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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제네바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하고 단정한 도시였다. 사람들이 북적이지도, 소란스럽지도 않은데 이상하게도 따뜻하고 다정한 기운이 도시 전체에 감돌았다. 제네바는 단순히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국제적인 정신과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역사적 깊이가 고루 어우러진 상징 같은 곳이었다. 내가 제네바에 도착한 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저녁 무렵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그날 밤의 레만호는 마치 도시의 속삭임처럼 깊고 잔잔하게 나를 반겨주었다.
제네바 역에 내리자마자 느낀 건, 이 도시는 작지만 군더더기 없는 구조라는 점이었다. 길 찾기 어렵지 않았고, 대중교통도 편리했다. 무엇보다 기차역에서 호텔까지 도보로 10분이 채 되지 않아 이동이 수월했다. 체크인 후 잠시 짐을 풀고 곧장 레만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제네바를 대표하는 이 호수는 도시의 남쪽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다. 바람은 살짝 차가웠지만 산뜻했고, 호수의 수면은 잔잔했다. 물 위에는 제네바의 조명이 가볍게 일렁이고 있었고, 멀리 보이는 제또분수(Jet d’eau)는 조명을 받아 부드럽게 빛났다.
호숫가를 따라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지인처럼 보였다. 조용히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서로 기대어 있는 연인들, 음악을 들으며 산책하는 노부부까지. 특별한 사건은 없었지만, 그 순간들이 하나하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첫날은 레만호의 고요한 밤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다음 날은 이른 아침부터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다시 레만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제네바의 아침 공기는 참 맑고 깨끗했다. 호수 위로 아침 햇살이 부서지고, 갈매기들이 물 위를 스치듯 날았다.
낮의 레만호는 밤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어쩐지 조용하고 다정한 분위기, 그리고 호수를 끼고 앉은 벤치에선 모든 방향이 아름다웠다.
‘제또분수’는 제네바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무려 140미터 높이까지 물을 뿜어 올린다. 가까이 가면 물방울이 바람을 타고 얼굴에 닿는다. 어린아이가 되기라도 한 듯, 그 느낌이 왜 그리도 싱그럽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이 분수는 원래 19세기에 수력 시설의 압력 조절 장치로 설치된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제또분수가 있는 레만호 옆으로 펼쳐지는 공원은 ‘영국 공원’이다. 영국풍으로 조성된 이 넓은 공원은 도시 한복판에서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공원 벤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모습이 평화로웠다.
영국공원을 지나면 곧장 ‘꽃시계’가 나온다. ‘호라로지 플뢰르(Floral Clock)’라는 이름을 가진 이 시계는 실제로 작동하는 시계인데, 다양한 꽃들로 장식되어 있다. 봄과 여름이면 형형색색의 꽃들이 조화를 이루고, 계절에 따라 색감도 달라진다고 한다. 제네바가 시계의 도시라는 걸 이렇게 낭만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 참 인상 깊었다.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부르 뒤 푸르 광장’이었다. 이곳은 제네바 구시가지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 중 하나로, 중세 시대에는 시장이 열렸던 장소였다. 지금은 노천카페와 작은 상점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고, 사람들의 말소리와 커피 향이 골목마다 퍼져 있었다.
이 광장을 지나 언덕을 조금 오르면 바로 ‘성 피에르 대성당’이 나타난다.
이 성당은 제네바의 종교개혁 중심지였고, 장 칼뱅이 설교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된 이 성당은 겉으로는 소박하지만 내부는 꽤나 장엄하다. 계단을 따라 종탑에 올라가면 제네바 시내와 레만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풍경은 마치 제네바 전체를 한 컷에 담아낸 듯한 느낌이었다.
성당을 나와 골목길을 따라 내려오면 ‘제네바 시청사’가 나온다. 15세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역사적 회의가 많이 열렸던 장소로, 세계 최초의 적십자 조약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 시청사 뒤편에는 ‘무기고’라는 이름의 작은 박물관도 있다. 스위스 군사 역사와 관련된 전시품들이 진열되어 있어, 제네바의 중립과 평화 정신이 어떻게 뿌리내렸는지를 엿볼 수 있다.
시청사에서 가까운 곳엔 ‘타벨의 집(Maison Tavel)’이 있다. 제네바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으로, 현재는 제네바의 생활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선 중세 시대 제네바 사람들의 생활 모습, 가구, 문서, 도구 등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어 제네바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지하 전시실에 있는 19세기 목재 제네바 모형은 매우 정교하고 흥미롭다.
타벨의 집을 둘러본 뒤 ‘뉘브 광장(Place de Neuve)’으로 향했다. 이 광장은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주변에 오페라 하우스와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가볍고 옷차림도 세련되어 있어, 제네바의 문화적 품격을 체감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종교개혁 기념비’이다. 공원 한쪽 벽면에 길게 새겨진 이 조형물은 장 칼뱅, 기욤 파렐, 테오도르 드 베즈, 존 낙스 등 종교개혁의 주역들을 기리고 있다.
제네바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사상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주는 상징 같은 장소였다. 정중하면서도 묵직한 분위기 속에서, 제네바라는 도시의 뿌리를 다시금 되새기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제네바에서의 1박 2일이 마무리되었다. 짧지만 알찼고, 조용하지만 깊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 같았고, 동시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거실 같았다. 제네바는 시끄럽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담백하고 정직하게 마음을 채워주는 곳이다. 한 번쯤 자신을 위해 조용한 시간을 선물하고 싶을 때, 이 도시를 꼭 추천하고 싶다.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제네바의 잔잔한 매력에 자연스레 빠져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