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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엔 풍도에 가야지"
철새도 아니면서 봄바람 불면 나의 자기장은 풍도를 향한다.
어느 곳에 카메라를 들이밀어도 작품을 만들어주는 섬이기 때문이다.
야생화로 치장한 모습은 훌륭한 모델이 되고, 하늘과 함께 붉게 물드는 섬의 서쪽 붉배 역시 매력적이다.
기침 천식을 비롯해 혈관, 소화기관 등 온갖 좋은 효능이 있다는 사생이나물 (전호나물)이 나오는 때이기도 하다.
사생이 나물은 다른 나물과 다르게 삐딱하게 10월에 싹을 틔운다. 추운 겨울 도도하게 푸른 상태로 있다가 5~6월에 열매 맺고 한 생애를 마감한다. 아무 데나 나지 않고 울릉도나 흑산도, 풍도 등 몇몇 섬에서 작은 규모로 자란다. 야생화만큼 흔하게 피는 사생이 나물은 풍도 주민들의 쏠쏠한 용돈벌이 수단이 된다.
풍도행은 이번이 네 번째이다. 매번 따뜻했고, 야생화는 찾아다닐 필요 없이 지천이어서 그저 배표 구할 일만 신경 썼다. 하지만 그녀 역시 도도한 섬 각시였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일행들과 토, 일 주말로 일정을 계획했다. 인원이 20명 가까이 되다 보니 인솔하는 입장에서 신경이 쓰여 날씨를 체크하는 중 배가 뜨지 못할 가능성이 50%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끼 식사를 부탁한 풍도 민박집 통신은 기상청보다 정확한 편이다. 전날 오후 6시쯤 모바일 승선권이 도착하면 배가 뜰 가능성은 80%라고 했는데 너도나도 승선권을 받았노라고 인증 사진을 올려댔다. 걱정했던 만큼 기쁨이 커서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만날 얼굴들에는 희색이 만연하다. 여객터미널 전광판에 멀리 백령도행 배편 말고는 모두 정상 운행이라는 표시도 떴다.
우리보다 앞서 굴업도행 배에 승객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풍도는 오붓이 스무 명 남짓인듯하다. 하루 한대 운행하는 풍도행 서해 누리호는 대부도 방아머리 선착장에 들러 승객을 추가로 태운다. 우리 일행 상당수가 합류했다. 인천과 다르게 비가 흩뿌리는데 워낙 1시간 남짓 비 소식이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일행을 맞으러 가는 나를 선원이 단호하게 막았다. 파도가 심상치 않으니 어서 선실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안전을 위해 회항하므로 모두 내리라는 방송을 듣고야 말았다. '두어 달을 계획하고 기다리던 풍도 섬 여행인데 이렇게 무산되다니!'
형편이 되는 사람은 일요일 출항하는 배를 타기로 했다. 월요일에 시간을 내지 못하는 이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방아머리 항구에서 바지락칼국수를 함께 먹으며 응원을 보내주었다.
하릴없이 대부도에 남게 된 우리는 구봉도에 기웃, 영흥도에 기웃하다 펜션 방 하나에 여섯 명이 구겨져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서해바다는 "내가 언제?"라며 사나운 성깔을 감추고 온화하게 맞아주었다.
풍도에 도착하면 점심 먹을 시간이 된다. 민박집 아주머니가 생선구이에 사생이나물 무침으로 상을 차려주셨다. 한 끼 만 원인데 밥은 밥솥에서 마음대로 퍼먹을 수 있다. 내일 출항 시간이 낮 12시라 부지런히 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오늘은 섬의 왼쪽을 돌 것이고, 내일은 오른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식물학자 최한수 박사님이 트레킹을 한층 더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풍도에 야생화가 많이 피는 이유는 철새들이 경유하며 해충을 잡아 주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말은 공감된다. 3월 초에 피었던 바람꽃은 이제 볼 수 없고 복수초(얼음새꽃), 노루귀, 꿩의무릇, 풍도대극, 제비꽃, 민들레, 목련, 동백꽃이 섬을 차지했다.
