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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

아고라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광장으로 민회(民會)나 재판, 상업, 사교 등의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는 공적인 의사소통이나 직접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말로 널리 사용된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폴리스(polis)에 형성된 광장으로, 그리스인들은 이 곳에서 민회(民會)와 재판, 상업, 사교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아고라(Agora)’라는 말은 ‘시장에 나오다’, ‘사다’ 등의 의미를 지니는 ‘아고라조(Agorazo)’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장’의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아고라가 시장의 기능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시민들의 일상 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사람이 모이는 곳’이나 ‘사람들의 모임’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신전(神殿)과 주요 관공서가 있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가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였다면, 아고라는 일상적인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민 생활의 중심지였다. 아고라는 시장으로 경제 활동의 중심지였으며, 시민들이 사교 활동을 하면서 여론을 형성하던 의사소통의 중심지였다. 학문과 사상 등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으며, 시민들이 민회(民會)를 열어 국방이나 정치 문제를 토론하던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도편추방(陶片追放, ostrakismos)을 위한 집회나 재판도 아고라에서 열렸으며, 연극 무대와 운동장으로도 쓰였다. 아고라는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의 도시국가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며, 로마에서는 포룸(forum)이라는 명칭으로 계승되었다. 아고라는 미케네(Mycenae) 문명의 붕괴 이후

리비우 역사지구

리비우 역사지구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 지역에 있는 중세 역사 유적지이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르비우는 중세 후기에 세워진 이후 수 세기에 걸쳐 번영을 누렸으며 행정, 종교 및 상업의 중심지로서 발달하였다. 이곳의 중세도시 지형은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그곳에 살았던 다양한 민족 공동체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탁월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정 면적은 약 1.2㎢이며 완충 지역의 면적은 약 24,41㎢이다.  르비우는 5세기와 6세기부터 정착지가 존재했던 위치에 중세 후기 경 세워진 도시이다. 무역과 정치 발전에 유리한 지리적 요건으로 인하여 행정, 종교, 상업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건축 및 예술적 유산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영향을 받았던 동유럽의 전통을 반영한다. 르비우 역사지구는 성과 주변 지역, 도심 지역을 포함하는 주요 지역과 성 유리 대성당(St. Yuri’s Cathedral)이 있는 남서쪽 지역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시 발달의 여러 단계를 알아볼 수 있는 많은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이 캐슬(Lviv High Castle, Vysokyi Zamok)과 성 주변 지역인 피드잠체(Pidzamche)는 가장 오래된 주요 지역으로 그 역사는 5세기로 거슬러 올라 간다. 르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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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기본조약

한일기본조약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국과 일본 양국의 일반적 기본(국교) 관계를 규정한 조약. 배경 1948년 8월 한국 정부가 수립된 후,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李承晩)은 일본에게 일제강점기 동안 입은 피해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고자 하였다. 이에 1949년 2월 이승만 정부는 대일배상청구위원회(對日賠償請求委員會)를 설치하여 관련 자료를 수집하게 하였다. 그 결과 대일배상요구조서(對日賠償要求詔書)가 작성되었다. 대일배상요구조서는 배상 청구에 관한 세목과 증빙자료로 구성되었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 정부는 일본에게 약 20억 달러(310억 엔)의 배상을 요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의 배상 및 책임 문제를 논의하는 대일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승전국으로 참여하지 못하면서 배상 규모를 축소하여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은 소련의 팽창에 위기감을 느끼고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설립하고, 6·25전쟁에 참전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아울러 일본을 동아시아에서의 파트너로 삼아 공산주의의 확장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냉전(冷戰)이라는 국제 정세에서 미국에게 한국과 일본의 관계 회복은 중요한 해결 과제였다. 한국이 대일강화조약의 승전국이 되지 못하자, 미국은 곧 한국과 일본의 회담을 알선하였다. 체결 과정 제1차 한일회담은 연합군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시볼드(William J. 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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