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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JU
HYUNAEWON
성산일출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름다운 카페가 하나 있다. 영국 잉글랜드 남부 사우샘프턴에 있는 도시의 이름을 따온 '이스틀리 카페'가 그곳이다. 2만 평 이상의 정원을 보유하고 있어 봄이면 수국이 피고, 가을이면 핑크 뮬리가 살랑거린다. 가을이 오니 오랜만에 찾고 싶은 마음이 컸던 이스틀리 카페. 하지만 지금은 <현애원>과 합쳐져 카페와 함께 정원을 운영하는 것 같았다. 커피와 함께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이스틀리. 이곳에서 오랜만에 불어오는 자연의 시원한 공기와 분홍빛 가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핑크빛 가을
현애원
금백조로를 따라 성산으로 달렸다. 원래의 목적지는 오랜만에 오르고 싶은 성산일출봉이었고, 그와 동시에 우뭇개 해안까지 다녀올 계획이었다. 그러다 문득 가을의 이스틀리가 궁금해졌다. 여름날, 커다란 팽나무의 그늘 아래 펼쳐져 있던 수국과의 추억은 올해의 여름을 환상적으로 선물해 준 곳이기에 더욱 궁금했다. 그러던 이스틀리는 현애원과 하나가 되어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들여보단 현애원. 방대한 규모의 초원 위로 정원이 생기고, 알록달록한 수국과 그 사이에서 사진을 찍는 중국인 관광객과 여러 사람들이 사라진 이곳엔 또 다른 무언가가 자리를 채웠다. 바로 핑크 뮬리. 가을바람에 살랑이는 분홍빛의 핑크 뮬리가 이곳 위에서 살랑이고 있었다.
한적한 가을
점심이 가까워진 시각, 현애원은 다소 한적했다. 가을의 현애원은 초여름의 현애원과는 다르게 비교적 한적한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핑크 뮬리를 만나기 전에 가장 먼저 만난 팜파스는 키를 훌쩍 넘는 모습으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살랑였다. 요새 가을과 관련된 곳을 여행할 때면, 팜파스 그래스를 많이 만나게 되는데 현애원의 팜파스 그래스는 다른 곳과는 남달랐다. 윤기가 났고, 빛이 났다. 잘 관리되어 있는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점심이 가까워진 시각이었음에도 현애원은 한적했다. 첫 손님인 건지, 나밖에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나밖에 없었다. 나를 위해 공간을 내어준 것처럼 느껴졌다. 이스틀리 카페에서 음료 하나를 주문하고, 실내 정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던 나는 야외 정원을 산책하기 위해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국이 사라진 정원 대부분은 조금은 심심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그곳에 피어난 코스모스와 팜파스 그래스는 그곳을 채우며 위안으로 다가왔다.
분홍빛 핑크 뮬리
신선한 가을바람을 조금 더, 아니 그저 길게 느끼고 싶었던 나는 이스틀리 카페에서 잠시 나와 발길이 닿는 대로 정원을 자유롭게 걸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을 빌린다는 것은 이런 기분인 걸까.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왠지 선택받은 기분이 들면서도 고요함이 퍽 좋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너무 고요해 쓸쓸하다는 느낌과 조금은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이 동시에 드는 것은 역시 '혼자'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겠지. 팜파스 그래스 군락지를 넘어서 시야에 들어오는 분홍빛. 아직은 완벽히 자라지 않아 희끗희끗 들어차는 분홍빛이 강했다. 곧 이 분홍색이 조금 더 밝게 빛나며 아름다워지겠지라는 생각에 이번 가을이 오래 머물기를 기대했다. 정원의 가장 북쪽에 자리한 핑크 뮬리 정원. 분홍빛을 막 발산하기 시작한 핑크 뮬리가 바람결에 이리저리 살랑였다.
작지만 혼자기에 커다란
이곳 이스틀리와 현애원은 다른 곳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다. 워낙 제주에 큰 규모의 군락이 많기에 더 그랬다. 휴애리 자연생활공원도 그렇고, 상효원과 허브동산도 마찬가지로 큰 규모이다. 그런 곳들에 비하면 확실히 작지만, 혼자기엔 너무나도 큰 곳이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이 아름다운 공간을 홀로 만끽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이었다. 해가 정면으로 비치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핑크 뮬리의 분홍빛은 더욱 아름다운 색으로 발색되었다. 그렇게 분홍빛 가을을 카메라 프레임에 담아냈다. 이곳 현애원과 이스틀리에서 경험한 행복. 이 또한 작지만 혼자기에 컸다.
다시 제자리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핑크빛으로 물든 핑크 뮬리와 함께 가을을 만끽하고 제주하면 떠오르는 야자수 나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금 현애원에서 이스틀리로 돌아왔다. 이스틀리의 실내 정원을 마지막으로 구경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먼저 주문했던 커피를 마시며 실내 정원으로 향했다. 실내 정원은 현애원의 정원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이스틀리 카페 정원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하나, 둘 보였다. 이들도 곧 가을을 만끽하기 위에 바깥으로 향하겠지라는 생각. 정원으로 이루어진 나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셨다. 제주에서 산다는 것은 이런 거겠지. 원하는 곳을 한 시간 내로 갈 수 있고, 그곳에서 자연을 만끽하고, 커피 향과 함께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내면서 힘든 것도 있고, 바빠서 놓치는 것도 많지만 이런 행복은 또다시 제주에 살길 잘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이스틀리에 다시 오길 잘했다. 하마터면 정원 속 숨겨져 있는 분홍빛 아름다움을 놓칠 뻔했으니 말이다. 여름날의 아름다웠던, 다채로웠던 수국과 그 풍경으로만 기억하던 내게 이곳은 분홍빛이 추가되어 가을 하면 핑크 뮬리로 흔들리는 이스틀리도 기억에 남을 것만 같았다. 성산일출봉과 우뭇개 해안을 여행하기 위해 떠났던 이곳 성산.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현애원이었다. 만약 성산을 여행한다면, 이곳 이스틀리로 여행해 보자. 그러면 분명 분홍빛으로 가득한 가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