풍도 섬 트레킹은 바다를 끼고 걸으며 나지막한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하게 된다. 밭 매는 할머니의 빨간 셔츠 너머로 파란 바다가 보인다.
영흥도 화력발전소와 굴뚝이 내뿜는 수증기, 그 앞을 지나가는 배가 모두 흰색으로 맞춰 입었다. 화면은 잠시 파랑과 흰색 두 가지로 칠해진다. 할머니는 90도로 허리를 굽히고 부지런히 밭일을 하고 계신다. 카메라 들이대는 일이 한가로이 느껴져 할머니가 허리를 세울 때는 잠시 폰을 내려놓았다.
지난번 왔을 때보다 섬 곳곳에 긴 줄에 엮인 흑염소가 많이 보였다. 이야길 들어보니 흑염소를 키우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도망간 녀석들이 온 섬에 번식했단다. 매년 3월 10일 섬 주민들이 흑염소 몰이를 해 아기 염소만 남기고 모두 잡아다 팔고 있단다. 까만 새끼 염소 한 마리가 당차게 도망가 집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어느 목책 안에는 목줄 없이 수 십 마리가 방목되어 있는데 뿔 박치기를 하며 힘겨루기 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마리당 수 십만 원을 받을 수 있어 제법 수익이 된다.
연년생 아이를 낳고 하도 추위를 느껴 흑염소를 한 마리 고아 먹을 적이 있다. 효과를 보아 손발이 따뜻해졌기에 그 후로 몸이 차다는 사람에겐 흑염소를 적극적으로 권하는 중이다. 풍도를 걸으며 이 녀석들과 수시로 눈을 마주치니 앞으로 권하기가 쉽지 않겠다. 특히 작은 새끼 염소는 메애~ 하는 울음소리와 깡총대는 모양이 귀엽기 짝이 없다.
염소 몰이용 철책 아래 수십 년 된 환타 병이 보인다. 하얗게 빛바랜 폴리스라인은 밭에 불을 놓다가 화마를 당한 할머니의 수사 때 쳐 놓은 것이다. 갑작스레 바뀐 바람 방향은 할머니 쪽으로 불을 몰았고 2미터 가까운 둔 턱을 오르지 못해 그대로 화를 당하셨다는 것이다. 그저 지저분한 쓰레기인가 싶던 비닐 조각에 그런 사연이 있었다.
인조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보이기 시작한다. 인조라는 말에 어느 아이가 "은행나무 모형을 만들었느냐"라고 물었단다. 기본적인 한자와 어휘 수업은 필요하다. 풍도의 은행나무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조선 16대 왕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왔을 때 심은 것이다. 수백 년 수령만큼 아름드리 웅장하게 자라있다. 500년 넘는 세월 동안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는 수맥을 끌어모아 주민들이 우물을 파서 사용할 정독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도시설이 잘 되어 있어 우물의 지하수는 먹는 용도로는 관리되지 않는다.
흰민들레가 발길을 잡는다. 풍도에서 자라는 토종 민들레이다. 복수초는 복과 장수를 비는 꽃이라는 뜻으로 일본 사람들이 새해 어른들에게 선물하는 꽃이다. 우리말로는 얼음을 뚫고 자란다 해서 '얼음새꽃'이라고 한다.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꿩의바람꽃이 풍도 바람꽃 대신 우릴 맞아준다. 노루귀는 앞에서 보아도 예쁘지만 꽃잎 고개 숙인 뒤태를 보면 아가씨 목덜미처럼 보송한 솜털을 달고 있다.
동그랗게 보라색 눈을 더듬이처럼 세운 광대나물이 우릴 붙잡는다. 잎사귀와 까만 열매가 마치 여우 얼굴 같은 여우콩도 발견했다.
