 교회는 동서로 나란히 인접해 있으며, 양파 모양의 장식용 지붕을 겹겹이 이고 있다.  동쪽에 있는 건물은 ‘러시아 목조건축의 꽃’이라 불리는 예수변모교회이다. 양파 모양의 돔 22개가 전체적으로 피라미드 모양을 이루며 6층으로 배치되어 있다. 마지막 돔 지붕까지의 높이는 37미터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돔 지붕의 크기가 커진다. 1693년에 처음 건설되었으나, 벼락을 맞아 붕괴된 뒤 1714년 재건되었다. 건물 내부에는 102개의 바로크풍의 성상이 그려져 있는 성화벽이 있다. 서쪽의 포크로프스카야 교회도 유사한 양파 모양의 돔 지붕을 갖고 있으나, 겹겹이 층을 이루지 않고 중앙의 대형 돔을 중심으로 8개의 작은 돔들이 배치된 좀 더 단순한 형태이다. 중앙 돔까지의 높이는 27미터이며 1764년에 세워졌다. 두 교회 사이에는 8각형의 목조 종탑이 놓여 있는데,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된 것을 지속적으로 재건해왔으며, 남아 있는 것은 1862년에 마지막으로 복원한 것이다. 두 교회와 종탑 모두 북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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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한용운

독립운동가 겸 승려, 시인. 일제강점기 때 시집《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주요 저서로 《조선불교유신론》 등이 있다.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이다.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8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이듬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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