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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여행기 작성

벌써 싱가포르 여행의 마지막날이다. 야심차게 싱가포르 여행의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왔지만 아직도 하지 못한 일이 수두룩한데 이걸 어쩐담. 유니버설 스튜디오도 못가봤고 나이트사파리 투어도 하지 못했다. 하루종일 곳곳을 바쁘게 돌아다녔음에도 갈곳 많은 싱가포르를 단 며칠만에 여행한다는 건 역시 역부족이었다. 마음이 급해진다.
떠나기 전 한곳이라도 더 가볼 수 있게 조금 더 바쁘게 다니기로 했다. 다행히 한국행 비행기는 새벽 출발이라 온전히 하루가 남아있다.
그나마 선선한 오전에는 야외에서 걸어다녀야 하는 보타닉 가든을 가고 오후에는 시원한 실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가기로 했다. 공항에도 출발시간보다 몇시간 앞서 도착해야 한다. 바로 2019년 만들어진 주얼창이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주얼창이는 공항과 연결된 쇼핑센터로, 실내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폭포가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맡겼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실내폭포가 있는 주얼창이. 공항 출발전 필수 코스다
결론적으로 난 오후의 박물관 관람을 포기했다. 보타닉 가든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보타닉 가든은 바쁜 도심 한가운데 놓여진 선물 같은 공간이다. 푸릇푸릇한 초원속에서 수많은 식물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봄날 오후의 나른함처럼 몽롱하고 신비스러웠다. 정원 숲길을 천천히 걷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책을 보기도 하고, 그저 멍하니 녹색 풍경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계획된 시간을넘기고 말았다. 더 이상 다른 곳을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여행은 내가 좋아하는 걸 해야 하는 시간이라면, 보타닉 가든에서의 시간이야말로 더없이 좋은 여행의 순간이었다.
싱가포르의 마지막날, 난 싱가포르 여행에서 가장 여유롭고 한가한 여행을 즐겼다.
아무래도 이번에 못다이룬 여행 버킷리스트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보타닉 가든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이다.
싱가포르 최초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마리나베이의 가든스바이더베이를 봤는데 굳이 정원을 또 볼 필요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 섣부른 판단이다. 가든스바이더베이가 잘 조성된 인공적인 정원이라면 보타닉 가든은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 자체다. 가든스바이더베이의 화려함은 없지만 순수하고 청초하다. 가든스바이더베이가 유행의 한 가운데 있는 화려한 20대라면 보타닉 가든은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남아있는 순수한 어린시절이다.
보타닉 가든은 MRT보타닉 가든역에 내리면 된다.
입구에 정원 지도가 있지만 지도 자체는 무의미하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그저 초록 세상이 이끄는 데로 걸어가면 된다.
방금전까지 북적대던 MRT를 탔던게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보타닉 가든 속 세상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가벼운 배낭과 물한병을 들고 산책하는 여행자들과 조깅을 하는 현지인들만이 유일하게 고요함을 깨트린다. 싱가포르는 무더운 날씨인데도 땀흘리며 조깅하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에어팟을 끼고 레깅스를 입고 조깅하는 사람들을 보다보면 운동을 싫어하는 나도 이참에 운동을 시작해볼까 라는 동기부여가 된다. 물론 결코 실행에 옮길 일은 없지만.
새벽이슬을 머금은 잎사귀
김훈은 <자전거 여행>에서 이렇게 숲을 예찬했다.
'숲의 힘은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살려내는 것이어서
숲속에서 시간은 낡지 않고 시간은 병들지 않는다.
이 새로움이 숲의 평화일 터인데, 숲은 안식과 혁명을 모두 끌어안는 그 고요함으로서 신성하다'
녹색 식물들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고, 습하고 더운 바람 바람속에서 전해지는 숲의 향기는 기분좋은 설레임을 준다.
숲의 향기에 취하다보니 어느새 보타닉 가든을 벗어나버리고 말았다. 다시 보타닉 가든 입구를 찾으려고 했더니, 길 주변으로 의외의 멋스러운 공간이 나타난다. 길을 잃어버려도 이렇게 멋진 곳이 나오다니 참 기분좋은 하루다. 알고 보니 이곳은 대학과 각종 관공서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직장 근처에 이런 멋진 정원이 있다면 출근할 맛이 조금은 더 있지 않을까.
보타닉 가든 주변의 멋진 건물들
보타닉 가든 중심에는 기념품숍이나 카페 등 편의시설이 있다. 걷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지하철역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도 있다.
특히 카야잼, 바챠커피 등 '싱가포르의 국민 기념품'이 식상하다면 보타닉 가든 기념품숍을 추천한다. 나무와 식물을 가지고 이렇게 멋진 기념품을 만들 수 있는지 감탄할 정도로 독특하고 아름답다.
보타닉 가든 기념품숍
한참을 정원 산책에 빠지다보니 어느새 출출해졌다.
보타닉 가든 안에도 멋진 레스토랑이 있지만 보타닉 가든에 왔으니 요즘 싱가포르의 명소라 불리는 뎀시힐에 가기로 했다. 뎀시힐은 보타닉 가든의 출입구 중 홀렌드 로드쪽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다.
뎀시힐에 도착하니 숲속의 요정이 사는 집처럼 예쁜 카페들이 숲 속 곳곳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뎀시힐이 왜 요즘 싱가포르의 핫플레이스라고 불리는 지 알것 같다.
그중 가장 유명한 PS카페로 향했다. PS카페는 싱가포르 곳곳에 체인점이 있지만 뎀시힐 점이 가장 유명하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카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덥기도 하고 통창으로 숲 뷰를 볼 수 있어 실내에 앉고 싶었지만 자리가 없어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하지만 아쉬움도 잠시, 숲에서 불어오는 향기와 새소리들을 들으며 더없이 행복한 한끼를 먹을 수 있었다.
여행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시간이라면,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시간으로 가득한 하루였다.
뎀시힐에 가는 육교에서 바라본 거리풍경
뎀시힐에서 가장 유명한 PS카페
뎀시힐의 감각적인 거리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