저녁밥을 먹기 전 석양을 보려고 붉배로 향하던 중 방향을 틀어 바닷가에 들렀다. 풍도는 진달래가 박힌 수석이 발견되는 수석 명산지였을 때가 있었다. 지금은 다들 캐어가버려 남아있는 돌이 별로 없지만 간혹 붉은빛이 섞인 작은 조각들이 보이긴 한다. 파도에 몽돌들이 차라 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누워있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데 집터임을 알 수 있는 돌무더기가 보인다. 지금은 전교생 2명이던 학교도 문을 닫고 인구가 점점 소멸되어가는 중이지만 어업이 활발했을 때는 수백 명이 살았던 섬이었다.
울창한 소나무밭 사이로 햇볕이 비집고 들어오는데 걷는 바닥이 융단을 깔아놓은 듯 폭신하다. 나무그늘이 끝나자 보라색 제비꽃 무리가 팝콘처럼 등장해 하늘하늘 손짓한다. 그리고, 올 초에는 붉었을 붉은 대극이 녹색 옷으로 갈아입고 산비탈 하나를 덮고 있다.
바다 윤슬이 반짝거려 눈이 부실 때 즈음 풍도 서쪽 끝 등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붉게 물드는 붉배에 늦지 않게 도착한 것이다. 숲 안쪽으로 들어가면 청나라 군의 무덤이 있단다. 백패킹 왔을 때 붉배 언덕에 자릴 선점하지 못하면 그 숲에 텐트를 쳤었는데 내가 밤중에 들은 소리가 그 병사들의 대화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망산천이라 하여 죽은 사람은 북쪽을 향하게 묻는데 중국 사람들은 서쪽을 죽음에 관련된 방위로 여기므로 풍도 서쪽의 무덤은 청나라 군사들의 무덤일 것이라 추측한다.
으스스한 무덤 이야기는 바다와 윤슬과 석양에 반해 이내 잊어버렸다. 누군가는 시를 쓰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거나 그저 가만히 앉아 하염없이 먼 곳을 보았다. 가끔 새 한 마리, 배 한 척이 지나가 정지된 풍경이 아님을 알려준다.
민박집에 저녁밥까지 주문해놓은 터라 밥과 반찬이 식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천천히 떨어지는 해의 속도에 맞춰 걸어 내려왔다. 강아지처럼 옆을 지켜며 따라오던 풍도의 해가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전, "진짜로 안녕이야~" 하며 팔을 휘젓는 통에 하늘이 온통 빨개져버렸다.
파도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초저녁 어촌 방파제엔 배들이 고이 정박되어 있다. 밥해놨는데 늦게 왔다는 꾸중 들을까 종종걸음으로 들어가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과하지 않게 한두 병씩 챙겨온 술이 나오고 사생이나물 부침과 육지에서 가져온 고기를 안주로 했다. 화로대에 불을 지펴 불멍을 하고 노래도 한 자락해본다. 매너 타임 있는 캠핑장도 아니지만 가로등 없이 깜깜한 밤이 어서 자라는 신호 같아 잠자리에 들었는데 눈 떠 보니 아침이다. 개운하다.
꼬박꼬박 아침 식사도 챙겨 먹고 믹스커피 한 잔을 타 마신 후 어제 가지 않은 구역에서 노루귀를 좀 더 보고 왔다. 입도할 때 화투 패를 때리며 나물은 돌아갈 때 주문하라던 선실 매점 아주머니가 이번엔 매우 바쁜다. 섬사람들이 던져놓고 가는 나물 보따리를 접수하고, 조개니 나물을 팔고, 라면 주문을 받아 끓인다. 장사를 마쳤다 싶을 때도 부산하더니 믹스 커피 몇 잔을 공짜로 권하고 있다. 선실 벽에 익숙한 자세로 기대어 앉은 그들은 아마 인근 주민이겠다.
마치 동남아 해외여행 며칠 갔다 온 기분으로 배에서 내린다. 처음 겪어 본 회항에 예정 없는 일정을 얹고, 걷는 촘촘히 유익한 해설을 들었다.
다녀온 사진을 공유하는 톡창에 사생이 나물 요리 경연이 벌어진다. 보려고 간 풍도가 맛으로 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