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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

악비

중국 남송 초기의 무장(武將)이자 학자이며 서예가. 북송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에 참전하여 전공을 쌓았으며, 남송 때 후베이[湖北]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지만 무능한 고종과 재상 진회에 의해 살해되었다. 자는 붕거(鵬擧)이며 상주 탕음현의 가난한 농민 출신이지만 금(金)나라 군사의 침입으로 북송(北宋)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에 참전하여 전공을 쌓았다. 북송이 망하고남송 때가 되자 무한(武漢)과 양양(襄陽)을 거점으로 후베이[湖北]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다. 그의 군대는 악가군(岳家軍)이라는 정병(精兵)으로, 유광세(劉光世)한세충(韓世忠)장준(張俊) 등 군벌의 병력과 협력하여 금나라 군대의 침공을 화이허강[淮河], 친링[秦嶺] 선상(線上)에서 저지하는 전공을 올렸다. 당시 악비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고 금나라 군대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하지만 당시 남송 조정에서는 재상인 진회(秦檜)가 금나라와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하였으며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는 악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주전파(主戰派)인 군벌과 이상파(理想派)의 관료들 사이에분쟁이 지속되었고 1141년 금나라와 강화를 주장하였던 재상 진회는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서 그들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중앙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조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투옥된 뒤 39세의 나이에 살해되었다. 진회가 죽은 후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구국(救國)의 영웅으로 악왕묘(岳王廟)에 배향되었다. 1914년 이후에는 관우(關羽)와 함께 무묘(武廟)에 합사(合祀)되었다. 학자로서도 뛰어났으며, 저서 《악충무왕집(岳忠武王集)》이 있다.

쇤브룬 궁전과 정원

쇤브룬 궁전과 정원

함부르크 제국의 황제가 거주하던 성이며 건축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와 니콜라우스 파카시가 설계하였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남서쪽 교외에 있는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궁으로, 합스부르크 왕조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한 많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고,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했을 때는 나폴레옹군의 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 때 유럽을 호령했던 왕가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만, ‘아름다운 샘(Schonner Brunnen)’에서 유래한 쇤부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빼어난 모습을 보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건축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가 황제의 수렵용 소궁전이 있던 자리에 1696부터 1700년 사이에 쇤부른 궁전을 처음 지었다. 이어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때인 1744년부터 1749년 사이에 니콜라우스 파카시(Nicolaus Pacassi)의 설계에 따라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개축 규모가 워낙 커서 애초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알력관계에 있던 이웃나라 프랑스에 국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있었던 터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견줄 만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이 탄생하게 된다. 궁전은 부드러운 황색의 외벽이 인상적인 거대한 3층 건물로 방이 1441개나 된다. 바로크 양식의 건물에 화려한 로코코 양식의 실내장식을 해 전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따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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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

정약전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이익의 학문에 접하였다. 남인계(南人系)의 학자들과 교유하고 역수학, 천주교 등 서학(西學)에 관심을 가졌다. 천주교에 입교한 후 신유사옥 때 흑산도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대표저서로 《자산어보(玆山魚譜)》가 있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자는 천전(天全), 호 일성루(一星樓)·매심재(每心齋)·손암(巽庵)·연경재(硏經齋)이다. 평산 씨와 혼인하였고 아들 정학초를 두었다. 1758년 진주 사를 지냈던정재원(載遠)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정약용(丁若鏞)의 둘째형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의 학맥을 이어받았으며, 서학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성호학파를 이끌었던 권철신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그에서서학뿐만아니라 실학사상과천주교의교리를 접하게 되었다. 17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790년(정조 14년) 왕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증광별시에서 장원으로급제하고 부정자(副正字)·초계문신(抄啓文臣)에 이어 1797년 병조좌랑(兵曹左郞)이 되었다. 한국 천주교 태동기를 이끌었던 이벽, 이승훈을 통해서양의 역수학(曆數學)에 관심을 가졌고,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이벽은 정약전의 장형 정약현의 처남이었고 이승훈은 그에게매형이었다. 정치적으로 남인에 속했지만 두드러진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 정약용이 노론과 정치적 대척점에 서있는 입장이 되자노론 벽파의 공격을 받았다. 남인을 등용하여 탕평책을 펼치던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자노론 벽파의 공격이 본격화되었으며 신유박해(1801, 순조 1)가 일어나 다른 천주교 신도들과 함께 화를 입게되었다. 동생 정약용과 함께천주교를 신봉하였다는제목으로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고 전남 신지도로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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