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통합검색

메인 주요 글

주요 아티클

용감수경 권3~4

용감수경 권3~4

요(遼)나라 승려 행균(行均)이 997년(요나라 성종 15)에 펴낸 한자(漢字) 자전(字典). 국보 제291호이다. 1997년 1월 1일 국보 제291호으로 지정되었다. 목판본으로 크기는 26.1×19.4cm(3권), 25.8×19.7cm(4권)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원래 중국의 자전은 양(梁)의 고야왕(顧野王)의 옥편과 같이 부수별(部首別)로 된 것과, 수(隋)의 육법언(陸法言)의 《광운(廣韻)》과 같이 사성(四聲)의 음운별로 글자를 배열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행균의 이 자전은 부수별로 먼저 배열하고 또 같은 부수 안에서는 운별로 배열하여 두 가지를 병용하는 방법을 취하였고, 정자(正字) 외에 이체(異體) ·속자(俗字)까지도 전부 망라하여 해설을 붙인 것이다. 본자(本字)가 2만 6430여 자이며 주(註)가 16만 3170자에 달하여 자전으로서 매우 귀중할 뿐만 아니라 요대의 음운을 연구하는 데 유일한 자료이다. 행균은 승려였으므로 특히 불전에 나오는 글자에 대하여 더 주의깊게 살폈다. 이 점은 이 자전의 특색이라 하겠다. 이 책의 원형을 가진 《용감수경》은 이미 없어지고 남송(南宋) 때 《용감수감(龍龕手鑑)》으로 이름을 바꾸어 낸 것이 있어 한국에 남아 있는 이 책은 원형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또 고려시대의 복각본(複刻本)이 남송시대까지 내려가지 않은 점과 요나라 당시에 간행했을 가능성이 높은 점으로 미루어 요나라 멸망 전인 11세기로 추정할 수 있다.

우아치낭고 아 라 베라크루사나

우아치낭고 아 라 베라크루사나

적도미를 마리네이드하여 토마토, 고추를 첨가한 소스를 곁들여 구워낸 음식으로, 멕시코 베라크루스주의 전통적인 요리이다. 마리네이드한 적도미를 토마토, 고추를 첨가한 소스에 조리한 음식이다. 멕시코 베라크루스주의 전통적인 요리이다.이때 스페인어로 우아치낭고(huachinango)는 멕시칸 레드 스내퍼(Mexican red snapper) 즉, 멕시코산 적도미를 뜻하며, 베라크루사나(Veracruzana)는 ‘베라크루스산’을 뜻한다. 적도미는 인기 있는 열대어 어종으로 아프리카 해안, 플로리다, 중남미의 따듯한 바다에서 잡히며 섬세한 맛에 지방이 적은 흰살 생선이다. 우아치낭고 아 라 베라크루사나는 일반적으로 구운 감자와 흰 쌀과 함께 먹는다. 조리법 적도미는 깨끗이 씻어 손질한다. 볼에 적도미를 담고 라임 주스, 넛맥, 다진 마늘, 소금, 후추를 넣어 마리네이드한다. 큰 프라이팬에 오일을 두른 뒤 잘게 자른 양파를 넣어 반투명해질 때까지 볶아준다. 여기에 다진 마늘을 넣어 볶는다. 여기에 다진 토마토를 넣어 잘 섞어 조리하다 다진 고추 혹은 피망과 타임, 고수, 월계수 잎, 오레가노, 케이퍼를 넣고 잘 섞어준다. 여기에 소금, 후추로 간하여 소스를 완성한다. 베이킹 팬에 마리네이드한 생선을 담고 그 위에 소스를 덮어준다. 190℃로 예열한 오븐에 생선을 넣고 약 35분간 구워낸다. 완성된 요리는 접시에 담아 익힌 쌀, 구운 감자를 곁들여 먹을 수 있다. 영양정보 적도미는 칼로리가 낮고 단백질이 풍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 면벌부 판매에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교황에 맞섰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어 통일에 공헌하였으며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써 '루터파 교회'를 성립하였다. 1483년 11월 10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틴은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도보여행 중 낙뢰(落雷)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司祭)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벌부(免罰符)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517년 ‘95개조 논제’가 나왔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破門勅令)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다

포토커뮤니티

지구촌 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