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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파울 루벤스

페테르 파울 루벤스

플랑드르의 화가. 바로크 시대 플랑드르 제일의 화가로서 날로 높아가는 명성과 많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특유의 화려하고 장대한 예술을 펼쳐나갔다. 현란한 그의 작품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며 밝게 타오르는 듯한 색채와 웅대한 구도가 어울려 생기가 넘친다. 독일 베스트팔렌 지겐 출생.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지겐으로 피해 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자 10세 때 가족과 함께 고향인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3년 뒤 14세에 랄랭 백작부인의 시동이 되어 귀족사회의 습속을 익혔고, 화가가 될 뜻을 세웠다. 15세 때 A.노르트(1562∼1641), O.베니우스(1556∼1629) 등에게 그림을 배운 뒤 21세 때인 1598년 당당히 안트베르펜화가조합에 등록, 23세 때인 1600년에 이탈리아 유학의 꿈을 실현시켰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8년 동안 베네치아·로마 등지에서 고대미술과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당시 이탈리아의 바로크화가인 M.카라바조와 카라치파(派)의 영향을 받아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차차 명성을 얻는 한편, 만토바공(公)의 인정을 받아 그의 사절로서 외교적 사명을 띠고 에스파냐로 여행하였다. 1608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왔을 때 이미 어머니가 운명한 뒤였으나, 그는 플랑드르 제일의 화가로서 고향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1609년 플랑드르 총독 알브레흐트 대공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10월에는 명문 집안의 딸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하였다. 그 뒤로는 날로 높아가는 명성과 많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루벤스 특유의 화려하고 장대한 예술을 펼쳐나갔다. 역사화·종교화를 비롯하여 많은 종류의 제재를

카놈삐약뿐

카놈삐약뿐

쌀가루, 설탕 등을 첨가하여 만든 초록색 혹은 검은색 푸딩 위에 잘게 조각낸 코코넛을 곁들여낸 타이의 전통적인 디저트이다. 쌀가루와 설탕을 주재료로 하여 만든 타이의 전통적인 디저트로, 초록색 혹은 검은색을 띠고 부드러운 질감에 달콤한 맛을 가지고 있다. 자선 행사나 장례식과 같은 행사에서 활용되는 음식이며, 타이어로 ‘카놈(ขนม)’은 과자, 디저트를, ‘삐약(เปียก)’은 푹 고아지다는 의미를, ‘뿐(ปูน)’은 석회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요리에는 라임스톤 워터라는 석회암으로 만든 천연 미네랄워터가 사용되기도 한다. 요리는 주재료인 쌀가루 외에 칡전분이나 타피오카 전분을 첨가하여 보다 걸쭉한 질감을 만들기도 한다. 요리의 색은 탄 코코넛 껍질이나 다운 판단 추출물로 내는데, 오늘날에는 판단 잎을 활용하여 만든 초록색 카놈삐약뿐이 검은색 카놈삐약뿐보다 대중적이다. 완성된 카놈삐약뿐 위에는 잘게 조각낸 코코넛을 올려 먹는다. 조리법 볼에 쌀가루, 칡전분, 설탕을 넣어 섞는다. 여기에 라임스톤 워터를 넣어 색을 내는데, 초록색을 낼 경우에는 다운 판단 추출물을 라임스톤 워터와 섞어 사용하고, 검은색을 낼 경우에는 그릴에 검게 구운 코코넛 껍질을 물에 씻었다가 건조하여 잘게 빻아 만든 가루를 라임스톤 워터와 섞어 사용한다.

비엔나 역사지구

비엔나 역사지구

유럽의 음악을 이끌었던 도시로 켈트족과 로마인 시대서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바로크 성과 정원을 포함한 다양한 건축물들이 있다. 빈은 16세기 초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유럽의 문화와 정치 중심지이자 유럽 음악의 본고장으로 번영을 누렸던 곳이다. 빈 시내에는 지금도 수백 년의 영화를 보여주는 웅장한 건축물과 기념물, 정원과 공원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중세부터 19세기까지 다양한 건축물들이 밀집된 빈의 역사중심지는 비교적 최근인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빈 역사중심지의 명소는 유명한 환상도로(環狀徒路, Ring strasse) 주변에 몰려 있다. 빈 중심부를 감싸고 있는 이 도로는 1857년에 건설된 것으로 길이는 4km에 불과하지만 폭이 50~60m나 되는 넓은 도로다. 여기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빈의 상징물이 되다시피한 성 슈테판 성당(St. Stephen's Cathedral)이다. 8백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슈테판 성당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 사원으로 꼽히는 곳이다. 성당의 남쪽 탑은 높이가 137m나 되며, 특히 모자이크 지붕이 아름답다. 13세기부터 600여 년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가 거주한 호프부르크(Hofburg) 왕궁은 그 자체가 거대한 복합 단지다. 내부에는 스위스 왕궁, 신왕궁을 포함한 여러 개의 궁전과 교회, 박물관, 정원 등이 있다. 정면이 초승달처럼 휘어진 신왕궁은 이곳에서 가장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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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용

전수용

조선후기의 의병장. 대동창의단과 호남동의단을 결성하여 일본군에 맞서 투쟁하였다. 1879년 전북 임실(任實)의 가난한 유생(儒生)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장한 후 전북 진안(鎭安)에 살면서 평소에는 농사일을 주로 하였고 이한룡(李漢龍)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다. 1905년 무렵 익산(益山)에서 송병선(宋秉璿)·최익현(崔益鉉) 등이 호남지역의 젊은 재사(才士)들을 모아 학문을 논하였는데 그도 이에 참여하였다. 이로써 그는 학식과 견문을 넓힐 수 있었고 명문가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켜 투쟁하는 사례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실천유학자(實踐儒學者)로 성장하였다.   1907년 진안의 유생 이석용(李錫鏞)이 ‘창의동맹단(倡義同盟團)’을 만들어 의병을 일으키자 전수용은 참모(參謀)로 참여하여 투쟁하였다.그는 1908년 창의동맹단이 일본군을 피해 일시 해산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해산 후 이석용의 권유에 따라 장성(長城)에서 활동했던 의병장 김태원(金泰元)과 합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전수용이 장성에 당도했을 때 김태원은 이미 순국한 뒤여서 그는 한동안 나주(羅州) 의병장 오성술(吳聖述)에게 의탁하여 지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조경환(曺京煥)이 와해된 김태원의 세력들을 다시 규합하고 전수용으로 하여금 대장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전수용은 이를 받아들여 1908년 7월 25일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을 결성하고 의병대장으로 활동했다. 1908년 8~9월 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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